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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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를 보면 러시아 천문학자 이오시프 시클롭스키의 일화가 나온다. 다이슨은 시클롭스키가 성공한 사람임에도 굉장히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한다. 시클롭스키는 자신의 고독감의 이유를 다이슨에게 털어놓는다.

 

2차 세계 대전 끝날 무렵, 군에 입대한 시클롭스키의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전부 다 죽었다고 한다. 시클롭스키만 살아남았다. 몰랐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피해가 그 정도일 줄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나는 전쟁동안 집에서 남편을 기다렸던 여성들에 대한 인터뷰로 짐작했었다. 세상에, 백만 명의 여성들이 전쟁에 참가했다니! 그것도 대부분 15살에서 19살의 소녀들이!! 게다가 징병이 아니라 대부분 너도나도 경쟁하듯 지원했다. 어리다고 내쫓겨도 기어코 총을 잡고자 했다.

 

처음에는 계급도 모르고, 양손으로 경례를 하던 소녀들이 저격을 하고 백병전을 하고, 탱크를 폭파시키고, 포탄을 뚫고 부상병을 구출해오기도 했다. 총을 잡지 못하면 다른 일을 했다. 간호병, 운전병, 교통 정리병, 항공기정비사, 전화교환수, 세탁병, 취사병, 제빵병, 기록병, 물품보급병, 우편병 등등.

 

러시아인들의 유난스런 조국애는 도대체 어디선 연유한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러시아가 아닐까.

 

수백 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일명 목소리 소설’, 작가 자신이 소설 코러스라 부르는 형식을 통해 완성한 이 책에 대해 재판이 열렸다고 한다. 신화화되고 영웅시되던 전쟁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죄목이었지만 시민들의 노력으로 재판은 종식되었고 작품은 전 세계 200만부 이상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아이가 배가 고파서.......젖 달라고 보채는데........엄마도 먹은 게 없으니 젖이 나올 리 없었지. 아이가 울어댔어. 아이는 울지, 독일군 추격대는 코앞에 있지....수색견까지 데리고......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서른 명이나 되는 우리 목숨이 다......이해가 돼?

결국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어....

누구도 지휘관의 결정을 아이 엄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그대로 한참을 있었어......아기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우리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었어. 눈을 들어 아기 엄마를 마주 대할 수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이웃집에 꽃에 물을 달라고 부탁하고 전쟁에 참여해 4년 만에 돌아온 소녀. 트렁크 가득 사탕을 넣어간 소녀. 두 시간 보초를 섰는데 백발이 된 소녀......

 

전쟁 중임에도 소녀들은 치마를 입고 싶어 하고, 머리를 염색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건만 국가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편을 고문한다.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건만.....

 

,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책은 숱한 목소리들로 엮어낸 테피스트리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이 모두 중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우리 몸을 뚫고 나가는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쓴다는 건 야만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밑줄 그은 문장

 

p23.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곳에선 역사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을 다스린다. 내 글의 폭을 넓혀야겠다. 전쟁에 대한 진실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담은 책을 써야 한다. 도스토엡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 물음을 이제 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p25.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p28. 광학에는 집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사체를 잡아내는 렌즈의 정확도를 말한다.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의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p32. 나는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없소........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 ....’라는 추신이 덧붙여진 편지를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p42.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p60.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p198.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p201.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전쟁 없이 살고 싶어. 전쟁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하루라도 그런 날이 있었으면.....

 

p225.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p268.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p272.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만큼.

 

p296.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이 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p338.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p410. 우리는 연인들을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

 

p463. 우리 이야기는 꼭 안 써도 돼.....우리를 잊어버리지만 마....당신과 내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잖아. 같이 울었고. 그러니까 헤어질 때 뒤돌아서 우리를 봐줘. 우리들 집도. 낯선 사람처럼 한 번만 돌아 보지 말고 두 번은 돌아봐줘. 내 사람처럼.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뒤돌아봐주기만 하면 돼.....

 

p468. ‘뭐야? 뭐가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대체 그게 뭐라고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데? 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하지?’ 그는 러시아어를 아주 잘했어. 그래서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지. 어차피 죽을 목숨, 헛일하는 셈 치고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나 죽자 싶었거든. 그는 거의 네 시간 동안 질문해댔고, 나는 최대한 아는 대로 대답해줬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마르크스 레닌주의까지 다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 그가 하는 행동이라니!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는 방안을 뛰다시피 서성이고, 한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고, 나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하지만 처음으로 매질은 안 하더군.

 

p475. ,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목이 메어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남편은 전쟁에 나갔다 죽고 혼자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면서. 게다가 가진 거라곤 그 닭 한 마리가 전부인데. 그런데 그 닭을 팔겠다는 거야. 나한테 돈을 주려고 말이야. 그 당시 기부금은 전부 현금으로만 받았거든. 여자는 모든 걸 내놓을 각오가 돼 있었어. 그래서 세상이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자기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만 있다면.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 세 아이들 얼굴도......

 

p552.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p554.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기가 두려웠어. 하늘을 향해 고개도 들지 못했지. 갈아엎어놓은 들판을 보는 것도 무서웠어. 그 땅 위로 벌써 떼까마귀들이 유유히 돌아다녔지. 새들은 전쟁을 빨리도 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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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6-02-20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은 문장들만 읽어도 가슴이 아파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2-20 12:06   좋아요 0 | URL
전쟁은 정말 끔찍한것 같아요. 그보다 끔찍한건 잊는거겠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 속에 빠트리는 아기 엄마 이야기를 들으니 김종화 시인의 시가 생각나네요..
그 시에도 아이 엄마는 아이를 물 속에....

시이소오 2016-02-20 12:25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네요^^

비로그인 2016-02-2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으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

시이소오 2016-02-20 22:53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사연을 빼고 올린다는게 비윤리적이라 느껴지네요 ^^;; 애초에 발췌하는게 아닌데 싶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