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불빛을 떠올리며
『침대와 책』 정혜윤 / 2010년 10월 녹음완료
축제가 열리면 밤하늘 광안대교 위로 불꽃이 팡팡 터지는 소리가 집안에서 다 들린다. 바다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물론 좋은 점이 훨씬 많다. 매년 시월이면 부산불꽃축제가 열리는데 수십억의 돈을 허공에 날려 보내는 것 같아 교통마비보다 더 마음이 불편하다. 많은 사람이 즐기며 축제도 어느덧 회를 거듭해 제법 나이를 먹었다. (지금은 바이러스 사태로 2년간 잠정 중지다.)
2003년 처음 불꽃축제가 열리던 날, 작은딸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 가장자리, 바다 쪽으로 걸어 나갔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첫해라 신기하기도 하고 굳이 안 가 볼 이유도 없었다. 야간이라 꽤 쌀쌀했다. 두터운 점퍼를 입고 나가 조금 보다가 심드렁해져선 중간에 되돌아왔다. 그저 겉으로만 화려하게 반복되는 그것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고 아무런 영감도 얻지 못했다. 나는 무얼 바라고 무얼 바라보고 있었을까. 불꽃이 피우는 갖가지 조악한 이미지들 옆으로 무심히 떠 있던 만월이 기억에 더 생생하다. 화려한 불꽃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영화 <해운대>에는 불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미소 머금은 얼굴이 나온다. 일상의 손을 잠시 놓고 각자의 고민과 걱정거리들은 잠시 뒤로 한 채 검은 하늘의 불꽃을 올려다보며 아이 같은 웃음을 날리던 그들은 잠시 후 일어날 불운의 전조를 읽지 못했다.
팡팡 터지는 소리가 멎었다.
축제는 그렇게 끝났나 보다.
갑자기 세상이 그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듯 허무를 남기며 명랑을 가장한 불꽃 소리가 멎자 나는 위대한 개츠비가 날마다 응시했던 '초록색 불빛'에 대한 까마득한 상상, 그러니까 30년도 더 된 그때의 전율을 환기했다. 스무 살에 처음 책으로 상상했던 롱아일랜드 저 너머 어딘가에서 아직도 빛나고 있을 것만 같은 그 불빛을.
50피트 떨어진 곳에 또 한 사람의 모습이 이웃집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서서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개츠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팔을 어두운 바다를 향해 뻗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가 부르르 몸을 떨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조그맣게 반짝이는, 부두의 맨 끝자락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단 하나의 초록색 불빛을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위대한 개츠비> 중
정혜윤은 독서에세이 『침대와 책』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위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쓴다.
사랑하는 여자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구석구석 집 자랑을 하고 영국제 셔츠를 구경시키고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고 자랑하고, 금주법을 악용하고 도박꾼과 결탁한 그 시대 속물의 완성판 개츠비를 그래도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문장에 다 나온다. 홀로 완전한 세계를 가졌던 적이 있다는 점에서. 그 완전한 세계를 위해서 어리석은 방법으로 몸부림을 쳤다는 점에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내세운 셔츠나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한 점 불빛이었다는 점에서. 파멸당함으로써 우리에게 허상이 뭔지 알려줬다는 점에서. (침대와 책 201쪽)
다시 정혜윤은 아래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은 아미 도시 저쪽의 광막한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중
나는 왜 개츠비를 읽는가?
세상의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행복했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려주기 때문에 개츠비를 읽는다. 초록 불빛은 있어도 그 불빛에 이르는 방법을 알 수 없는 날, 개츠비를 읽는다.
모든 순간은 상처를 주고 마지막 순간은 목숨을 앗는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에 개츠비를 읽는다.
(중략)
'나는 전 생애를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나는 이마에 새벽의 샛별을 이고 다니는 자였다.'
이건 미국 인디언들의 문장이다.
나는 이 말을 개츠비에게도 바치고 술에 전 나에게도 바치고 한 점 불빛을 가슴에 품고 있는 탓에 끝없이 불안한 우리 모두에게 바친다. 개츠비는 우리에게 메아리다. (침대와 책 202쪽)
이 책 녹음을 2010년 10월에 마치고 스무 살 적 내겐 초록색 불빛만 보였던 개츠비에게서 우리의 불안한 자화상을 본 정혜윤의 다른 책이 보고 싶어졌다. 역시 편견은 가지고 있어선 안 되는 쓰레기다.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 편견과 선입견이다. CBS라디오 프로듀서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책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정으로 내 미래를 만들어보려고 한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침대와 책』이 2007년 작이니 거의 일 년에 한 권씩 꾸준히 책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개성 있는 독서가다. 읽어보고 싶은 책의 목록과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침대와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이 책은 신선한 조합이 낳은 진심 어린 독서기다.
지금 당신의 침대 옆이나 아래에 놓인 책은 어떤 책인가요?
부산점자도서관에서 녹음한 독서에세이가 한 권 더 있는데, 이유경의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이다. 저자는 소설읽기를 즐기며 알라딘에서 쓰는 닉네임은 다락방이다. 정혜윤과는 다른 통통 튀는 개성이 있어 즐겁게 녹음했다. 저자의 성격과 어조에 맞게 발랄하고 좀 높은 톤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