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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총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 <일기예보의 기법>,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기억에 남고, 한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표제작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다. 책을 쭈욱 훏어 보다가 “그러니 한국 영화의 앞 날은 얼마나 밝은 거니?”란 문장 때문에 읽기로 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마지막 대화문이었다.
화자의 이모는 젊은 시절 영화배우였다. 그녀는 출연한 영화의 감독과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감독과 3개월 정도 동거하면서 밤이면 ‘감독님’품안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 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팸 이모는 감독과 감독 부인, 그리고 감독의 아들과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는다. 그날로 감독은 그녀를 남고 두고 떠나고, 27년 후, 감독이 된 정감독의 아들이 제주도로 그녀를 찾아와 두 사람은 짬뽕을 먹는다.
나는 김연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읽은 작품이 별로 없었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거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일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까. 홍상수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카버를 번역해서? 그것도 아니면 <소설가의 일>을 읽었기 때문일까?
언급한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대사는 유머러스하고 전반적으로 경쾌하다. 한편으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내가 왜 한국 소설을 싫어하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한국 소설들은 뭐랄까. 소녀들이 소중하게 간직해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비밀 상자라고나 할까. 아기자기하지만 답답하다. 아빠에, 엄마에, 동생이, 이모가, 외삼촌이 어쩌구 저쩌구. 늘 이런 식이다. 거기서 조금 확장되면 여자친구가, 남자 친구가, 남편이, 아내가, 장모님이 어쩌구 저쩌구.
한국 소설은 한마디로 ‘넋두리 문학’이다. (한이 많아서 일까?) 내러티브는 마치 메말라붙어 뚫고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설령 나아갔다 한들, 들어 온 물건을 잡을 수 없는 폐경기 여성의 질만큼이나 헐겁다.
그런 측면에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분명 칭찬받아 마땅한 작품이다. <28>의 실패가 아쉬운 대목이다. (읽다가 중간에 던져버려 내용을 모른다.)
이 책을 읽다 책 체인지, 프란시스 베이컨 인터뷰 집인 <나는 왜 고기가 아닌가>를 읽었다. 어라,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팸이모가 암송하던 T.S 엘리엇의 시를 인터뷰집 서문에서 다시 만난다. 불과 30분도 안되어 나는 똑같은 시를 읽어야 했다. 왜일까? 천 억분의 일의 확률의 우연. 융이말한 동시성의 상황. 삶의 지표일까? 징조일까? 코엘료가 말했던 ‘표지’일까.
(두 책의 번역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내맘대로 번역했다.)
I said to my soul, be still, and wait without hope
For hope would be hope for the wrong thing ; wait without you
For love would be love of the wrong thing ; there is yet faith
But the faith and the love and the hope are all in the waiting
Wait without thought, for you are not ready for thought;
So the dakness shall be the light, and the stillness the dancing
나는 내 영혼에게 말했다. 잠자코 희망없이 기다려라.
희망이란 그릇된 것을 위한 희망일지니.
사랑없이 기다려라.
사랑 역시 그릇된 것을 위한 사랑일지니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있을 것이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모두 기다림 속에 있다.
생각없이 기다려라. 너는 아직 생각할 준비가 안 돼있다.
그리하면 어둠이 빛이 될 것이고,
고요는 춤이 되리라.
- T. 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
생계에 대한 위협이 시시각각 나를 죄어온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느새 난 또 다시 걱정 속으로 침잠한다. 자연이 내게 보내오는 메시지는 아닐까. ‘고요히 기다리면 빛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조언하고 싶은걸까.
얼마 전 읽은 다른 책에서의 들뢰즈의 말이 기억난다. 왜 그렇게 끊임없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보러 전시회를 찾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들뢰즈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가 자신의 존재자체를 뒤흔들 예술작품과의 황홀한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먹고 살 수 있는 건수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차원이 이렇게 다를 수가.
-2015.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