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독서논술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종잡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된다 싶으면 아니고, 아니다 싶으면 의외의 결과물을 해내곤 한다. 이런 내 주관적인 판단의 본질은 판단을 보류할 줄 모르는 성마름이다. 아이는 정작, 조금씩, 보이지 않는 상향, 하향 물결을 타면서 전체적으로는 상향선을 타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이 자신의 잣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실망하고 반색하고 그러는 것이다. 아, 어리석은 어른이여. 아이들은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있다구.
사실 아이들은 상향선만을 지속적으로 타는 게 아니다. 반드시 정체기가 있다. 소위 잠자는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잔물결 하나 없는 수면같은 그 시기의 내부엔 놀랍도록 많은 내면화의 과정이 끓었다 식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언어로 구상할 수 있도록, 멀뚱한 얼굴로 꼼짝 않고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게을러 보이는 시기가 반드시 있다. 다소 정기적으로 오는 아이도 있고 부정기적이지만 한 번 오면 좀 길게 가는 경우도 있다. 이 때가 어른들이 잘 이해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하는 시기일 것이다.
어른들보다 더 바쁘게 하루일정이 꽉 짜인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길가의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꽃 한송이에 사랑스런 눈길 한 번 줄 틈이 제대로 있을까? 하늘에 뽀얀 우윳빛 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변화무쌍한 변신을 턱이라도 괴고 앉아 한동안 지켜볼 여유가 있을까? 아이들이 뭐라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으면 채근하는 게 어른들의 습관이다. 빈둥거리는 시간이 주는 의외의 소득을 무시하고 말이다. 이런 걸 보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고 했나.
글쓰기를 하는 아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보면, 독서나 다른 체험이 부족한 데 비해 글은 그런대로 써내려가는 아이와 독서나 체험이 부족한 편은 아닌데 글로 표현하는 것이 어눌한 아이들이 있다. 물론 두가지를 겸비한 것이 바람직하지만, 굳이 한 쪽 손을 들어주라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전자의 부류는 글 그 자체를 이어나가는 힘이 있는 경우다. 이야기를 늘여가며 자세히 쓰고 어김없이 의외의 참신한 표현이 하나쯤 등장한다. 이런 아이의 글은 얼른 보기엔 잘 썼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글의 중심생각이나 주제가 흐릿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말이 아닌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지는 경우다. 경험이 녹아있지 않아 느낌에 진실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야기꾼다운 면이 보이는 점은 칭찬해 줄 만하다.
후자의 부류는 투박한 막사발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지만, 단 몇줄에도 자신만이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끄집어낸 의미 있는 생각이 드러난다. 나는 이런 아이들의 글을 사랑한다. 자신의 일상생활 속 체험과 경험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표현도 꾸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늘 없이 맑고 선한 얼굴을 글로도 떠올릴 수 있어 썩 흐뭇하다. 이런 아이들은 사소한 체험이나 감각의 작은 경험까지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 보고 귀 기울여 듣는 아이이다.
빈둥거리는 그 시간에,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선을 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우주비행기를 만들 꿈에 부풀어 게임 조금만 더 하고 수학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아이이다. 보고 싶은 책을 책장에서 자유롭게 골라 읽고, 최은희 같은 기자도 되어보고 씩씩한 아멜이어 에어하트를 만나고도 오고 빗살무늬가 아니라 빛살무늬라는 것도 알고 선사시대의 다른 그릇들도 더 알고 싶어하는 아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글재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과 독서의 뒷받침으로, 자신의 깊은 곳 어디에서 나오는 글을 쓰면 좋겠다. 이건 아이들에게만 바라는 것이 될 수 없고, 바로 나 자신에게 내리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