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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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개김창룡이 암살당한다. 김해진은 김창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 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 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나 할까.”

 

암살범은 특무대 대령 허태영의 부하인 송용고와 신초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왜 김창룡을 암살해야만 했을까.

 

김창룡은 일제 강점기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으며, 중지 방면의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뒤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관 사건,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김도영 대령 사건, 삼각산 사건 등 20여 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뒤켠에선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 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허태영은 법정에서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초식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하였다.

 

이승만은 35일 대통령 후보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노총은 우마차 800대를 이끌고 이승만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우의마의시위. 시위에는 학생들, 다방마담, 창녀들까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승만은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출마를 원하면 글로 써서 보내달라고 호소한다. 이에 수많은 혈서들이 난립한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조선조 왕들이 툭하면 해대는 쇼였거늘, 이승만은 자신을 왕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328, 민주당은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53,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고 평화통일을 외치는 조봉암을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지방에선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가버린다라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 백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지방에 사는 서민들에게 그저 공허한 협박으로만 들렸을까.

 

신익희는 55일 새벽 5시경, 장면과 함께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한다. 장면의 경호책임자인 시라소니 일행이 신익희를 호남병원으로 옮겼지만 신익희는 사망한다.

 

5. 15 선거 개표결과 이승만이 총 유효표의 52%5046437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조봉암은 2163808표를 얻는다.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표가 25천 표가 나왔는데 조봉암 표는 34표에 그쳤다. 강원도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가 조봉암에게 투표했지만 투표 결과는 거꾸로 뒤집혀졌다. 엄청난 개표 조작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8.8 지방선거를 앞두고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한다. 김종원은 여순, 거창사건에서 익히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조봉암은 유세를 통해 피해대중론평화통일론을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분석을 강조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었음에도 북진통일론을 주장한 이승만은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민주당 역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거부하고 신익희가 죽자 오히려 이승만을 지지한다.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대통령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의 온갖 패악질에도 이승만을 지지한다. 함석헌은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멈추지 않았다. <함석헌 평전>을 쓴 김성수는 이렇게 말했다.

 

월남하여 전쟁을 겪는 동안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의 횡포를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었고, 자유당을 등에 업은 기독교인들의 오만 역시 거듭 체험한 바 있었다. 이를테면 자유당 간부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미군 구호품을 분배해 주는 것 따위가 그랬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선거 때마다 그래왔듯 개신교는 장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 권사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추대한다.

 

88일로 예정된 제 2대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권이 바빠졌다. 점차 선거일이 다가오자 치안국장 김종원은 새로운 수법의 여당 탄압을 선보였다. 온갖 경범죄 죄를 동원해 야당 후보 등록을 가로막은 것. 당시에는 경범죄로 11~25일간 구류처분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었다.

 

야밤에 집 앞에다가 쓰레기를 버려놓고 새벽같이 찾아와서는 청소 불결이라는 죄목으로 구류처분하지 않나, 밤 사이에 단단히 붙여놓은 문떼를 떼어보리고는 문패가 없으니 구류처분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형사들이 술을 사달라고 졸라서 술을 사주었더니 밤 12시가 되도록 나가지를 못하게 해놓고 12시가 지나 집으로 가려고 한즉 틍금위반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심지어 괴한들이 몰려와 입후보 서류를 탈취해가는 일도 있었다. 입후보 사퇴 공작까지 가세해 지방 선거에서 사퇴한 후보는 3800여명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전북 정읍 소성지서에서 근무하던 순경 박재표는 소성면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경찰관들의 선거 부정을 <동아일보>를 찾아가 폭로하였다. 경찰은 박재표에게 현상금 30만환에 일 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박재표는 체포되어 10개월 간 옥살이를 하는 등, 숱한 수난과 고초를 당한다. 과연 전북 정읍에서만 개표 부정이 있었을까.

 

928, 민주당 제 2차 전당대회에서 장면이 저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면을 쏜 김상붕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쳤다. 사건 후, 김상붕의 형 김상봉이 배후를 <경향신문>에 제보했다. 배후는 자유당 비밀당원 최훈이었다. 4.19 이후 밝혀진 바로는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이 사건의 배후였다. 4. 19 혁명 후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짜장면은 1905년 인천시 중구 북성동 소재 공화춘에서 최초로 판매되었지만, 56년 이후로 대중화된다.

 

입도선매로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이농을 하게 된다. 이농한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관 22살의 나이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가 있었으니 이어령이었다.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에서 김동리를 미몽의 우상’,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한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 이무영을 우매의 우상’, 최일수를 영아의 우상으로,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를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모방한 듯한 좌수우수론을 제시하였다.

 

밥을 먹는데 왼손으로 먹으면 어떻고, 오른손으로 먹으면 어떠한가? 숟가락으로 먹으면 어떻고, 젓가락으로 먹으면 어떤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혁명을 하는데 꼭 소련식이어야만 하겠고, 꼭 중국식이어야만 하겠는가?”

 

616, 한국 최초의 tv 방송이 시작되었다. HLKZ TV 방송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7번째,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TV 방송을 실시한 나라가 되었다. 9월에는 <사형수>는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수상기는 300여대. 경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황태영 사장은 이듬해에 HLKZ-TV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에게 양도한다. 장기영은 방송국을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지만, DBC5922일 화재로 사라지고 만다. AFKN TV50년 이후 라디오 방송으로 출범, 5795일부터 TV 방송을 시작한다.

 

56년 영화가 최대의 화제작은 15만 명을 동원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남긴 유행어는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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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 2016-07-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이어령의 저 평론을 참여문학의 신호탄으로 봅니다. 실천적 참여가 아닌 창작을 통한 참여를 강조해 순수문학을 옹호한다고 비판받아 나중에 김수영과 논쟁하기도 했지만..

시이소오 2016-07-26 15:0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50년대, 60년대의 이어령은 본받을만 하네요. 특히나 남정현의 <분지> 사건때였나요?
지식인의 표상, 이라 할만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파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광신적인 탄압은 항일투쟁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노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에 말씀하신 북한에서의 친일청산 때문에 더욱 광기어린 것 같네요. 1950년대에 이미 현재의 문제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시이소오님 좋은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6 17:22   좋아요 2 | URL
기득권 세력이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명분일 뿐이었던것 같아요. 거기에 세뇌된 국민들의 반공의식이 더 끔찍해 보이기도하네요.

매번 격려에 격하게 감사 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어렸을 때 반공 포스터 및 표어 작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방학에는「붉은 청년 근위대」등을 읽고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거대한 병영사회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저녁 되세요^^

시이소오 2016-07-26 17:28   좋아요 1 | URL
ㅋ 저희 어릴때 반공 포스터, 표어 정말 많이 그렸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