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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의 쓸모 -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미켈 H. 야콥슨.키스 테스터 지음, 노명우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새로운 밀레니엄 시기를 전후로 친구가 민예총 간사로 있어, 민예총에서 반값 할인으로 여러 강좌를 수강했던 적이 있었다. 강사가 누구였는지, 무슨 강의를 들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알만한 진중권 쌤으로부터 베냐민 강의를 듣기도 했었고, 박준상 쌤으로부터 레비나스를 듣기도 했었고, 김상봉 쌤으로부터 칸트를 듣기도 했었고, 아무튼 잡다하게 이것저것 듣기는 많이 들었다.
(슬프게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왜 들은 것일까.)
가끔씩 수강생들과 뒷풀이를 하기도 했었다. 한 남자 수강생이 참 아니꼬왔다. (지금은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잘난 체 한다고 여겼나보다.) 전공을 물었더니 사회학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니, 어따 써먹겠다고 사회학 따위를 하냐, 공부할라면 철학을 해야지!”하고 호통(?)을 쳤던 기억이 난다.
(내 전공은 철학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 얍실해.)
술 깬 다음날도 쪽팔렸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지지리도 못났다. 지금은 거꾸로 아닌가.
철학을 공부해서 어따 써먹을까.
내 관점으로 특히나 포스트모던 철학은 쓸모가 없다. 최근에 읽은 윌리엄 B 어빈의 <직언>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다. ‘아, 그래 스토아철학자들처럼 살아야겠다. 이거야말로 철학이지.’ 현대 철학은 현학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목적을 상실한 유목민 아닌가. 따지고 보면 뭐 대단한 걸 주장한 것도 아니다. 단지 누가 더 어렵게 쓰나 배틀을 벌인 것일 뿐. 철학을 그렇게 어렵게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야말로 대중과 '경계'를 그은 것 아닌가. 특히나 들뢰즈와 데리다. 할 수만 있다면 데려와 취조를 하고 싶다.
‘그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철학에 비하면 사회학은 쓸모 있다.
현대의 가장 핫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인터뷰집이다. 한국의 신뢰할만한 사회학자 노명우가 옮겼다.
프리먼 다이슨은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궁극의 이론’만을 찾다 맛이 갔다고 말했다. 다이슨이 과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그러한 ‘환원주의’다. 바우만 역시 과학의 자리를 주장하는 사회학을 경계한다. 인간의 삶이 단순히 데이터로 격하될 때, 개별적인 개인들의 경험과 체험들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바우만은 라이트 밀즈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받아들여 사회학적 해석학을 주장한다. 바우만에게 사회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다. 지금의 세상이 현재 어떠한 모습이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는 거짓이다.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 없다. 모든 것을 다시 바라봐야 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며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의문이 없다는 건 자유 없음이다.
바우만에게 사회학이란 ‘병속에 든 메시지’다. 동시대인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메시지는 언젠가는 들을 준비가 된 누군가에게 전달 될 것이다.
블랑쇼는 말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다.
나는 20대 때 니체의 광팬이었지만 니체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대중적으로 읽힐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니체 생전에 니체의 책은 고작 40부를 찍었고, 지인들에게 7부만 전달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오늘날의 한국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다. 바우만은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사회가 가능한 최선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들에게 ‘퍽 유’를.
나는 이상하게도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힘을 얻는다.
내게는 바우만이 자기계발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
-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