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도 익숙한 길이 있다. 한 번 지나간 길은 기억의 회로에 내장된다. 그 길로 들어가면 아주 순수한 그림자 하나 만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여섯 해를 오갔던 길로 들어선다. 한낮의 열기가 지하로 기어들고 지상의 물상이 키를 낮추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교문 앞에 서니 오른쪽에 개교 110주년이라는 2017년도 표식이 보인다.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은 초록 인조잔디로 옷을 갈아입었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축구부 꿈나무들이 그 위를 뛰어다닌다.
곧바로 본관으로 향한다.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아이들이 검정 줄무늬 축구복을 입고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다른 학교 축구부 학생들 같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얼떨결에 명랑한 인사를 받고 화답한다. 잘린 나무를 보러 온 마음을 알 리 없겠지.
본관 앞에 다급히 선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삭막하다. 삭둑 잘린 나무 밑동 가장자리에 거무스름한 진액이 채 마르지 않고 고여 있다. 주변에 새까만 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닌다. 희미한 나이테와 가로세로 갈라져 터진 틈으로 모래흙이 성글게 박여 있다.
천천히 둥치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손가락을 쫙 펴 지름을 재어 보니 다섯 뺨 반이다. 백 살 하고도 열두 살을 더 먹은 고목이 살았을 적에는 4층 본관 건물보다도 훨씬 컸다. 마른버짐이 꽃처럼 핀 얼굴들이 내다보던 교실 창문도 쭉쭉 뻗은 가지와 짙푸른 잎으로 가릴 정도였다. 고개를 한껏 들어 나뭇가지와 잎이 사라진 허공을 올려다본다.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네모난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숫자 6을 막 지나는 나이 든 바늘이 숨차 보인다.
오월로 접어든 날 아침, 부고가 날아왔다. 한 그루 히말라야시다가 베였다는 비보였다. 거목의 발목이 꺾여 쿵 넘어지는 광경과 함께 무언가가 내 안에서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의 정체가 궁금했던 계집아이의 생애 첫 학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무 한 그루가 그 시간 그 시절을 데리고 와르르 달려왔다.
“우리 학교, 다행복학교로 지정된 거 아세요?”
춘계방학과는 별개로 봄방학 기간이라며 축구부 선생님이라는 남자가 말을 건다. 나무둥치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어떻게 오셨느냐 물으며 졸업생이냐고 덧붙인다.
“네, 실은 나무를 보러 왔어요. 학교도 와보고 싶었고요.”
“나무 때문에 놀라셨죠? 무슨 일 하는 분이세요? 기자신가요?”
“...... 가지치기를 더 하고 지지대를 해 준다든지 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다소 긴 설명을 듣고 보니, 몇 년 전 태풍으로 크게 한 번 타격을 받았던 터라 안전을 이유로 내린 결정이란 걸 알았다.
히말라야가 고향인 이 아열대성 상록수는 강직하고 푸르른 아름다움을 간직하지만 의외로 잘 부러지고 말라 죽는 수도 많다.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경우가 많듯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듯이. 그래서 히말라야시다는 가지치기를 자주 해주어야 한다. 사람도 자주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야 하듯이.
열일곱 해 후배라는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눈치다. 학교장의 권한이 학부모운영위원회의 결정을 내칠 정도로 크지 않다고 말을 잇는다. 젊은 학부모들이나 학교장이나 모교 출신이 아니니 그 나무의 의미를 되새김하지 않은 것 같다. 정작 그분도 잘린 나무에 대해서는 덤덤해 보이고 그저 다행복학교로 지정된 것에만 불만이 있어 보였다. 방학일수가 많아져 아이들은 좋겠지만 맞벌이 부부는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 아래까지 단추가 바투 채워져 있던 검은 교복 시절의 나, 돌아보면 결코 해맑거나 어리지만은 않았던, 호기심이 잉태한 어둠과 예민함이 생산한 상처가 키운 그 시절, 나는 행복한 아이였던가.
본관으로 들어가니 왼쪽 벽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빼곡하다. 오른쪽 벽에는 학교의 역사자료를 전시해 놓고 그 아래 나무의자를 마주 앉게 배열해 놓았다. 신설학교 비품들과 달리 나뭇결에 밴 쿰쿰한 시간의 냄새에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그 시절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궤적을 들여다본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장으로 치른 제1회 졸업생 애국지사 윤현진의 장례식 사진이 눈에 띈다. 1940년 운동장 조례 광경을 담은 흑백사진 속에 본관 옆 히말라야시다가 일장기와 나란히 건재하다.
전교 행사 때면 키다리 히말라야시다는 내리붓는 햇살에 이마를 찡그리고 줄을 맞춰 서 있던 우리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짙푸른 바늘잎을 당당히 내어 달고 양팔을 벌려 하늘 향해 치솟아 있던 늠름한 그 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하얀 블라우스에 하얀 타이즈, 검정 멜빵 주름치마를 입고 그 나무 앞에서 신입생 환영사를 읽고 재학생 대표로 송별사를 읽던 창백한 여자아이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지금의 생을 그때 알 수 있었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운명의 지도를 품고 결국은 갈 수밖에 없는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운동회 날이면 본부석이 그 나무 앞에 마련되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나면 결승선이 있는 본부석 앞에서 손목에 도장을 받았다. 1, 2, 3등으로 들어온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상이다. 백 미터를 이박삼일로 달렸던 여자아이는 늘 꼴찌였는데 한번은 너무 뒤처져 달리다 뒤이어 달려온 조의 아이들에 섞여 겨우 3등을 했다. 내 손목을 잡아채 도장을 쾅 찍어 주신 선생님은 당연히 3등인 줄 알고 그러셨지만 께름칙했던 느림보는 부상副賞으로 받은 공책을 누가 볼 새라 얼른 가방에 넣었다. 그 공책에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얼떨결에 찍힌 도장은 잘 지워지지 않고 며칠 동안 손목 위에서 나를 놀리듯 헤실거렸다.
성석제 단편소설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에도 초등학교 교정에 히말라야시다가 나온다. 사생대회에서 같은 나무를 그린 남학생과 여학생은 각자의 진실을 침묵하며 각자의 생을 살아와 각자 다른 어른이 되었다. 소녀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에는 소년은 칠하지 않은 회색 붓질이 거북등 같은 회갈색 수피의 음영을 한층 잘 그려냈다. 재능이 모자랐던 소년은 이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닌 그림으로 상을 받고도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평생 자기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아 도약하는 쪽을 택했다. 재능이 뛰어났던 소녀는 번호를 잘못 기재한 자신의 부주의가 낳은 실수를 받아들이고 진실을 굳이 밝히지 않아 자신과 타인의 이면裏面의 생을 그러안았다. 소년의 수치심과 소녀의 우월감에서 나온 결과였다 해도 히말라야시다는 두 사람의 운명을 ‘어떤’ 길로 가게 했다.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알게 해 준 ‘무엇’이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걸어 둥치로 돌아왔다. 제초제를 뿌려 썩히지 말고 그냥 두면 좋겠다. 넉넉한 나무둥치에 누구라도 털썩 앉아 잠시 쉴 수 있도록. 속말로 묘비명을 새겨 본다.
- 여기, 나, 우뚝했었네! 잠시 앉았다 가게.
멀리 맞은편에 튼실한 벚나무 여섯 그루가 일렬횡대로 연초록 그늘을 드리운다. 그 아래로 길게 돌계단이 보인다. 젊은 엄마들이 돌계단에 앉아 축구부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다. 팔순을 넘긴 젊은 엄마도 거북이 뜀박질하던 솜털 보송한 딸을 그 돌계단에 앉아 지켜보셨다. “애가 타면서도 어찌나 우습던지... 호호호...” 초등학교 28년 대선배의 얼굴이 히말라야시다만큼 푸르다.
운동장 저 건너편으로 뜨겁고도 서늘한 해가 서서히 엎드리고 있다.
정겨운 교정 본관 앞
싹둑 잘린 둥치
흙마당은 어디 가고 인조잔디 위에서 연습하는 축구부 소년들
우산 윤현진(1892.9.16. -1921.9.17.)
일본 유학시절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의 핵심인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위원장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9월 17일부터 우산 윤현진 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와 형 윤현태 등 윤 씨 일가의 행적, 양산의 유력자들을 기린 전시가 양산시립박물관에서 특별히 열리고 있다. 12월 12일까지니 아직 날짜 여유가 있다. 인물도 준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