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김광규(달팽이의 사랑)
# 문득 내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조급해진다. 모종의 기대를 걸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별다른 끌림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어긋나고 말 때, 저들이 나를, 나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집이 내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에 내 영혼이 담겨있을까? 집에 나의 사랑이 묻어있을까? 늙은(?) 나이에 입대한 Y가 제대를 앞둔 말년 휴가 때는 후텁지근한 무더위가 가만 있어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때였다. Y와 나는 살 집을 구하러 다녔는데 결국 지쳐서 10평 연립주택 2층으로 낙찰했다. 그 주택의 이름은 재밌게도 '신혼주택'이다. 대문 옆에 그렇게 문패가 달려있었다. 지하철에서 아주 가깝다는 편리함에 좋은 점수를 주고, 가난한 연인, 우리는 전세 얼마에 월세 얼마를 주기로 하고 그 집을 계약했다.
그래도 방 두 개는 제법 쓸만했다. 그 외의 것은, 동선이 워낙 짧아서 오히려 편리했다고 보면 딱 맞다. 연애시절 유독 방에 대한, 집에 대한 애착을 보이던 Y는 1년 후 29평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3년후 우리집을 마련했다. 좀 오래된 것이지만 야경이 멋진 30평 아파트란 어쩜,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서툰 붓질로 페인트칠을 하다 더 보기 싫게 얼룩진 채로, 금이 간 변기도 그대로 우리는 8년을 살았다.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만 그 집에서 우리는 많은 걸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가치있는 건지는 저울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심히 산 것만은 인정한다.
작년 여름(우리는 항상 여름에 이사를 했다), 두 배의 아파트로 이사와 우리가 점유하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는 존재의 집을 이 공간에 불러들여 나란히 두고 사는 게 아닐까? 그 존재의 집이 사랑이란 이름의 문패를 달고 있는 집이라면 더 없이 좋겠다. 그 집은 언제나 미완성이며 열정으로 가득한 속성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서로가 그 집에 간혹 찾아가 살포시 꽃 한송이 꽂아주고 오면 좋겠다.
내가 네 존재를, 네가 내 존재를 그대로 마주하여 이따금은 하나 되면 좋겠다. 먼 먼 날로부터 이어져 온 어떤 예감 같은 '또 하나의 나'. 세월이 지난 지금 점차로 밀려 드는 생각은, 그게 내 존재의 또 다른 집이더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