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닌 곳도 많고 다닐 때마다 아무튼 책이 동행했는데 이건 알라디너면 모두 공통점일 듯.
일단 간단히 세 권만 소개합니다.^^
1.
올해 설날 연휴가 끝난 월요일에 작은딸과 옆지기랑 셋이서 제주도로 날아가 협재포구 쪽 마을에서 하루 묵고 비양도로 갔다. 제주에 내린 날은 비바람이 좀 불어 다음날 배가 뜰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사실 걱정은 아니었다. 비가 오면 길을 바꾸면 되니까)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날이 너무 좋은 거다. 화창한 하늘 아래 배를 타고 비양도에 내려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해안을 한 바뀌 돌았다. 바다도 좋았지만 동백꽃이 어찌 이쁜지...
그다음날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림읍 독립책방 <소리소문>을 찾아갔다. <아무튼, 뜨개>는 낡은 한옥을 개조해 꾸민 소담한 이곳 책방에서 작은딸이 고른 책 중 하나. 마당은 검은고양이 한 마리가 사수하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대면 모델처럼 또 포즈까지 잡아주고. 손에 쥐기도 좋은 이 책은 뜨개질 명수 울엄마와 큰딸을 떠올려줘서 애정이 간다. 제주에서 서울로 바로 올라간 딸은 며칠 후 이 책 의외로 좋은 구절이 많고 번역일을 시작하려는 언니한테도 보여주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이 책의 저자는 번역가로 일하는 분인데 번역일에 관한 구절이 의미있게 다가와 그 문장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열정 많은 작은딸은 소품으로 요거조거 머리 식힐 때 뜨개를 하는데 내 걸로 손가방도 하나 완성해 뒀다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집에 가보니 휴지곽, 컵받침 등등 떠 놓았더라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건, 일의 시작과 끝을 내가 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팀에서 일이 넘어와야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다른 팀이 넘겨받아야 비로소 일이 끝났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대체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어었다. 봐야 하는 부분만 보고 넘기면 그게 나중에 무엇이 될지는 알 바 아니었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 가볍기는 했지만 부품으로 전락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 자꾸 생각났다. 그에 비해 번역은 실체가 뚜렷한 일이다. 출판사가 어떤 기획 의도를 갖고 이 책을 출간하려 하는가,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옮겨야 하는가를 알고 시작한다. 내 속도대로라면 언제쯤 완역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나온다. 잘했든 못했든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내 이름 석 자가 온전히 진다. -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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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젊은 날의 어머니는 삼 남매의 옷을 손뜨개질해 입히곤 했다. 눈대중으로 품을 어림해 대바늘로 코를 잡고 시작해 주시면 코를 줄이거나 늘이지 않아도 되는 등판과 앞판은 내 몫이었다. 소매와 목둘레, 겨드랑이 부분은 손바느질한 것 같이 정교한 어머니 솜씨로 완성되었다. 길어도 사흘이면 충분했다.
알뜰한 어머니는 털실을 몇 번이고 풀어서 되감아 썼다. 새 털실은 거의 사지 않았다. 작아져서 못 입게 된 뜨개옷은 합동작업으로 실을 풀었다. 내가 한 손으로 옷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실끝을 잡아당기며 살살 풀면 좀 떨어져 마주 앉은 어머니는 양팔을 벌리고 양손을 실패 삼아 엄지손가락을 세워 실을 걸었다. 그 자세로 크게 에스 자를 그리며 감아나갔다. 우리는 죽이 척척 맞았다. 솔솔 풀려나가 주전자에 끓인 물의 수증기를 쐬고 새로운 한 뭉치가 되던 개나리색, 청보리색 털실이 참말로 고왔다. 라면 가락처럼 한 코 한 코 풀려나가는 실을 다 감고 나면 새 옷이 탄생한다는 기대감에 손끝은 날 듯이 움직였다. 우리는 두 개의 스웨터를 동시에 풀어 감으며 양색兩色 털실뭉치를 만드는 신공神工도 발휘했다. 털실이 부활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하룻밤 동안 스웨터 한 벌이 나오는 날이 잦았다.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대바늘을 부지런히 놀리며 꼼짝 않고 앉아 불면의 밤을 달랬을 그 앙가슴이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생업에만 바빴던 어머니는 유폐된 예술가적 기질을 그런 작업으로나마 풀어내어 변신의 보람과 통쾌함을 맛보셨던 게 아닐까.
(중략)
뜨개실을 풀어 새로 감듯 안과 밖을 되감는 중이다. 바람 좋은 창가에 말라가는 내 안의 꽃을 매단다. 그런대로 괜찮은 풍경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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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모 계간지에 '변신'이라는 제목으로 보내었던 글 중 일부. 꽃이 마른꽃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털실이 변해가는 과정을 두 개의 줄기로 했는데 엄마의 뜨개 부분만 발췌.
남들은 엄마, 하면 손맛 나는 집밥 뭐 그런 게 일순위로 떠오를 텐데 나는 뜨개가 제일 먼저다. 사실 울엄마는 부엌에서 음식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손맛도 없는 편이라.^^ 예전에 이 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엄마라고 모두 음식 잘하고 뭐 그래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재능이 다 다르니 이해해 드려야지. 하기 싫은 주방일을 수십 년 하며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을까. 지금이야 두 분이서 속닥속닥 밥 지어 드시지만 뭐. 뜨개도 언젠가부터 눈이 아프니 안 하시고 서화에는 50세 이후 30년, 아직 열심이다. 올봄에 자꾸 뭘 잊어버린다며 혹시나싶어 치매검사를 받으러 모시고 갔더니 같은 연령대 수치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게 나와 엄마도 나도 안심했다. 3년 만 더 하면 원로작가로 들어간다고, 그때 그 센터를 나오면서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 서예작품 하나 내러 가시고 이제 두 해만 더 내면 된다. 그때까지 건강히 잘 해내시길...
2.
펀 오브 잇
이 책의 번역자가 조금 지인의 딸이다. 자랑삼아 공개해 알게 되었다. 딸이 번역을 했다하니 울큰딸 때문에 급 관심이 생겨 좀 자세히 물어보고 책도 구매했다. 전문 번역자로 나선 건 아니지만 영어뮤지컬 쪽으로도 관심이 있어 대학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처음 번역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아멜리아 에어하트를 어릴 때부터 좋아해 번역한 이 자서전은 어릴 때 영어로 읽었다고 한다. 번역본이 없는 걸 알고 처음 완역하게 되었다고... 훌륭하다.
옮긴이 후기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은 안전한 미래와 안락한 삶을 위해 진정으로 원하는 일과 열정을 마음 한켠에 숨겨 두기도 한다.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즐거움이 향하는 곳으로 다가갔고 즐거움을 원동력으로 많은 비행에 성공한다......이끌리지 않는 일은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줄 아는 그녀의 결단력 역시 빛을 발한다.....
100세 시대에는 그 어떤 것을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이다.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말한 바 있듯 실패는 누군가에게 또는 자신에게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
온다 씨의 강원도
부제는
'막연하지 않은 강원살이'
올해 1월 옆지기와 속초로 달렸다. 눈발이 조금 흩날리고 기분좋게 추운 정도였다. 숙소를 속초로 두고 속초를 지나 고성 아야진리까지 올라갔다. 그곳은 바로바로 옆지기가 늦된 군인으로 2년 4개월을 복무한 곳. 다시는 그쪽으로 오줌도 안 눌 거라더니 이제는 가끔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해거름에 당도한 아야진리, 그 부대 앞에 당도하니 내가 그 옛날 파릇파릇 24살 때 면회 갔었던 그 풍경이 선연히 떠올랐다. 별로 많이 변하지 않았더라. 돌아 나와서 거진항에 들렀다. 사방이 컴컴한데 작은 불빛들이 명멸하고 조그만 찻집에 이십 대로 보이는 예쁜 여자가 친절하게 차 주문을 받았다. 다음날 햇살 좋은 날, 아바이마을로 해서 바닷가, 갯배를 타고 건너 간 속초중앙시장, 영랑호 등등.. 그 중 칠성조선소 마당 한켠에 있는 칠성북살롱에서 내게 온 저 책은 강원도를 좋아하는 내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었지.
목차를 보면 크게 세 곳, 양양, 속초, 고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장에서 강원도에 터를 잡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새 삶을 이룬 사람들을 소개한다. 지역 별로 그곳 사진과 좋은 곳 안내가 곁들여 있고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따뜻하고 의미있다. 인터뷰를 하여 대화체로 된 문장도 친근하게 읽힌다. 강원살이를 꿈꾸는 사람에게 도움될 책이다. 나는 강원살이까지 꿈꾸진 않지만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책. 혹시 모르지 그렇게 될 수도.^^
칠성북살롱 안에서, 창가에 앉은 뜨개인형 넘나 이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