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 지금은 다른 것으로 유명한 시인의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사평역은 실재하는 역이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정서를 아우르는 역이다.

나에게도 사평역은 있다.  20대, 군에 간 남편을 면회하러 속초까지 아주 먼 거리를 달려가곤 했다. 주로 토요일 오후 퇴근후 바로 버스를 이용해 강릉까지 가서 속초로 다시 들어갔다. 강릉에 도착하면 해는 벌써 지고 어두운데 겁도 없이 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속초로 가곤 했다.

기차역은 아니지만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있는 시골 시외버스터미널의 그림은 지금 생각해 보니, 사평역과 흡사하다. 그땐 그리움이 뭔지도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은 선명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다. 그땐 힘든지도 몰랐고 그저 짧은 시간 얼굴 보고 온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수도 없이 내달렸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게 시들할 때 힘이 되는 것이 추억이라면 너무 나약한 심성의 증거일까? 나약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추억은 서로에게 내밀한 힘이 된다. 상대가 그 추억의 한 장을 아직도 들먹이며, 마치 그것이 미운정 고운정 다 든 식구라도 되듯, 애증의 양날개를 모두 감추지 못할 때, 난 작고 하찮은 그것에 잠시 매달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단다.

낯선 길을 구불구불 기어들어가 속초 전방에 있었던 그곳은 설국이었다. 짬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익은 듯했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는 기다란 선에 시선을 고정하면 어딘지 모를 곳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강릉에 다시 나와 막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말이 없다. 시간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오고, 나는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든다. 못 본지 알았는데, 차가 출발하고 나면 고개를 푹 숙였던 내 모습을 그이는 다 보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흐르는 눈물 때문이었을 거라며... , 난데 없이 쑥스럽게 그런 얘기를 꺼낼 때의 Y는 나를 울컥하게 한다. 그 따위 작고 오래된 추억의 한 컷이 우리를 살게하는 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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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야 많지만, 저도 정말이지 이시를 좋아합니다. 정말 시인이란 대단한 존재입니다.

프레이야 2004-02-0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mila님, 반가워요^^

waho 2004-0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구 님의 추억두 좋네요

프레이야 2004-02-0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이 하던 말씀 중에 "다 옛말 하며 살 날이 올 거다", 하는 말이 실감나요.
요즘 왜 자꾸 옛일을 끄집어내며 야곰거리는지, 나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싶네요.^^

2004-03-17 0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