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아래 봄에 죽기를

기타모리 고 지음 / 피니스 아프리카에 출판

 

 

 

이 책이 눈에 띈 건 그야말로 내가 즐기는 우연의 선택에 의해서였다(고 말은 하지만 무의식의 요구가 있었겠지).

2주 전 도서관 새 책 코너에서, 나도 모르게 '꽃'과 '봄'과 '죽기를'에 이끌려.

이 소설집에는 여섯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나아가 더 많은 이야기로 모여있다.

저 위의 이미지는 표지가 어째 내가 갖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른데 벚나무 한 그루는 똑 같다.

 

늙은 하이쿠 시인의 죽음을 필두로 갖가지 죽음이 나열되고 그것에 축을 두고 과거를 짚어나가는 젊은 여자(나나오)와

경우의 수를 모두 함께 추리하는 몇몇 사람들이 맥주바의 주인 '구도'라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과

그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음식을 중심으로 모인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잔인한 묘사가 나오지 않고 표지처럼

독특한 애상의 분위기가 낮게 읖조리듯 이어진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기막힌 반전도 예상을 초월하여 나른하고 애잔한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생의 비애와 함께 사람의 온기가 입안 가득 퍼지는 충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마치 난분분 날리는 꽃잎 아래 서있을 때처럼 그렇게.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구도의 손으로 다양하게 소개되는 맛난 음식은 생의 비애를 달래주는데 한몫하는데

그런 작가의 손맛에도 혀에 침이 고인다.

특히 <마지막 거처>의 가지겨자졸임이라든가 <물고기의 교제>의 엔딩, 굴수프는 어떤 맛일까나.

 

중요한 건, 그 모든 추리와 상상과 망상이 한갖 타인의 말(생각)일 뿐이라는 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 모든 말 되어지지 않은 것들과 보여지지 않은 것들의 비애와 진실이 갖는 가치는

어느 잣대로도, 어느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자는 한 세상을 살다 갔고, 산 자는 남아서 또

하나마나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맛난 음식을 먹고 하루치 위안을 받으며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죽으려고 한 곳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듯이. '마지막 거처'가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듯이.

더 중요한 건, 각자의 추리로 뱉는 하나마나한 것 같은 이야기들은 각자 생에게서 받고 싶은 위안과 닮아있고

허무한 삶이지만 사람의 외로움과 숭고함의 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전반에 깔려 있다.

 

골동품과 민속학에 정통한 작가가 쓴 이 책에서 나는 12세기에 와카를 읊었던 가인 사이교 법사와

또 다른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를 알게 되었다.

 

원하건데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    (사이교의 와카에서 제목도 따옴, 62쪽)

 

사이교가 읊은 또다른 시를 찾아봤다.

 

바람에 날려서 정처없이 사라지는 후지산의 연기처럼

내 생각도 정처없이 흩어지는구나

 

 

 

마지막 장 <물고기의 교제>에 나오는 마사오카 시키는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시인, 수필가, 평론가로

전통 하이쿠와 단가를 되살렸다. 나쓰메 소세키의 친우였기도 한 그의 시비가 우에노 공원에 있고 기념관도 있다니.

 

"고모는 왠지 마사오카 시키에게 자신을 이입시켰던 것 같습니다."

"시키요?"

시키가 사실파 하이쿠 작품을 확립한 메이지 시대의 거장이라는 것 정도는 나나오도 알고 있었다.

시키는 결핵성척추염으로 하반신을 잃고 작은 방석 하나를 자신의 세계에 비유해 <병상육척>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그 모습이 사에키 기누에의 세계와 꼭 닮았다.

"이지마 씨, 시키의 <앙와만록>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요, 부끄럽지만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해부터 쓰기 시작한 습작 노트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가 왔는지, 병의 고통에 대해, 그리고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배변의 유무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그림과 창작을

섞어 가면서 의식이 없어지기 직전까지 썼던 기록이죠."      

 

(꽃 아래 봄에 죽기를, 205-206p)

 

 

마사오카 시키의 다른 시를 찾다가 그가 쓴 '사후'라는 글의 일부를 읽게 되었다.

거의 평생을 병석에서 사는 사람의 놀라운 초연함이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그거 농담이야, 뭐 이러는 것처럼.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면 약간은 덧없고 슬프기도 하지만 우스꽝스러워서 미소 짓게 된다고.

 

 

눈 / 마사오카 시키

 

몇 번씩이나

쌓인 눈의 높이를

물어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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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7-17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참 근사하네요. 눈꽃 아래 겨울에 죽기를, 낙엽 아래 가을에 죽기를, 볕 아래 여름에 죽기를. 여러 가지 응용도 가능하네요. 저라면 음, 역시 책 제목처럼 봄에 죽기를 택하겠어요. 가을에 태어났는데 죽기까지 가을에 죽으면 너무 쓸쓸하잖아요. 오롯한 느낌이 드는 추리소설인가봐요. 저도 오롯한 소설 하나 읽었으면 싶네요~ :)

프레이야 2012-07-18 09:20   좋아요 0 | URL
저 책의 제목은 사이교의 시에서 따온 건데요, 책의 첫번째 등장인물 늙은 하이쿠 시인의 죽음과
미스테리하게 엮어놓은 거라 입으로 굴려볼수록 더 애잔해요.^^
수다쟁이님의 응용도 멋진걸요.ㅎㅎ 역시 봄이 나은가요? 전 잘은 모르겠어요.ㅎㅎ
이 소설집 생각보다 훨씬 좋아요. 오롯해요 정말!

라로 2012-07-1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휘모리님이 쓴 글을 읽고 저도 이 책 보관함에 담아뒀는데 역시 프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아까 통화한 것 때문인지 님의 페이퍼를 읽는 마음이 더 진지해 졌어요!!^^
뭐든 확실한 프레이야님,,,제가 배워야 할 덕목!!
저는 안 죽고 싶어요~그래서 언제 죽을지 안 선택할래요~~3=3=3=33333

프레이야 2012-07-18 09:21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 데려오고 나서 휘모리님 페이퍼 봤다지요.
뤼야님은 죽지 마세요. ㅎㅎ 호호할머니 돼도 나랑 놀아요.ㅋㅋ
그러려면 나도 안 죽고 있어야겠네 ㅋㅋ

토트 2012-07-1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이, 참.. 멋지네요.(표현이 이것밖에 안되서 슬퍼요.^^;;)
제목도, 옮겨오신 하이쿠도, 프레이야님 글도 다 멋져요.
저도 지금 보관함에 담았어요.^^

프레이야 2012-07-18 09:23   좋아요 0 | URL
토트님, 이 소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랑 내용도 화법도 달라요. 꽤 서정적이고 뭉클한데
그 방법이 아주 은은해요. 결말에서 탁 치고 들어와요. 히히~ 담아가셨다니 즐독하시길요^^

hnine 2012-07-1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하이쿠'라는 형식이 은근히 매력이 있더라고요.
읽는 순간 대번에 마음에 꽂히거나,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거나.

프레이야 2012-07-18 09:27   좋아요 0 | URL
나인님, 저도 하이쿠가 참 끌리더라구요. ^^
사실 살아가다보면 무언가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긴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부족한 경우에 말이 길어진다고 누군가 한 말이 문득 ㅎㅎ
사둔 '바쇼의 하이쿠 기행' 세 권을 어서 모두 읽어야겠어요.
류시화의 하이쿠 모음집도 좋던데요.
근데 사이교도 그랬고 바쇼도 그랬고 여행과 은둔으로 생을 보낸 게 그저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2012-07-18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7-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른 계절 버전으로 지어봤어요.

"태양 아래 여름에 죽기를"

갑자기 확 더워져요. 하이쿠 책이 막 쏟아질 때 저게 뭐야 했는데 또 다른 세계로 저를 이끄시면 아니되옵니다, 프레이야님ㅎㅎ 저는 책을 안 살거니까요-_-;;

몇 번씩이나
내리쬐는 태양의 온도를
물어보았네.

하이쿠를 써봤어요. ㅋㅋㅋ

프레이야 2012-07-18 21:10   좋아요 0 | URL
아이님 하이쿠 괜찮네요.ㅎㅎ
오늘밤부터 장맛비 고비라고 뉴스 나오네요.
저도 자꾸자꾸 다른 세계로 유혹되어요. 이 작가도 끌리고 저 작가도 끌리고.^^
<바쇼의 하이쿠기행> 사요사요~~ 마구 뽐뿌질!!

nada 2012-07-18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쿠를 읽을 때마다 일본어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작정하지 않고 갔다가, 우연히 마음이 움직여 집어든 책이 좋았을 때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요.
"서정적이고 뭉클하다"고 하시니, 저도 확 마음이 끌립니다.
읽어볼래요! ^------^

프레이야 2012-07-18 21: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했어요. 일본어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에서 끝나지만요.
뜻밖의 선물 오늘도 받았아요. 늘 날마다 받아요. ㅎㅎ
이 책 묘하게 좋았어요.
근데 꽃양배추님, 저는 꽃양배추를 실물로 보진 못했는데요, 꽃처럼 예뻐요.^_______^

얼음장수 2012-07-1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표지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들어맞네요.
인상적인 제목이에요. 사무라이의 결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섬세함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훔치고 싶은 제목입니다. ㅎㅎ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하니, 권여선의 소설이 읽고 싶어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12-07-18 21:27   좋아요 0 | URL
사무라이의 결기와 기모노 입은 여인의 섬세함, 딱 맞는 이미지에요.
저 싯구가 인용된 사건의 배경은 아주 슬프답니다.
일본소설이나 영화는 음식 비중이 큰 것 같아요.
권여선의 소설은 패스했는데 찾아봐야겠어요.^^

댈러웨이 2012-07-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력 2월 보름은 안 추운데,,, 제가 잘 아는데,,, ㅎㅎㅎ 이럼서 제 생일을 슬쩍??? ( ")
제목이 엄청 쎄네요! 표지도 확 끌어당기고요.
하이쿠라는 시가 있다는 건 김연수를 통해서 처음 알았었는데, 엄청 매력 있어요.
그러고보니 프레이야님, 이 책이랑은 상관없는 얘기를 지금 제가 또 하고 있는거죠??? ===33333

프레이야 2012-07-18 21:19   좋아요 0 | URL
히히~ 저는 음력 8월 보름에서 열흘 전.ㅋㅋㅋ
댈러웨이님 거는 절대 안 까먹을 것 같아요.
음력 2월 보름, 날씨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겠지요. 근데,
저 싯구에서 2월 보름 추울 때 어떻게 꽃이 피었을까 궁금하죠? 그게 실마리였어요.

2012-07-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표지도 멋지군요. 이 책.
흠. 내용도 땡기고.. / 근데 그거랑 상관없이 이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죽은 자는 한 세상을 살다 갔고, 산 자는 남아서 또 하나마나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맛난 음식을 먹고 하루치 위안을 받으며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저, 오늘 맥주 한 잘 해야 될 듯!ㅎㅎ

프님.. 근데 숙제는 언제 하시려구.ㅋㅋㅋ

프레이야 2012-07-19 19:20   좋아요 0 | URL
섬님, 하나마나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그 이야기들이 하나마나한 게 아니란 거죠.
그 안에 저마다의 바람이 들었고 저마다의 삶이 녹아있으니까요.
이 책 매력 있어요.
섬님은 맥주 한 잔 하시나요? 전 와인^^

숙제는 마감일에요!!! ㅎㅎ 만날 이래 ㅋㅋ

June* 2012-07-2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저는 프레이야님의 글을 좋아하는걸요.
 모든건 지나갔고 다시금 새로운 것들과 부딪히는 과정에 서 있어요.
 폭력같은 여름만 씩씩하게 보내고나면 나아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아무렴요.
 
 

프레이야 2012-07-22 01:25   좋아요 0 | URL
준님, 여름 잘 보내길 저에게도 님에게도 바래봅니다.
네, 아무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