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안홍렬

 

금강 근처에 살 때에는 강이 낯설어서

강가에 서기가 두려웠다.

강가에 가면 강의 깊이와 만날 수 있을까

강을 찾아 가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기가 여러 번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강을 생각하면

강은 참으로 보고 싶다

강가에서 멀리 이사를 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얻었다

그러나 강은 아직도 낯설고 두렵다

이제 강을 찾아가도 될 때라면

한 번 용기를 내야 하겠다

두려움은 피할수록 커지는 것

어서 강과 만나 늦은 이유를 말해야 하겠다.

 

                                                                      <아름다운 객지> (대교출판)

 

# 안도현 시인은 충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낯선 시인으로부터 어느 날 시집 한 권을 받고 고마웠단다. 이윤택 시인이 시집 해설에서 극찬하고 있는 인용글 중 일부를 옮기자면...

" ...신동엽의 금강이 서사적 정서를 확보했다면, 안홍렬의 금강은 서사적 정서 자체까지 인간의 존재론으로 수렴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 틀림없다.... 자연으로서의 금강 - 그러나, 금강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자기 인식의 수면이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증이다 - 이 인간 내면의 심증을 흐르는 강이야말로 시를 시이게 하는 상상력의 수면인 것이다...."

#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에서 한 10분쯤 걸어가면 낙동강둑이 나온다. 낙동강의 파수꾼 요산 김정한 선생이 가지는 올곧은 의식은, 부끄럽게도 내게 없고, 다만 비릿하고 찝찔한 홍합을 삶아 파는 리어카와 구수한 번데기 냄새,  초등학생 때 사생대회를 갔던 기억, 철없던 이십대의 치기, 괜한 낭만(이라고 생각했었던)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아주 어릴 적 일이라 난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도 작은 이모는 한 번씩 이야기 한다. 이모가 스무살 때 친구들이랑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저 편으로 가 딸기를 따기로 했는데, 다섯 살짜리 내가 자꾸 따라가려 해서 데려갔다가 업고 다니느라 진땀을 뺐단다. 조그만 게 몸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나.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 안거나 업어보면 돌덩이 같았단다.

지금도 그곳 낙동강둑에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모르겠다.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그곳 둑에 앉아 바라보았던 낙동강은 사실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더럽고 이곳저곳 지저분하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멀리 보면 괜찮다. 뭐든 너무 가까이서 보면 사람을 질리게 한다. 턱을 약간 치켜들고 들숨을 쉬면 강바람이 살랑거리며 코로 스며든다. 강물은 언제나 고요하고 담백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강물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안홍렬 시인은 아마도 강물처럼 소금기 없는 담백한 심성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꼬여있는 듯한 강제성의 은유나 난해한 이미지의 나열 없이 아주 솔직한 자신의 회한을 고백하고 있는 시인이 강물을 닮아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역시 거울을 보며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사물을 통해 나를 보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투르니에는 타인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그렇게 꼼꼼히 들여다보고 메모하고 자신의 사유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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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omi > 한국에 오래 살았다고 느낄 때(외국인)

*You know you've been in Korea too long if: **

1.You don't mind paying more for coffee than dinner.

(커피값이 저녁 값보다 비싸도 이상하지 않을 때)

2.A roll of toilet paper at the dinner table doesn't bother you.

(화장실에서 쓰는 두르마기 휴지가 식탁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때)

3.You like to cut your noodles with scissors

(면을 가위로 잘라 먹을 때)

4.You say " o-rai, o-rai" when your helping your buddy back up his car.

(친구가 차를 뺄때 "오라이, 오라이" 하고 말하고 있을 때)

5.You dont mind playing basketball on dirt.

(바닥이 흙인 코트에서 농구를 하면서 이상하지 않을 때)

6.You hate Japan for no apparent reason.

(일본이 아무 이유없이 싫어질 때)

7.You bow to all of your friends.

(친구들과 고개 숙여 인사하게 될 때)

8.You enjoy bad tasting instant coffee in luxury settings.

(고급스러운 카페에서 맛없는 인스탄트 커피를 마시며 좋아할 때)

9.Whenever you are surprised you say "ai-go"

(나도 모르게 놀라면서 "아이고"라고 말할 때)

10.US. dollars look small in physical size.

(달러 지폐의 크기가 왠지 작아보일 때)

11.You know exactly what kind of dogs are "good".

(어떤 개가 좋은 개인지 구별해 낼 수 있을 때-보신탕 얘기?-)

12.You can pronounce "hyundai" corredtly.

(hyundai를 "현대"라고 발음할 수 있게될 때)

13.You have started snapping your chewinggum in public.

(사람 많은 곳에서 껌을 소리내어 씹으며 아무렇지 않을 때)

14.Someone steps on your toe and apologizes and you say, "No sweat-ee da"

(누가 발을 밟고 사과하면 "No sweat이다"라고 말끝에 ~이다를 붙여 얘기할 때)

15.You favorite exclanation is "Ai-go jook get da"

(말끝마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얘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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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2-14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모습을 새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네요. 음, 이 외에도... 악수하며 굽신거리며 두손으로 손잡을 때, 같은 경우도 들어가겠는데요^^

waho 2004-02-1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에요. 울나라 외국물 쪼끔 먹은 애들 중 (단기 어학 연수 )일부러 웁스...하는거 들음 넘 싫었는데...^ㅡㅡ^
 

아이들과 독서논술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종잡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된다 싶으면 아니고, 아니다 싶으면 의외의 결과물을 해내곤 한다.  이런 내 주관적인 판단의 본질은 판단을 보류할 줄 모르는 성마름이다. 아이는 정작, 조금씩,  보이지 않는 상향, 하향 물결을 타면서 전체적으로는 상향선을 타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이 자신의 잣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실망하고 반색하고 그러는 것이다. 아, 어리석은 어른이여. 아이들은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있다구.

사실 아이들은 상향선만을 지속적으로 타는 게 아니다. 반드시 정체기가 있다. 소위 잠자는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잔물결 하나 없는 수면같은 그 시기의 내부엔 놀랍도록 많은 내면화의 과정이 끓었다 식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언어로 구상할 수 있도록,  멀뚱한 얼굴로 꼼짝 않고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게을러 보이는 시기가 반드시 있다. 다소 정기적으로 오는 아이도 있고 부정기적이지만 한 번 오면 좀 길게 가는 경우도 있다. 이 때가 어른들이 잘 이해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하는 시기일 것이다.

어른들보다 더 바쁘게 하루일정이 꽉 짜인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길가의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꽃 한송이에 사랑스런 눈길 한 번 줄 틈이 제대로 있을까? 하늘에 뽀얀 우윳빛 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변화무쌍한 변신을 턱이라도 괴고 앉아 한동안 지켜볼 여유가 있을까? 아이들이 뭐라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으면 채근하는 게 어른들의 습관이다. 빈둥거리는 시간이 주는 의외의 소득을 무시하고 말이다. 이런 걸 보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고 했나.

글쓰기를 하는 아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보면, 독서나 다른 체험이 부족한 데 비해 글은 그런대로 써내려가는 아이와 독서나 체험이 부족한 편은 아닌데 글로 표현하는 것이 어눌한 아이들이 있다. 물론 두가지를 겸비한 것이 바람직하지만, 굳이 한 쪽 손을 들어주라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전자의 부류는 글 그 자체를 이어나가는 힘이 있는 경우다. 이야기를 늘여가며 자세히 쓰고 어김없이 의외의 참신한 표현이 하나쯤 등장한다. 이런 아이의 글은 얼른 보기엔 잘 썼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글의 중심생각이나 주제가 흐릿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말이 아닌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지는 경우다. 경험이 녹아있지 않아 느낌에 진실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야기꾼다운 면이 보이는 점은 칭찬해 줄 만하다. 

후자의 부류는 투박한 막사발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지만, 단 몇줄에도 자신만이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끄집어낸 의미 있는 생각이 드러난다. 나는 이런 아이들의 글을 사랑한다. 자신의 일상생활 속 체험과 경험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표현도 꾸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늘 없이 맑고 선한 얼굴을 글로도 떠올릴 수 있어 썩 흐뭇하다. 이런 아이들은 사소한 체험이나 감각의 작은 경험까지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 보고 귀 기울여 듣는 아이이다. 

빈둥거리는 그 시간에,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선을 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우주비행기를 만들 꿈에 부풀어 게임 조금만 더 하고 수학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아이이다. 보고 싶은 책을 책장에서 자유롭게 골라 읽고, 최은희 같은 기자도 되어보고 씩씩한 아멜이어 에어하트를 만나고도 오고 빗살무늬가 아니라 빛살무늬라는 것도 알고 선사시대의 다른 그릇들도 더 알고 싶어하는 아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글재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과 독서의 뒷받침으로, 자신의 깊은 곳 어디에서 나오는 글을 쓰면 좋겠다. 이건 아이들에게만 바라는 것이 될 수 없고, 바로 나 자신에게 내리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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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2004-02-1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요즘 제가 자주 오네요. 마이페이퍼에 새 글을 올려놓으셨다는 표시가 있길래 들어와봤다가 읽었습니다. 독서논술 지도를 하시는군요! (자백하자면 저는 돌아오는 3월부터 사개월간 독서논술지도사 과정을 이수하려고 합니다. 물론 자격증을 노리는 것이지요) 이런 종류의 경력이라곤 7-8년전 글짓기 학원에서 1년간 아이들을 가르쳐본 게 전부입니다. 음... 앞으로 님의 서재에 더 자주 놀러와야겠군요. 앞으로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한 선배로서, 좋은 말씀 종종 부탁드립니다.

다연엉가 2004-02-22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바쁘실것 같은데도 열심히 사시는것 같습니다.
저는 아이들 챙기고 집안일 하기도 바쁜데 정말...
부럽기도 하고 제가 부끄럽습니다.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김광규(달팽이의 사랑)

 

# 문득 내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조급해진다. 모종의 기대를 걸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별다른 끌림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어긋나고 말 때, 저들이 나를, 나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집이 내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에 내 영혼이 담겨있을까? 집에 나의 사랑이 묻어있을까?  늙은(?) 나이에 입대한 Y가 제대를 앞둔 말년 휴가 때는 후텁지근한 무더위가 가만 있어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때였다. Y와 나는 살 집을 구하러 다녔는데 결국 지쳐서 10평 연립주택 2층으로 낙찰했다. 그 주택의 이름은 재밌게도 '신혼주택'이다. 대문 옆에 그렇게 문패가 달려있었다. 지하철에서 아주 가깝다는 편리함에 좋은 점수를 주고, 가난한 연인, 우리는 전세 얼마에 월세 얼마를 주기로 하고 그 집을 계약했다.

그래도 방 두 개는 제법 쓸만했다. 그 외의 것은, 동선이 워낙 짧아서 오히려 편리했다고 보면 딱 맞다. 연애시절 유독 방에 대한, 집에 대한 애착을 보이던 Y는 1년 후 29평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3년후 우리집을 마련했다.  좀 오래된 것이지만 야경이 멋진 30평 아파트란 어쩜,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서툰 붓질로 페인트칠을 하다 더 보기 싫게 얼룩진 채로, 금이 간 변기도 그대로 우리는 8년을 살았다.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만 그 집에서 우리는 많은 걸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가치있는 건지는 저울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심히 산 것만은 인정한다.

작년 여름(우리는 항상 여름에 이사를 했다), 두 배의 아파트로 이사와 우리가 점유하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는 존재의 집을 이 공간에 불러들여 나란히 두고 사는 게 아닐까? 그 존재의 집이 사랑이란 이름의 문패를 달고 있는 집이라면 더 없이 좋겠다. 그 집은 언제나 미완성이며 열정으로 가득한 속성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서로가 그 집에 간혹 찾아가 살포시 꽃 한송이 꽂아주고 오면 좋겠다. 

내가 네 존재를, 네가 내 존재를 그대로 마주하여 이따금은 하나 되면 좋겠다. 먼 먼 날로부터 이어져 온 어떤 예감 같은 '또 하나의 나'.   세월이 지난 지금 점차로 밀려 드는 생각은, 그게 내 존재의 또 다른 집이더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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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2004-02-1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존재의 또다른 집... 맞아요,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 지금은 다른 것으로 유명한 시인의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사평역은 실재하는 역이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정서를 아우르는 역이다.

나에게도 사평역은 있다.  20대, 군에 간 남편을 면회하러 속초까지 아주 먼 거리를 달려가곤 했다. 주로 토요일 오후 퇴근후 바로 버스를 이용해 강릉까지 가서 속초로 다시 들어갔다. 강릉에 도착하면 해는 벌써 지고 어두운데 겁도 없이 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속초로 가곤 했다.

기차역은 아니지만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있는 시골 시외버스터미널의 그림은 지금 생각해 보니, 사평역과 흡사하다. 그땐 그리움이 뭔지도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은 선명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다. 그땐 힘든지도 몰랐고 그저 짧은 시간 얼굴 보고 온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수도 없이 내달렸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게 시들할 때 힘이 되는 것이 추억이라면 너무 나약한 심성의 증거일까? 나약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추억은 서로에게 내밀한 힘이 된다. 상대가 그 추억의 한 장을 아직도 들먹이며, 마치 그것이 미운정 고운정 다 든 식구라도 되듯, 애증의 양날개를 모두 감추지 못할 때, 난 작고 하찮은 그것에 잠시 매달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단다.

낯선 길을 구불구불 기어들어가 속초 전방에 있었던 그곳은 설국이었다. 짬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익은 듯했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는 기다란 선에 시선을 고정하면 어딘지 모를 곳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강릉에 다시 나와 막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말이 없다. 시간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오고, 나는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든다. 못 본지 알았는데, 차가 출발하고 나면 고개를 푹 숙였던 내 모습을 그이는 다 보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흐르는 눈물 때문이었을 거라며... , 난데 없이 쑥스럽게 그런 얘기를 꺼낼 때의 Y는 나를 울컥하게 한다. 그 따위 작고 오래된 추억의 한 컷이 우리를 살게하는 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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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야 많지만, 저도 정말이지 이시를 좋아합니다. 정말 시인이란 대단한 존재입니다.

프레이야 2004-02-0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mila님, 반가워요^^

waho 2004-0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구 님의 추억두 좋네요

프레이야 2004-02-0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이 하던 말씀 중에 "다 옛말 하며 살 날이 올 거다", 하는 말이 실감나요.
요즘 왜 자꾸 옛일을 끄집어내며 야곰거리는지, 나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싶네요.^^

2004-03-17 0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