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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53년을 맞아, 절량농가의 규모가 더 확대된다.
“절량농가는 이른바 입도선매에 내몰려 고통이 가중되었다. 당시의 입도선매란 농사를 짓기도 전에 미리 돈이나 곡식을 얻어다 쓰고 나중에 수확한 걸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는 비극적인 게임이었다. 정부는 입도선매 행위가 농민을 더욱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다는 판단에서 이를 강력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입도선매는 성행하였고, 결국 입도선매를 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촌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
이 ‘입도선매’는 오늘날 신용카드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카드론’ 혹은 ‘카드 돌려막기’
인플래이션은 52년에 절정에 달해 정부는 대응책으로 2월 15일 오전 6시를 기해 통화개혁을 실시한다. 원 단위 화폐 유통을 중지시키고 환 단위의 새 화폐로 교체한다. 100대 1로 평가절화되어 구화 100원에 신화 1환의 비율로 교환되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국민들은 현금을 쥐고 있기 보다는 앞다투어 물건을 사들였다. 물건 값은 하루에 4배에서 15배까지 폭등했다.
1월 20일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하고, 3월 5일 소련에선 스탈린이 사망한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국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다. 한국에 핵무기를 사용할만한 전략적 목표물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사용을 포기한다. 그러나, 5월 13일부터 평양의 독산댐을 시작으로, 미국은 북한의 모든 댐을 폭격한다. 댐 파괴는 미국 선교사들의 아이디어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렇게 말했다.
“원자탄은 삼갔지만, 미국은 또 다른 신무기인 네이팜탄을 공중에서 쏟아부어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북한의 계곡들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댐들을 파괴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가장 악랄한 측면으로, 이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자체가 곤혹스럽다. 바로 이 때문에 200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강준만은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고, 트루먼 정부나 아이젠하워 정부는 쳬결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너무 순진한 해석이 아닐까?
당시 국민들은 휴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국민들에게 휴전 찬성의 자유는 없었다. 휴전에 찬성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 당할 수 있는 시기였다.
휴전 협정이 서명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던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버린다. 이승만의 방해질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소련은 휴전을 원했다.
7월 12일 이승만의 바람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다. 미국은 원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에 조병옥이 비난하자 이승만은 조병옥을 대통령 암살 음모 사건과 연계하여 육군형무소에 수감한다. 조병옥도 이승만 못지않게 극우 인사였거늘 이승만은 자신에게 대드는 자면 누구건 간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 갔다.
빨갱이 잡는 사상 검사 선우종원도 장면 비서실장을 지낸 것이 죄가 되어 빨갱이로 몰렸다.
7월 27일 정전 협졍이 조인된다.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는 한국 전쟁의 총 사망자 수는 300만 이상이 거의 확실하며 400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총 인구 3천만이었던 나라에서 10분의 1이 사망한 것이다.
미군은 매일 500대에서 1천 500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개전 후 1953년 4월까지 26만발의 대, 중형 폭탄, 2억 여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사용하였다.
미 공군 폭격에 의해 북한은 모든 게 파괴되었다. 남은 것은 바위와 돌뿐. 초가집 한 채도 남지 않았다. 존 할리데이는 한국전쟁을 “반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반한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미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반전, 평화주의자 램지 클라크는 한국 전쟁의 본질이 ‘인종말살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월한 백인 병사들이 열등한 유색인종 전체를 작전, 전투 대상으로 설정하고, 남과 북,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살육했던 거죠. 그들의 목적은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질 정치, 경제적 이익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 초강대 군사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전쟁동안 미군은 150만 명에서 3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연간 군사 예산은 50년 150억 달러에서 53년에는 500억 달러로 팽창하였다. 국무장관 애치슨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전쟁이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미국을 살려주었다” 맥아더 역시 “한국이 우리를 구원해주었다.”고 말했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는 경제 부흥의 기회를 맞았다. 가장 큰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로 평가하였다. 일본은행 총재 이찌마다 히사또는 “우리 재계는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은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했다. 수백만 장의 빨치산 토벌 투항 권유 전단까지 일본에서 인쇄했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특수 수입은 24억 달러에 이르렀다. 50년 경제성장률은 10.9%, 51년에는 13%를 기록했다. 51년 외화보유고는 9억 4천만 달러에 이르러 미국이 대일 원조를 종료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 국민은 경제제일주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55년 자민당이 결성되고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일본사회는 우경화된다. 일본은 전범국가로서 응징을 받아야 했지만, 한국전쟁은 일본에게 축복이었다. 단지 일본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한국전쟁 때 ‘골로 간다’는 말이 생겼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학살할 때는 주로 산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총살 또는 생매장을 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램지 클라크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을 불린다. 그는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한홍구는 말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왜 미국의 민간인 학살이 주목받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한국전쟁 때 죄 없는 민간인을 조직적, 의도적으로 살육한 그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계 양심세력들의 힘으로 ‘잊혀진 전쟁’을 ‘기억해야 할 전쟁’으로 되살릴 때입니다.”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 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 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다.”
2002년 7월 4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geonocide.or.kr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에서 ’2002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 유족 증언 대회‘를 열었다.
범국민위원회가 펴낸 <2002년 민간인 학살 총서>에서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이자 성공회대 교수인 김동춘은 “한국의 국가는 피학살자들을 세 번 죽인 셈이 된다.”고 말했다. 전쟁을 전후해 저질러진 학살이 첫 번째라면, 1960년대 당시 진상균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였고,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해 1980년까지 연좌제로 묶어 탄압한 것이 세 번째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들춰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 행동으로 탄압받아 왔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는 ‘생존’을 위해 침묵했으며, 좌익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계속 여당만을 지지해왔고, 그들 자식들은 오히려 ‘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하여 생존자와 유족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봉건시대 천형이 이와 같았을까?”
2003년 5월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쟁취 투쟁본부’는 한국전쟁 때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굿’을 국회 앞에서 열었다. 투쟁 본부에 따르면, 전주, 강화, 거창, 고양, 구미, 나주, 단양, 문경, 사천, 산청, 순천, 여수, 연동, 제주, 진도, 포항, 함평 등에서 집단학살 증언이 이어졌으며 한국전쟁을 앞뒤로 학살당한 민간인 숫자가 1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2004년 3월 국회는 ‘한국전쟁 휴전 이전 학살 진상규명에 관한 통합 특별법안’을 부결시켰다.
8월 5일부터 포로 송환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측은 송환을 희망한 공산군 포로 7만 5천 823명을 돌려보냈고, 공산군 측은 1만 2천 773명을 돌려보냈다. 전쟁 포로 88명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했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은 당시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발표될 수 없는 소설이었으나, 4.19 덕분에 가능했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맑은 햇빛 아래 뭇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산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많은 국군 포로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전쟁으로 득을 본 사람들은 누굴까. 한반도에선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이승만은 남한에서 ‘반공주의’를 더욱 확고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할 수 있었고, 김일성은 ‘김일성 유일 제체’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
여전히 강준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미군은 원치 않았는데, 이승만이 요구한 걸로 기술한다. 세계사를 비춰보았을 때,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런 전쟁통에 극장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나이아가라>,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다방도 늘어났다. 명동이 번성해지자 이후 충무로에 다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친미’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숭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숭미주의의 선봉엔 이승만이 이었다. 미제 물건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강냉이 가루, 우유 가루에 환장했다. 교회에 가면 맛볼 수 있었다. 미국 밀가루를 얻기 위해 교회에 가는 ‘밀가루 신자’들이 속출했다. 기독교는 또한 반공의 보증수표였다. 남한 교회들은 북한을 ‘사탄’, ‘마귀’, ‘악마’로 표현했다. 북한 교회들은 미군을 ‘악마’로 표현했다. 반공은 친미였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뜻했다.
일본의 비교문화 정신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일본의 패전 후 일본인에게는 ‘바꿔치기’에 의한 물질주의가 범람했다고 말한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통해 기존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낳았다. 사람들은 주로 파벌을 짓기 시작한다. 전쟁 직후, 혈연, 지연, 학연으로 구성된 조직들이 급속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전쟁 후, 사람들은 달라졌다. 석달 동안 피난을 마치고 돌아온 권정생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믿고 얘기를 나눌 이웃이 없어진 것이다. 형제끼리도 사촌끼리도 사돈간에도 입을 다물고 지냈다. 마을 남자들 중엔 모병으로 국군이 되기도 하고 인민군 의용군으로도 갔다. 토벌대로 가기도 하고 공비가 되기도 했다. 그 어느 쪽도 본인 의사와는 다르게 서로가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는 여자들과 아이들한테도 미치게 되었고 가치관의 혼란은 그 당시 우리들의 정신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흰색도 검다고 가르치면 그냥 검은색으로 따라 배워야 했고 고양이가 개로 둔갑하는 세상이었다. ”
극단주의 문화는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를 창출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피난민은 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에게 ‘빨갱이 색출’심사를 받아야 했다. 월남인에게 ‘반공’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편 월북자 가족들 역시 연좌제를 넘어 국가권력의 일상적 감시와 시달림 마저 받아야 했다.
53년의 3대 히트 가요는 <굿세어라 금순아>, <꿈에 본 내 고향>,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