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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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내내 이명에 시달렸다. 혀가 마르고 까끌하여 모든 음식이 쓰게 느껴졌다. 일어서면 아뜩 어지럽고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어 이것저것 검색하다 음허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무당이긴 해도 내가 나를 아는 측면도 있으니. 보신도 좀 해야겠지만 일단 감정의 평온을 찾는 일이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은 지 좀 되었지만 다시 이 책을 펼쳤다. 나로선 해보지 못한 자연과 어울려사는 삶을 간접적으로 느껴보며 들어보지 못한 개똥지빠귀의 노래소리와 비버의 개구쟁이 몸짓 같은 걸 상상해보았다. 소박하고 정결한 메리 올리버의 문장을 따라가며 잔잔한 호수가에 앉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 앞에서 5년 전에 읽었던 김연수의 소설집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떠올린다.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 이미 유명한 인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시 '기러기Wild Geese'를 김연수는 서문에서 표제시로 인용하여 독자를 위로하고 있었다. 5년 전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진 못했다. 내 안에서 끓던 모종의 감정이 그 당시로는 끝까지 흡입력을 방해했으나, 서문의 인용시만은 무한한 위로와 함께 가슴에 자리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지인에게 메일로 소개한 적도 있다.  나만큼의 감흥이 없었던지 반응은 얻지 못했지만 나로선 상당히 호감가는 시였기에,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의 이름은 몰랐어도 그렇게 인연이 닿아있었던 것 같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상 속에서 여전히 시를 쓰고 있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을 만난 건 행운이다. 그녀의 차분하고 정제된 글과 마주하며 내가 마치 고요한 우주 속에 조용한 사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한,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에머슨의 정신과 호손, 워즈워드에 헌사한 듯한 에세이로는 메리 올리버의 정신적 본류와 문학관을 볼 수 있고, M과의 동반자적 생활에서 건져올린 소소한 일상의 느낌이나 자연과 동물에 대한 거리낌 없는 시선을 드러낸 글에서는 순수하고도 강인한 일면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선 여러 편의 시를 함께 실어 우리에겐 덜 소개되었던 그녀의 시를 맛볼 수 있다. 자연시인, 생태시인으로 불리는 메리 올리버의 시에서는 거미 한 마리의 몸짓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시선을 통해 시인의 우주관이 담겨있다.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메리 올리버는 이 아름다운 우주에, 세상에 내가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 줄 것을 생각한다. 그녀는 아침산책을 하며 '감사'의 말들, 키스의 말들을 떠올리고 떡갈나무처럼 단순하고 헌신적이고 싶어 한다. 생쥐 귀 뒤의 털을 만지며 너무도 부드러워서 손가락이 황홀해지는 사람도 그녀다. '소중히 여기고, 걱정하고, 동정하고, 위안을 얻을 지각력 있는 생물체'가 하나씩 자신을 떠나가며 느끼는 상실감 앞에서는 조만간 구름으로 혹은 먼지로 무심하고 평온하게 흘러갈 그 생물체들을 상상하며 전능한 신의 창조성을 실감한다. "전능의 신들은 떠도는 먼지로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창조했는가!(124p)"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담은 좋은 글귀들이 눈에 띈 '가자미' 연작시 외에도 표제산문 '완벽한 날들'에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날은 어떻게 창조될 수 있는가, 어떻게 표현되고 상상되며 이야기될 수 있는가를 들려준다. 그것은 글쓰기에서의 완벽한 날들과 다르지 않다. 가장 마음에 닿았던 부분이다.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에 대한 에세이에서 메리는 "결국 세상엔 몇 가지 이야기들밖에 없다. 사악함에 대한 이야기, 선에 대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시간에 대한 이야기. 마법은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101p)" 고 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끈기와 예리함을 지닌 독자들을 위해 아주 느린 템포의 공감 속에서 글을 읽게 한 호손의 이야기 방식, 산문성을 호평했다.

 

 

지금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 나의 날씨는 어떤가?

바람이 부는가? 어떤 바람이 찾아오는가? 어디로 부터 어떻게 불어오는가?

 

 

최소량의 날씨를 선호한 메리 올리버는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61p)" 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장엄하거나 거대한 날씨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호수의 표면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낀 어느 여름 아침의 발작적인 행복감에 대해 들려준다. 특별한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순간, 폭풍우나 악천후 속에서 가능한 정신과 우주의 교감과는 차원이 다른 축복에 대해 나직히 들려준다. 

 

 

그런 교감은 푸른 하늘의 축복 아래 햇살 가득한 세상이 평온을 구가하고 바람의 신이 잠들었을 때, 그 조용한 순간에 몰입하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지 않을까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모든 겉모습과 부분성의 베일을 들추고 그 속에 숨겨진 걸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태양의 장미꽃잎들 속에 서서 바람이 벌의 날개 아래서 졸면서 내는 소리보다 크지 않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강력한 가정에(심지어 확실성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온한 날씨도 엄연히 날씨이며 보도할 가치가 있다. (63p)

 

 

 

 

또 한 가지 마음에 와닿은 건 습관에 대한 글인데, 메리 올리버는 숲속의 동식물이 생명유지를 위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습관처럼 하는 삶의 양식을 찬양한다. 좋거나 나쁘거나 습관이 되어버린 것들을 답답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던 생각을 깬다.  균형 잡힌 삶을 사는 데는 습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우리 삶의 양식은 우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평가한다. 우리가 습관과 벌이는 싸움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들을 말해준다(29p)"고 쓴다. 예리하다. 헌신과 유머, 둘 다에 진지한 여우가 되고 싶다는 메리 올리버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 시인인지.

 

 

화려할 수도, 소박할 수도 있지만 정확하고 엄격하고 친숙한 의례가, 습관이 없다면

신앙의 실재에(하다못해 도덕적인 삶에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애매하게 말고)?   - 29p

 

 

 

* 생각과 감정의 균형이 좋은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읽고, '습관'에서 문득 생각나는, 영화 '철의 여인'에서 정계에서 은퇴한 노년의 마거릿이 의사에게 한 말.  "사람들은 생각을 묻기보다 기분을 묻지. 왜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달라구. 나? 나는 생각을 조심하지.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운명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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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4-1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감탄이 절로 나오는 군요 ^^
너무 멋있어요 ~ 글귀도 , 책도 무척 아름다울 것 같구요..
저도 기분을 묻기 보다는 생각을 궁금해 하고 싶어요
그 사람의 생각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되기까지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메리올리버는 정말 멋진 사람이군요 ^^
더불어 프레이야님도 ~ ^^
내면에서 잔잔하게 파문이 이는 듯 .. 하옵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프레이야 2013-04-17 09:24   좋아요 0 | URL
네, 드림님, 이 책이 그랬어요. 내면에서 잔잔하게 이는 파문^^
기분에 좌우되는 일이 많은데, 기분도 생각도 경계해야겠다는 느낌도 드네요.
여긴 오늘 잔뜩 흐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다크아이즈 2013-04-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님, 몸도 안 좋으면서 그단새 이리 좋은 리뷰를 올릴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우리의 알라디너 프레님^^*

좋은 산문 한 권은 좋은 소설 백 권보다 더 깊은 공감을 유도한다는 걸 새삼 느끼는 나날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날들도 꼭 읽어 볼게요.
<습관이 우리를 평가한다> 이 잠언 한 마디로 메리 올리버 승이네요.

프레이야 2013-04-17 09:28   좋아요 0 | URL
팜므님, 과찬이어요^^ 저 힘 내라고 그러시는 거죠^^ 으샤으샤!!
시인들은 산문도 참 잘 쓰는 것 같아요. 글쓰기란 게 경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좀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답니다.^^

페크pek0501 2013-04-1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직막 문단에 쓰신, 대처의 명언을 신문에서 보고 노트에 적어 두었답니다.
제가 느낀 적이 있는 경험을 글로 잘 표현한 것 같아 감탄했지요.
대처가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나의 날씨는 어떤가... 생각과 감정의 균형... 세상에 내가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이런 소중한 물음들을 님 덕분에 안고 갑니다. ^^

프레이야 2013-04-17 09:27   좋아요 0 | URL
대처의 명언, 페크님은 노트에 적어두시기까지 했군요.^^
영화에서도 그래요,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고..
오늘 이곳의 날씨는 잔뜩 흐리고 좀 쌀쌀한데
우리 마음의 날씨는 맑으면 좋겠어요. 마음이란 게 떠다니는 구름 같은 것이긴 하겠지만요.

잘잘라 2013-04-1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장바구니에 담을 수 밖에 없는 이런 리뷰.. 완전 좋아요^^ 「프님께서 이명에 시달리신 덕분에?? 읽게 된 책」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같아서 민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3-04-17 09:30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이명은 좀 잠잠해졌는데, 이놈이 언제 또 불쑥 나타날지.. 고요한 호수이어야하는데^^
이 책 참 좋아요. 천천히 곱씹어 읽어보면 문장 하나 버릴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의 산문이라 더 그럴까요?^^

2013-04-17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8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4-1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콕 찍힙니다~ 요즘의 내게 딱 맞는 말이네요.

경주와 포항의 풍경화 세실님 서재에서 보면서 부러웠어요.
그날 경주나 갈 것을... 요즘 인간관계로 내 발등을 찍고 있거든요.ㅜ

프레이야 2013-04-18 19:19   좋아요 0 | URL
오기 언니, 왜 그래요? 그날 좀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두루 많은 일을 하다보니 일 자체보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도 받게 되실 수 있을 거에요.
그치만 언니는 그런 것들도 잘 해결하고 나아가실 거라고 믿어요. 에너지 팍팍~~~

후애(厚愛) 2013-04-2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는 날씨가 엉망이에요.ㅠㅠ
부산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늘 건강하시고 감기조심하세요.^^
주말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프레이야 2013-04-30 08:36   좋아요 0 | URL
이곳도 오락가락하는 날씨에요.
어젠 봄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개이네요.
서서히 몸도 회복 기운으로 가고 있어요.^^
늘 좋은날 되시기 바래요.

2013-05-02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3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4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5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4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3-05-0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우주에, 세상에 무엇을 선물할까라니 참으로 멋진 사람이네요^^
이 글을 스마트폰으로 읽고는 댓글 다는걸 잊었어요.
이제 이명은 괜찮아지신거죠?

프레이야 2013-05-07 11:18   좋아요 0 | URL
세실님, 메리 올리버, 이런 사람의 곁에 있으면 늘 잔잔한 호수 같은 심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명은 지병 같은 건데, 좀 많이 먹고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애쓰면 좀 나아요.
요즘은 괜춘 ㅎㅎ
컨디션 조절 잘 하자구요^^

2013-05-0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의 기쁨 3 - 인정받지 못한 기쁨들의 밤 인간의 기쁨 3
당나귀 아빠 외 지음 / 인간의기쁨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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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단의 말석에서 에세이를 쓴 지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 주 팜므느와르님과도 얘기한 바 있지만, 처음엔 뭣도 모르고 써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고 싶었고 털어놓고 싶었다. 이해를 바라는 욕구가 발동했을 것이다. 뭘 알기 시작하고부터는 소재나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며 몇 가지 시도도 해보고 문학관 탐방이나 필름미셀러니 등영역을 넓혀보려고 했다. 그런 글에도 자기고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실 시나 소설도 그런 점에선 다르지 않다. 한계를 느꼈다고나 할까. 어느 즈음인가부터 다른 장르를 꿈꾸며 창작문예수필에서는 손을 놓고 있는데 그런 마음의 기저에는 에세이란 가장 어려운 글이 아닌가, 내가 과연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두사람은 그 부분에서 끄덕였다. 그럴 때 '어렵다'는 말은 에세이가 자기고백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전제로 한다. 성철스님의 말씀 '불기자심'처럼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이기란 어려운 법,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진정 정직한 것이다. 서양의 에세이 개념이 아니라 미셀러니 개념의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소위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건 사람보다 관계와 화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우리식 수필이라고 부르자. 에세이는 서양식 중수필이 더 빨리 떠오르니)  어릴 때부터도 다소 불행한 관계맺기의 늪에서 허덕이는 나는 내가 그런 쪽에선 늘 약자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일에 요령부득이고 타협할 줄 모르고 구미에 맞게 살랑댈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성정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들었던 배신감이라든가 혼자 삼킨 아픔, 남몰래 가진 크고 작은 죄의식 같은 것도 내가 그저 감당해야하는 몫이었다. 수필을 쓰면서 그런 관계와 화해를 시도하고 모지라진 나와도 화해하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그렇다고 모두 털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검열이 발동되는 건 당연하고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는 많다. 이제는 삭히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쯤 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자기함몰의 우려가 되는 글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점. 물론 이곳에 글을 쓰면서도 오래도록 행복하다. 글 쓰는 일은 숨을 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에겐.

 

우리는 늘 어떤 고개를 넘어야한다.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없다. 행복 너머의 불행을 넘겨보아야 한다. 불청객이 아니라 당연한 다음 손님이다. 무시로 회의가 들고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마저도 손님이다. 거대한 의미의 행, 불행만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의 연속선 상에 있는 행, 불행. 입김을 달리하는 바람이 시나브로 불고 계절마다 꽃이 피고 뭉게구름 먹구름 내려앉았다가 해도 뜨고 달도 뜨는 그 고개를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넘을 줄 아는 지혜가 나이 들어가며 터득해야하는 덤인 것 같다. 곧이 곧대로가 능사는 아니다. 맑기만 해서는 깊이가 없다. 그늘이 있어야 명창의 소리가 깊어지듯, 그늘을 잘 다스려야 잘 늙어간다고 말할 수 있듯. '나'를 포함한 대상을 비틀어 유머의 소재로 섬길 수 있는 여유, 그걸 해학이라고 부를까. 그런 마음의 여유와 연륜이 필요하다. 단지 쿨한 척하는 걸 말하진 않는다. 쿨함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감추려는 자가 흔히 쓰는 방식이다. 나로선 제대로 쿨하지도 못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포함한 내 레이더에 든 대상을 해학적으로 비틀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가벼우라는 말이 아니다. 내 문체상 가볍게 쓰지도 못한다. 비장(?)하게 한 번 써보자며 재작년 말부터 문제작가특집 코너에 싣고 싶다는 몇 번의 제의도 굳이 떨치고 있다. 세상의 허명을 좋아하는 성정도 아니고 경쟁이 체질에 맞지도 않고 부끄럽기도 해서다. 이래저래 나는 지금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려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고개는 살짝만 들고 오금에 힘을 기르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내려갈 때에 다리엔 더 힘이 들어간다. 숨이 좀 가쁠 수도 있지만 상쾌한 콧바람을 내뿜는 시간이 되길.

 

이런 즈음에 뜻밖에 내게 안겨온 <인간의 기쁨 3>은 정말 기쁨이었다.

 

'평범한 진리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의 두근두근 아릿아릿 에세이 무크'를 내세우며 벌써 3집이 나온 <인간의 기쁨>의 이번 부제는 '인정받지 못한 기쁨들의 밤'이다. '기쁨'이라는 낱말만 봐도 기쁜데 인정받지 못한 기쁨이라니 호기심 이는 부제다. 세상에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었던, 소문 나진 않았지만 쟁쟁한 열서너 명의 글쟁이가 일인 출판사 '인간의기쁨'에서 나온 <인간의 기쁨>에 자리를 바꿔가며 글을 실었다. 3집, 여섯 명의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개성있고 생각거리와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 못지않게 소박한 사진도 보기에 좋다.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과 '생활불량자' 등 우리 주변의 소소하지만 그냥 넘겨선 안 될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에세이가 꼭 문예수필이어야할 필요는 없다는 걸 십년 전에는 몰랐던 아둔함이야 두말 해야 뭣할까.

 

특히 좋았던 글은 정용선 님의 만남, '프리모 레비의 이상한 미덕'이다. 나도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를 돌아보며 그가 극한의 시공간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기성찰과 함께 푼다. 차분하고 진중하게 울림이 있는 글이다. 수필은 자기고백과 더불어 자기성찰이 있어야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쁨>은 여러가지 면에서 신선하다. 수필 계간지가 많이 있지만 이런 상큼한 글들을 실은 에세이 무크는 처음 만났다. '시장논리의 압박으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으니' 오히려 서로 말할 권리를 회복할 수 있게 되도록 만드는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동의한다. 생각한대로 산다는 것은 '말한 대로 산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점에도.

 

<인간의 기쁨>은 오스트리아 화가이자 건축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판화 연작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여섯 가지는 '꿈꿀 권리', '창조할 권리', '두 번째 피부', '창문을 가질 권리', '자연과의 평화협정', '인류애'라고 한다. 믿음이 가고 행보가 기대 되는 에세이 무크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영처 클래식' 코너에서 우리나라 수필가의 작품도 다루면 어떨까 한다. 이번 호에 실린 애드가 앨런 포우의 '가구의 철학 The Philosophy of Furniture'은 처음 읽었다. 미국식 천민물질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포우의 에세이가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나로서도 좋은 발견이다.

 

 

서문에서 김현 님이 인용한 다음 글은 게으른 몽상가의 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뼈가 되는 말이다.

그러나 백 퍼센트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하니, 각자가 사는 별의 토양은 어쩌지 못하나 보다. ^^

 

현재는 약속도 대기실도 아니며 서문도 큰 희망의 발판도 아니다.

이른바 훈련기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실제의 삶이다. 서문은 본문, 희망은 환상이다.

임의적인 것, 잠정적인 것, 덧없는 것, 변덕스러운 것이 삶의 참 내용이다.

지금껏 성취되지 않은 것은 영원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이 사실과 화해해야 한다.

조용히,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가능하다면 절망하지 말고.

                                                                            - 스타니스와프 렘, <우주비행사 피륵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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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2-2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및 덧글을 달지 않을 수 없는 글입니다. 일찍이 프레이야님 글 내공이 상당한 줄 알았지만 이런 격조 있는 글은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는데. 너무 아까워서요.^^*
여독으로 힘들고 피곤했을 텐데 언제 이런 글 갈무리하셨을까요?
누가 에세이류가 쓰기 쉽다고 헛소리 한다면 마구마구 눈을 흘겨주고 싶습니다. 자신에 대해 '까질대로 까져야' 쓸 수 있는 고백적 성찰적 글을 어떻게 함부로 쓸 수 있을까요. 에세이 한 편 쓰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지는 느낌 프레님은 잘 아실거예요. 합법적(!) 구라 치는 소설보다, 비틀기나 낯설기 기법이 통하는 시보다 자기 내면에 정직해야 하는 에세이는 언제나 문학의 정수처럼 제게 다가옵니다.^^* 곱씹으면서 읽게 되는 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2-26 15:17   좋아요 0 | URL
주말에 읽고 그냥 술술 쓴 거에요^^ (과찬이에요, 팜므님^^)
수필 장르에 애정을 갖고 한 길을 걷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에 비하면 고민만 하는 부류지요.
김광균이 그랬던가요. 수필을 써보지 않고는 글을 썼다고 하지 말라던가요.
그래서 그런가봐요.

2013-02-25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2-26 15:20   좋아요 0 | URL
일년에 3번 간행되는 무크인데 저도 처음 봤어요.
상투적이지 않고 신선했어요.
늘 좋은 말씀, 행복을 주시는 말씀 고맙습니다.
님도 좋은하루 내내 이어가세요^^

순오기 2013-02-2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주에서도 말했듯이 에세이의 어려움...제대로 한 편 써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무게는 안다고 말했던 게 부끄럽군요.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 알라딘서재와 소중한 내 이웃들을 사랑합니다!^^

프레이야 2013-02-26 15:21   좋아요 0 | URL
오기 언니는 충분히 자격이 되지요.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시는 분인데요.
그냥 술술 적어보시기 바래요^^

드림모노로그 2013-02-2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의미의 행, 불행만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의 연속선 상에 있는 행, 불행. 입김을 달리하는 바람이 시나브로 불고 계절마다 꽃이 피고 뭉게구름 먹구름 내려앉았다가 해도 뜨고 달도 뜨는 그 고개를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넘을 줄 아는 지혜가 나이 들어가며 터득해야하는 덤인 것 같다.

프레이야님 글에서 빛이 나요 ^^ 가슴으로 쓰는 글이 무엇인지 깊은 울림을 전해주시네요
멋진 글 입니다 ^^

프레이야 2013-02-26 15:22   좋아요 0 | URL
드림님, 이곳은 오늘 잔뜩 흐려요.
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냥 주저앉았어요. 조용히 읽던 책을 더 읽어야겠어요.
매화 분재에 물을 줘야하는데 그걸 깜박 잊었네요. 돌볼 줄 모르는 저는 이래요 ㅎㅎ
오후 시간 즐거이 보내시길요^^

수양 2013-02-2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정말 공감해요. 가장 어렵지만 또 가장 깊은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이 수필인 거 같아요. 결국 인간은 최종적으로 수필을, 혹은 수필적인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늘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 가슴에 새기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3-02-27 09:38   좋아요 0 | URL
수양님의 '생명연습'이요. 전 그 글이 너무 좋더라구요.
수필적인 글, 수필적인 삶을 생각해보게 되어요.
그늘을 잘 다스려야한다는 말은 이정록시인의 어머니 말씀을 빌어쓴 시에 자주 나와요.
나의 그늘도 잘 돌보고 다스려야 하겠다는^^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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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콜롬비아의 비극적 역사를 과장과 허풍의 미학으로 살려낸 걸작. 문학의 기능에 대한 조롱과 찬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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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6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2-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 정말 대단한 작가에요!!! 참!! 21일 청주나 대전에서 만날깝쇼?????
아까 전화로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것참!!!ㅋㅎㅎㅎㅎ
지금 집에 오면서 안 주무시면 전화하려다가 말았어요,,^^;
암튼 어떻게 생각해요???

2013-02-13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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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슬링 와인 한잔 마시는것처첨 기분 좋을 정도의 가벼움과 쿨함, 충만한 나른함을 만끽할 수 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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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2-0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칭 포 슈가맨 O.S.T.
로드리게즈 (Rodriguez)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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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보고 들으면 잊힐 뻔한 한 싱어의 삶이 생의절벽에서 어쩌면 또하나의 기적이란 걸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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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3-02-0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곡들이 전부 들을수록 중독적예요^^은근히요~~

프레이야 2013-02-0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데이지님 ~~ 음색도 어찌나 좋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