전출처 : 끼사스 >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이오덕 (한국일보 2006년4월26일)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백성의 말’을 향하여
 
^‘우리글 바로쓰기’(초판 1989, 고침판 1992)를 쓰며 이오덕(1925~2003)이 글과 말에 대해 품은 생각은 한글학회 둘레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한글학회 언저리의 한국어학자들과 한국어운동가들이 대체로 언어민족주의자라면, 이오덕은 언어민중주의자였다. 물론 이오덕은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우리글 바로쓰기’에는 언어민족주의자 이오덕의 생각을 드러내는 문장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우리말과 글을 바로 쓰는 일은 무엇보다도 밖에서 들어온 불순한 말을 먼저 글 속에서 가려내어 깨끗이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거나 “우리말이 잡스럽게 되는 것은 마침내 우리 겨레의 넋이 말에서 떠나 버리는 것”이라는 견해 따위가 그 예다. 그는 또 우리 글자로 써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오덕 역시, 최현배를 비롯한 언어민족주의자들처럼, ‘깨끗한 우리말’ ‘순수한 우리말’에 깊은 정을 보였다. 다시 말해 드센 순화 욕망이 그에게도 있었다. ‘우리글 바로쓰기’의 적잖은 지면은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우리말을 보여주는 데 쓰였다.
^그러나 이오덕이 보기에 흔히 민족적이라 일컫는 것이 민중적인 것과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았다.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인 것의 바탕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민족적인 것을 그리도 내세운 것은 그것이 대체로 민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둘이 우연히 맞부딪치게 될 때, 이오덕은 기꺼이 민중 쪽을, 그의 말을 받아쓰자면 ‘백성’ 쪽을 편든다. 그 점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것은 이른바 한글운동가들이 새로 만든 말에 대한 그의 거리낌에서다. 이오덕은 말한다.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청의 관리들이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름없이 겨레말을 어지럽힌다.” 한글학회 둘레의 일부 호사가들이 즐기던 고유어 새말 만들기를 이오덕은 혐오했다. 그 신조어들은,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민족과 관련될 수는 있겠지만, 민중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모람’(회원)이나 ‘먹거리’(먹을거리), ‘읽거리’(읽을거리) 같은 말은 이오덕이 보기에 우리말이 아니었다. 민중언어의 어법 바깥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오덕은 국어운동가 대다수보다 한결 보수적이었다.
^그러니, 우리말과 글을 ‘한말글’이라 부르려는 시도를 이오덕이 크게 나무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한말글 사랑 겨레 모임’이라는 국어운동단체의 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이를 사양하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대관절 ‘한말글’이 무슨 말입니까? 나같이 평생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아온 사람도 귀에 설게 느끼는 이런 말을 온 백성 상대로 일을 해 나가려는 모임의 이름으로 내걸고 싶어하는 분들의 속뜻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돼도 새로 만들어 자꾸 퍼뜨리면 결국을 쓰게 된다’고 할 것 같은데 그런 태도는 분명히 우리말을 바로잡는 일을 해친다고 봅니다.”
^이오덕이 이런 새 말 만들기만 꺼린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이미 있어온 고유어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을 굳이 찾아내 쓰는 사람들 역시 슬그머니 타박했다. “중국글자말(한자어-인용자)도 아니고 일본말이나 서양말도 아니고, 그러니까 순수한 우리말인데 이미 옛말이 되어서 요즘은 입말로 쓰지 않는 말을 글에서 즐겨 쓰는 경향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고 싶다. 순수한 우리말인데 지금은 그다지 쓰지 않는 말을 찾아내어 쓰는 일은 대단히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로 우리 것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들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으니까 좀 귀에 설고 새롭고, 그래서 그것을 쓰면 유식해 보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그런 좀 근사해 보이는 말을 써 보자고 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런 증거로는 똑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많이 쓰는 말이 있는데도 그런 입말을 쓰지 않고 일부러 입말이 아닌 말, 어쩌다 글에만 나오는 말만을 즐겨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옛말이 되어 요즘은 입말로 쓰지 않는 말’을 글에서 쓰는 것까지 마땅치 않아 했으니, 거의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고유어를 사전 한 귀퉁이에서 찾아내 제 글에 버젓이 끼워 넣는 언어민족주의자들의 멋 부림을 이오덕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말하자면 이오덕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순수한 우리말이냐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백성의 말이냐 여부였다. 그 백성의 말은 ‘글의 해독을 입지 않은 말’이었고, 그 적잖은 부분은 ‘농민의 말’, ‘어렸을 때 배운 고향 말’이었다. 당연히, 그는 사투리에 너그러웠다.
^이오덕이 바람직하게 생각한 글은 ‘언문일치’의 글이었다. 이때의 언문일치란 이광수 이후 현대 소설 문체에서 확립됐다고 흔히 여기는 언문일치가 아니었다. 이오덕의 언문일치는 글을 말에 고스란히 포개는 진짜배기 언문일치였다. 그러니, 이광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요즘 소설도 이오덕이 생각하는 언문일치에선 멀찌막하다. 지난해에 발표된 소설 한 대목을 보자. “망각이 우리를 구원한다.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닐지라도 새롭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망각의 힘이다. 하지만 그 기능은 선택적이어서 행복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거둬가면서 불행의 기억은 조각들을 남겨두곤 한다”(조선희의 ‘한때 우리 신촌거리에서 만났지’에서). 나무랄 데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오덕이라면 많이 나무랐을 것이다.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오덕에게 야단을 덜 맞으려면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라도 고쳐야 하리라. “잊을 수 있으니 살 수 있지. 진짜 새로운 게 아니더래두 새롭다구 착각하게 하는 게 망각의 힘이야. 그렇지만 그게 또 불공평해. 행복했던 기억은 말끔히 없어지는데 불행했던 기억은 남아있을 때가 많거든.”
^그러니까 이오덕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문학은 구비문학이었다. 그는 ‘우리글 바로쓰기’ 제4장 ‘말의 민주화’ 제1절 ‘이야기글의 역사’에서 경기도 강화군(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81세 할머니가 구술한 ‘까투리와 오리의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옮겨놓으며, 이를 우리말의 본 바탕을 짐작하게 하는 깨끗한 말로 칭찬하고 있다. 이오덕이 이 책 여러 곳에서 지적했듯, 이런 언문일치의 글에서는 문장이 ‘-다’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속에서는 지문과 대사가 문체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오덕은 소설이고 수필이고 논문이고 할 것 없이 우리 글을 모조리 ‘다’ 하나로 끝맺게 된 상황의 첫 책임자로 이인직을 꼽고, 이런 관행이 일본글의 흉내라 지적한다. 이오덕에 따르면 바로 이 ‘-다’ 글체야말로 우리말 이야기글을 입말에서 떼어놓은 주범이다. 글 쓰듯 말하지 말고 말하듯 글을 쓰라는 것이 ‘우리글 바로쓰기’의 요지다. 물론 그 때의 말은 학교교육의 때를 타지 않은, 우리가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이다.     
^‘우리글 바로쓰기’의 상당 부분은 저자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표현들을 잘된 표현으로 고치는 형식으로 서술됐다. 관형격 조사 ‘-의’와 접미사 ‘-적’의 사용을 절제하자거나 ‘-에 있어서’, ‘-에의’ 같은 일본말투를 쓰지 말자는 제안은 특히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사사로운 회고를 하자면, 나는 89년 이 책의 초판을 읽은 뒤 그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써오던 ‘-에 다름 아니다’나 ‘주목에 값한다’ 따위 표현들과 헤어졌다. 나는 그 뒤 ‘-에 다름 아니다’를 쓸 자리에선 ‘-와 다르지 않다’, ‘-와 한가지다’ ‘-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고, ‘주목에 값한다’고 쓸 자리에선 ‘주목할 만하다’고 썼다.
^그러나 이오덕의 처방을 죄다 따를 수는 없었다. 어느 땐 그의 견해에 공감할 수 없었고, 어느 땐 공감하면서도 해묵은 습성을 이기지 못했다. 이오덕의 우리 말 치료는 어휘 수준을 훌쩍 넘어서 문체에 이르고 있는 만큼, 그에게 ‘양호’ 판정을 받을 글쟁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글 바로쓰기’ 전체를 통해서, 함석헌, 문익환, 권정생 같은 이들만 겨우 퇴원 허가를 받았다. 주시경이나 최현배 같은 보수적 국어학자조차, 영어 문법의 과거완료 시제와 과거완료진행 시제를 베껴와 ‘-었었다’ ‘-고 있었었다’ 따위를 우리말 시제 체계에 넣었다는 이유로 입원 가료 판정을 받았다. 이오덕 선생이 살아 계셔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고치실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이 고치신 곳을 내 고집대로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객원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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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26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이 쌩까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지요.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은 '한글 운동가'들도 비판하시거든요. 제맘대로 말을 휘두르지 말라고...
지나치게 불필요한 한글 맞춤법만 강조한다든지,
순우리말만 지향하는 순수주의자들.(명사를 이름씨, 동사를 움직씨로 쓰던 이상한 외계어를 만들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말, 영어에 오염된 말을 고치자고 하면, 고종석같은 치들은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데 까탈스럽게 왜 그러셔?'할는지 몰라도,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은, 당신 죽기 전에 우리말이 어떤 것이었는지 남겨 두고 싶으셨던 거지요. 원래 우리 말이 어땠다는 것. 오염되었다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말은 이랬는데 오염되었다는 것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고종석은 무조건 순수를 싫어하고 오염을 좋아합니다만, 그런 고집은 짜증납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대구 까면서, 복거일 같은 넘의 공용어론에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헤벌레한 논리.

프레이야 2006-04-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까고 있는 고종석 ㅎㅎ 글샘님 안녕하시죠?
 
이안의 산책 - 자폐아 이야기
로리 리어스 지음, 이상희 옮김, 카렌 리츠 그림 / 큰북작은북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이안의 산책>은 '자폐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 제목 때문에 이안이라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책장을 열게 된다. 이 책은 자폐아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이며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조금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폐아는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 같다는 생각만이 약간 들 뿐이다.

작가는 오랜 교직생활 중 7년간을 특별한 아이들과 지냈다고 한다.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이 글을 썼다. 그래서인지 자폐아 이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아이의 특이한 행동과 심리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안에게는 착한 누나가 둘이나 있다. 그 중 작은 누나 줄리가 이 책의 이야기꾼이다. 한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주의를 듣고 이안을 데리고 산책길에 나선 줄리는 이안의 남다른 행동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성가시다는 느낌도 갖는다. 하지만 공원에서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이안이 사라지자, 줄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노심초사하는 장면은 참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그저 보통의 아이들이 호기심을 기울일 만한 곳만 말해주어 줄리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줄리, 자신이다.  곰곰이 생각해본 덕택에 이안을 찾고 얼싸안는 장면 또한 가슴을 젖게 한다.

이안의 감각은 아주 발달해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감각들에 특별한 기관이 달려있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이 생각해보면 그런 감각들은  보통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지만 그저 지나쳐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혹은 무감각하게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안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아이는 자신만의 감각에 상대적으로 예민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안 같은 아이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웃을 줄도 모른다. 이안의 세계를 이해해주는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스러운 부분은 줄리가 이안을 찾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줄리는 이안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안이 하듯 따라서 행동한다. 귀를 기울여 이안이 듣는 소리를 향해 촉수를 세우기도 하고 이안처럼 천장선풍기를 어지럼증이 나도록 올려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집에 도착해서 줄리는 "멋진 산책이었어, 이안." 이렇게 말한다. 이안은 줄리를 바라보고 씽긋 웃는 표정을 짓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의 가족 모두에게 힘을 주는 가슴 뜨뜻한 이야기이지만 전혀 신파조이지도 않고 억지스럽거나 과장된 부분이 없다는 점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았는데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그림이 참 좋아요. 누나가 참 착해요."

역시 교훈은 가르쳐서 주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젖어들게 하는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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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4-21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도 자폐아가 있는데 지금 방년 25세의 아리따운 아가씨예요. 자폐아 키우는 것 정말 보통 일 아이더라구요. 장애를 겪는 것도 힘든데 주위사람들의 시선도 그렇고, 사회보장시설도 열악하고....저런 책이 많이 나오는 건 좋은 현상이겟죠?

프레이야 2006-04-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해를 하는 아이도 본 적이 있어요. 애정결핍에서도 이런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도 보았구요. 사실 우리 모두 어느정도 자폐증세를 갖고 사는 건 아닌가싶네요..

석란1 2006-07-0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뵙습니다.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혹시 <착한아이사세요>의 작가 배혜경님이신가요?
 
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길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했다. 지상의 길과 허공의 길은 양립하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늘 교차하며, 생기고, 변하고, 자란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가 단 하나뿐이라면 단조롭고 지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오목렌즈로 모아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채로 내어뿜는다. <첨탑>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런 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적지 않은 은유와 상징들을 포석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말 못할 이야기들이 우리들 숨어있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상에 난 길을 '언덕길'이라 한다면 허공에 난 길은 '첨탑'으로 비유된다. 여기서 나는 이문열의 <하늘길>이 생각났다. <첨탑>은 중세 어느 성당의 주임신부가 된 조슬린이 세운 '하늘길'이다. 도달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 '하늘'이 존재하지 않듯이, 탑의 꼭대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경계도 없고 '없음'만 있을 뿐이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하늘길이듯이, 사백 피트 탑의 꼭대기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놓는 과정만이 조슬린에게도 우리에게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애시당초 첨탑은 환상으로 이루어졌고, 역설적이게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성직자다운 품성을 타고 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조슬린(우리들 대부분이 이런 부류다)은 첨탑을 세우며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던 젊은 날의 2년을 회상한다. 조슬린은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 날의 오만과 무모함, 열정과 욕망을 떠올리며 몸을 떨고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못하였지만 사람은 믿음으로 비합리적인 주문을 실행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수도 없이 죄를 짓는 일이다. 숨을 쉬고 내뱉고, 음식을 먹고 배설하고, 욕정을 품고, 사람을 부리고, 내 뜻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서는 목숨을 지탱할 수가 없다. 첨탑은 '돌묵시록'이라고 단언되는데, 이는 존재의 막다른 곳을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보인다. 첨탑은 그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껏 자만하기 위한 신기루 같은 것이다.

신기루란 실체가 있어야 생기는 법. 실체는 지상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조슬린의 성당이 자신의 존재이듯, 우리가 사는 집이나 일상적인 삶의 틀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안에서도 우리는 드높이 오르고 올라 어떠한 최고의 모형에 이르려한다. '첨탑'은 그 과정에 의미를 둔다면 나쁘지 않은 삶의 단계이자 과정이다. 그곳에 오르는 단계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진다. 첨탑은 '최고의 기도 모형'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갈망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꿈(환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존재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의무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첨탑을 세우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랑을 기만하고, 우정을 금가게 하는 일은 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꽃들의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조슬린이든 우리들이든, 위(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혹은 하늘)만 쳐다보고 가다가 어느 날 저 아래에 움푹 패어있는 지하구덩이를 보게 되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암흑의 본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곤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곤 한다. 조슬린의 성당은 그와 한 몸이며 지하실은 조슬린의 음울한 내적 욕망을 드러내는 곳이다.

행동의 동기는 대개 사소한 것에 있다. 조슬린의 첨탑은 흠모했던 빨간머리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로 귀결된다. 그가 무모하리만치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이며 쌓아올리는 첨탑은 남성의 상징으로 우뚝 선다. 의식의 표면으로 불쑥불쑥 떠오르곤 하는 성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그는 꿈에서도 천사를 불러들여 사탄을 물리치려한다. 어떠한 고결한 명분도 한낱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불꽃보다는 위대하지 않은 걸까. 성직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저 한 명의 남자에 불과한 조슬린은 가장 인간적인 고해를 마음속으로 행하며 지상을 떠난다. 자신의 비유를 못 알아 듣는 신부를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드디어 죽음으로서만 속죄할 수 있다.

<첨탑>은 중세라는 시대와 성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굳이 그런 배경을 의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다. 주석이 친절하게 달려있어 역자후기 뒷장을 참고하면서 읽어내려가면 숨은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조슬린은 우리 시대 어느 누구와도 비슷한 속성을 지니는 사람이다. 굳이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유는 좀더 절제된 인간본성을 어렵사리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나싶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점은 존재감의 부재에서 오는 인간본연의 갈등을 좀더 거슬러올라가 따져보기 위함이 아닐까. 신 중심의 암흑시대에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마음속에 세우고 있는 첨탑 하나가 있다면 훗날 어떤 의미로 남을지 생각해본다. 의미를 둔다면 단지, 균형과 조화를 미덕으로 하는 비례의 원칙이 중요하겠다.

마치 조슬린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격랑하듯 읽어가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문장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조슬린의 감정의 동요를 따라 때로는 단절되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는 척 가장하기도 하는, 대담한 문장 안에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는 것 같다. 마치 조슬린의 이성과 감정이 그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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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6-04-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들이 정리가 되네요! ^^
 
바다소 - 중국문학 다림세계문학 1
차오원쉬엔 지음, 첸 지앙 홍 그림, 양태은 옮김 / 다림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작가는 중국인이다. 세계문학 시리즈로 청소년을 겨냥하여 다림에서 묶어내는 책의 하나이다. '바다소'라는 생소한 이름은 네편의 단편 중 두번째 것이다. 네편 모두 성장의 진통을 겪고 훌쩍 크는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그리고 있다. 성장의 통과의례로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은 '숲'이다. 여기 <바다소>에서는 '물'이 그 배경으로 배수진을 치고 있다.

'물'은 맑고, 변화하며, 순한 것 같지만 급하고 때로는 과격하다.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때로는 무서운 얼굴을 하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하다. '물'은 사람의 의식이다. 물밑의식은 내면의식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네편의 작품은 하나같이 물을 배경으로 한다. 물에서 사건이 이루어지고, 물을 사이에 두고 갈등이 일어나며, 물에서 화해하고, 죽어서도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물은 기쁨이기도 하고 가슴에 스미는 슬픔이기도 했다.

'빨간 호리병박'에서 뉴뉴는 자신에게 설렘을 주었던 빨간 호리병박으로 인해 오해가 생겨 우정을 깨뜨리고나서 호리병박을 버려두고 홀로 물을 저어 나아간다. 호리병박은 어른이 되기 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의지의 대상이다. 그 대상은 육체적, 물질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것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뉴뉴는 호리병박을 물결따라 보낸다. 나의 판단과 가치관으로 자아를 확립하여 '나'의 삶을 살아가는 의식을 말한다. 누군가의 가치에 기대어 내가 흔들리고, 혹은 내가 없을 때 진정한 성숙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울테니 말이다.

'바다소'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 역경을 이겨내고 한 사람의 남자로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할머니가 홀로 모은 돈으로 바다소를 사서 집으로 끌고 오기까지 바다소와 소년이 겪는 이야기가 자세히 펼펴진다. 진흙탕을 뒹굴듯, 묘사가 워낙 상세하여 실감날 뿐만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긍정적인 생각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소년의 뜨거운 콧김과 온몸에 난 상처가 눈앞에 그려진다.

'미꾸라지''아추'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관심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사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과 이기심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율이 인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 동시에 간직되어있는 선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부분이 이것이 아닌가싶다. 본래의 양심을 되찾고, 자신을 단죄하는 힘은 폭넓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는다.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픔을 겪기 마련이다. 크든 작든, 사소한 것이든 엄청난 것이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그것과 스스로 화해하는 과정에서 성장을 거듭한다. 여기 네편의 단편들은 그러한 주제를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게 한다. 이야기 전체의 사건과 배경과 인물에 그 주제가 녹아있다. 진솔하되 경박하지 않게 심리를 표출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에둘러 느끼게 한다. 각각의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상징과 은유가 되어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준다.

이 책은 세밀화 같은 글과, 글에 걸맞는 수묵화 같은 삽화가 잘 어우러져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낯선 배경과 이름, 중국 남부의 풍습 같은 것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책장을 덮을 때까지 관심과 긴장을 놓지 않게 할 만하다. 서정적인 문장과 마음 깊숙한 곳을 후비고 들어오는 깊이 있는 눈이 마음을 흔든다. 중학 1년 정도가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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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모네의 정원에서

모네의 정원에서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글 / 레나 안데르손 그림 / 김석희 옮김 / 미래사

 

 

 



 
 
 
나는 꽃을 무척 사랑한답니다.
그건 우리 아파트 위층에 사시는 블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예요.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정원사이셨지만 지금은 은퇴하셨어요.
나는 할아버지 댁에 가서 프랑스 화가인 클로드 모네에 관한 책을 보는 게 즐거워요.
모네 역시 꽃을 사랑해서 많은 꽃그림을 그렸어요.
책에는 아름다운 모네의 정원 사진도 실려 있어요.
 
"모네의 정원에는 어떻게 갈 수 있죠?"
"우선 파리에 가야 돼."
"파리는 너무 멀잖아요."
"그래, 하지만 갈 수 없는 건 아니야."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갈 준비를 모두 끝내고 8월에 떠났어요.
수련이 8월에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에스메랄다 호텔'에 묵었어요.
호텔은 작고 낡았지만 파리 시내를 흐르는 센 강 근처에 있었어요.
에스메랄다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에 나오는
집시 여인의 이름을 딴 거예요. 

 



 

 

파리에 온 첫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마르모탕 미술관'에 갔어요.
이 미술관에는 모네의 그림이 많아요.
책에 실린 그림을 보는 것과 '진짜'를 보는 것은 전혀 달랐어요.
우리는 하얀 수련 두 송이가 그려진 그림 앞에 서 있었어요.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 보았어요.
그랬더니 수련은 물감 얼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내가 다시 뒤로 물러서자, 수련은 연못에 있는 진짜 수련으로 바뀌었어요.
참으로 신기한 마술이었답니다!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잠시 작은 배가 그려진 그림 앞에 앉아 있었어요.

 "저 배가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요?"

"내일 보러 가자꾸나."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생라자르 역에서 열차를 타고 센 강을 따라 달렸어요.
강변을 지나고, 크고 작은 배들과 선착장, 집들,
강둑에 축 늘어진 수양버들과 높이 솟은 포플러 나무들을 지나갔어요.
우리는 베르농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내렸습니다.
역에는 자전거를 빌려 주는 곳이 있어서
'클로드 모네 기념관'이 있는 지베르니 마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도착했어요!
정원에는 크고 많은 꽃들이 즐비했어요.
할아버지와 나는 경치를 구경해야 할지, 아니면 사진을 찍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졸졸 따라왔어요.
나는 모네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뒷계단에 나와 앉았어요.
나는 집에 보낼 그림 엽서에다 이렇게 썼어요.

 

"우리는 이곳에 앉아서 모네 가족을 흉내내고 있답니다.
정원은 너무너무 멋있어요.
이제 우리는 수련 연못을 보러 갈 거예요."

  



 

 

"할아버지, 저것 좀 보세요! 저기 일본식 다리가 있어요!"
마침내 다리 위에 섰을 때, 나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답니다.

 "연못 저편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다리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째서지?"

"이 다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상'을 얻기 위해서예요. 모네처럼요."

 하지만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쯤, 내 인상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모네는 인상을 붙잡는 '훈련'을 쌓았어요.
모네는 날마다 다리를 주의깊게 관찰해서 그렸는데
똑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었어요.

 




 

나는 여러 각도에서 연못 사진을 찍었어요.
내가 수련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면,
블룸 할아버지는 내가 연못에 빠질까 봐 가슴을 졸였지요.

 




 우리는 모네의 정원으로 흘러드는 뤼 강 어귀에서 도시락을 풀었어요.
오는 길에 사온 염소치즈와 고기파이, 사이다도 좋았고
특히 바게트 빵과 함께 먹으니 더욱 맛이 있었어요.
점심을 먹은 다음, 나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어요.

파리를 떠나는 날, 블룸 할아버지가 여섯 시에 나를 깨웠어요.

 "지금 당장 일어나면, 멋진 걸 한 가지 더 볼 수 있을 게다."

"정말요? 그게 뭔데요?"

"센 강의 해돋이 장면."

"저는 졸리니까 할아버지 혼자 가세요."

 

하지만 나는 결국 할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갔어요.
우리는 첫 햇살을 보며 모네가 그린 해돋이 그림을 떠올렸어요.

 




 

우리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여행이 끝났어도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나는 게시판에 파리 여행에서 가져온 그림 엽서, 입장권과 차표,
비둘기 깃털 한 개와 모네의 정원에서 만난 모네의 의붓 증손 사진을 핀으로 꽂아 놓았어요.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모네의 그림 좋아하세요?
저에게 모네는 그림을 보는 눈과 마음을 열어 준 화가랍니다.
모네의 그림을 통해 다른 그림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제게는 그림 선생님이나 다름없죠.
이 책은 모네의 정원과 관련된 책들을 찾다가 알게 되었어요.
주인공 리네아가 일본식 다리 위에서 기뻐하는 모습의 표지에 단번에 마음이 사로잡혔어요.
언젠가 저 자리에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것도 좋았어요.
그 언젠가가 온다면 저도 리네아처럼 유명한 에펠탑보다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 아를에 있는 고흐의 방에,
슈와젤에 있는 미셸 투르니에의 집을 보러 갈 거예요.

 이 책의 주인공 리네아는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 소녀를 모델로 했어요.
검은색 머리의 동양적인 얼굴만 봐서는 한국에서 파리로 떠나는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블룸 할아버지가 이름도 얼굴도 한국 사람같지 않아서 헷갈리셨을 거예요.
리네아는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레나 안데르손의 실제 딸이라는데
입양한 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걸 보면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아요.

이 책은 단순히 모네의 정원을 다녀오는 여행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모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어요.
페이퍼에 소개하는 글은 정말 극히 일부분의 글들이에요.
그러니 글을 읽을 줄 아는 나이대의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또 모네와 관련된 사진들도 많이 실려 있기 때문에 '작은 모네 안내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랍니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boo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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