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경보기 - 절실하게, 진지하게, 통쾌하게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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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 벤야민, <일방통행로>

 

강신주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이 난무하는 시대, 사이비가 판치는 시대에 철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신독재의 망령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친일파들을 그때 살려두었기 때문일까. 프랑스는 나치협력자 200만 명을 심판했다. 한국의 나치들을 어이할까.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은 필요하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

 

우리에게 적이란 누구일까? 친일파의 후예이며 친미파로 갈아타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한 독재정권의 잔당인 새누리당과 보수세력, 재벌들이다.

 

자화자는 말했다. ‘온전한 삶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이 둘째이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핍박받는 삶이 제일 못하다.’

 

다수의 99%가 소수의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언제까지 자발적 복종으로 착취당하며 살아야할까. 새누리당은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 한국이 세계 11연패를 달성했으니. 11년 연속 자살율 1! 삶의 척박함을 사회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전가시킨 탓이다. (세계 11연패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쓰레기 학자들과 언론인, 방송인들이 동원되었다. 이들 지식인들은 한 사람이 자살할 때마다 기뻐해도 좋으리라. 한 사람이 자살할 때마다 이들에게 공로상을 줘야하지 않을까.)

 

규제를 완화하는 게 자유인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사이의 칸막이를 없앴다. 초식동물의 자유란 이제 사냥감이 될 자유뿐이다. 진주의료원은 폐쇄되었다.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터 공공의료기관이 이윤을 남겨야 했지? 우리는 도로교통법이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막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이나 되는 일인가? 프랑스인들은 시위가 벌어지는 날이면 차를 집에 두고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국에서처럼 시위대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차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시위대 때문에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시위대 욕하는 후배가 있었다. 절교했다.

 

아직도 색깔론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나? B.R 마이어스는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라는 책을 썼다. 전 국민의 새누리당 화, 그게 빨갱이다. 새누리당 색깔도 이제 빨갛지 않은가.

 

돼지같은 자본주의시대에 민주주의로 가는 일방통행로 같은 건 없다. 곳곳에 자본가들의 졸개들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 그렇다면 돌아가면, 즉 우회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막으면? 골목길로, 혹은 개구멍으로도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어느때보다도 지식인 혹은 학자들의 파르헤지아가 필요한 시대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 말이다. 우리 선배들은 단지 그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아니,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유신 독재 시대가 아니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 기득권의 비위에 맞춰 거짓말만 늘어놓는 걸까.

 

학계에서 강신주를 비판한다고? 자본가들 앞에서 꼬리나 흔드는 것들이?

양두구육, 지록위마의 시대에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오늘 518일이다. 아직도 5.18을 간첩이 일으킨 거라 말하는 정신 나간 것들이 있다. (이제는 고소당할테니 입조심 해라.) 정권이 바뀌는 대로 5. 18 관련자들 전부 색출해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김대중은 자신이 뭐라고 전두환을 용서한다고 풀어준 걸까. 수백만의 시민들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5, 18 학살 세력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 곤봉으로 얻어맞아 뇌수가 터져나가야 정신을 차릴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하다, 가족들 때문에 할 수없이 도청에서 도망친 분들, 부당함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든 시민들의 명복을 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적이 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와! 진리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된 순간이 비극이었다면,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순간은 바로 희극이었으니,...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

- 최인훈, <광장> 서문 중에서.

<세미나XX>에서 라캉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돌아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남자는 이기적이고 심지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강해져서 타자와 충돌하는 것이 바로 강박증이다.

그래서 스펙터클이란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라고 기 드보르는 자신의 주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강조했던 것이다.

자신의 주저 <팡세>에서 파스칼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 아니라, 허영에서 찾는다. 중요한 것은 허영의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인정 욕구라는 메커니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그의 통찰이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된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그의 주저 <부정변증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도르노는 ‘절박함’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절박함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철학을 표방한 것으로 위대한 형이상학자 장재의 이야기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나의 어머니로 부르며, 나는 이처럼 미미한 존재로 아득하고 광대한 천지에 태어나 살고 있다. (...) 사람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며, 만물은 모두 나의 동료이다. (...) 천하에 피곤하고, 고달프며, 병들고 불구인 사람, 그리고 부모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형제들 중에 넘어져 고통스러우먼셔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장재의 주저 <정몽>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벤야민이 역사철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술회하면서 "곁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본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제강점기나 혹은 유신 시절에 아무리 세련된 문물들이 범람했을 지라도 심지어 그것들이 그 시절 유물의 99퍼센트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야만 한다. 그 모든 세련된 문물들은 결국 제국주의를 위해, 혹은 독재자를 위해, 아니면 자본주의를 위해 바쳐진 기념비일 테니까 말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타자가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타자는 역지사지가 불가능해지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타자와의 제대로 된 관계는 당장 현재는 불가능하고, 오직 미래에 가능하기를 꿈꿀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하나의 삶의 형식이라는 사실은 고대철학의 세계에 관통하고 스며들어 있으며 지속되고 있는 파르헤지아라는 기능, 즉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기능이란 일반 도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철학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어떤 것들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인생의 선택이다."

..파르헤지아라의 가치는 솔직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빛을 발한다. 이런 이유로 푸코는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에 "용감하게"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것이다.

영민한 현대 프랑스 사회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도 자신의 저서 <리듬분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미디어화는 대화를 지우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이다.

‘리스판스response’가 ‘반응’이라는 의미라면, ‘어빌러티ability’는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리스판서빌러티’는 ‘반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아니면 사물이든 간혹 우리는 타자의 고통이 뼈저리게 다가오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 순간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에 출간된 시집 <희망의 나이>를 마무리하면서 시인 김정환도 말한 적이 있다. "사회성과 서정성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게 시의 문제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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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8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6-05-18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좋은리뷰도 감사하구요 강신주샘 강의 듣고파

시이소오 2016-05-18 20:37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

cyrus 2016-05-1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비 시대에 적응하는 사이비, 가짜 철학자도 있을 거예요. 요즘 시대에 뭐가 진짜인지 사이비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요. ^^;;

시이소오 2016-05-18 20:38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사이비가 워낙에 판을 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힘든 시기네요. ^^ :

2016-05-19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19 09:42   좋아요 0 | URL
그랬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