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다지 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제목을 보아하니 죽음에 관한 그저 그런 책이거나 혹은 죽기 일보 직전인 노인들을 위한 책이라 짐작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다......고 말할 순 없겠네. (중이염 때문에 고막은 녹고 허리 디스크 때문에 다리는 저리고 매일 상습적인 트림으로 보아 위암, 직장암, 식도암으로 추정되기에)

 

이 책의 원제는 <Being mortal>이다. mortal죽음의로 번역되긴 하지만 인간의혹은 현세의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뭐라고 번역하는 게 가장 좋을까. 영어에 문외한이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책은 죽음을 논하기보단 삶을 논한다. 죽음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것인가를.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존재하는데, 미래보다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온 몸에 수십 개의 관을 꽂고 산소 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할 순 있다. 길어봐야 몇 달을 더 살기 위해. 과연 그게 옳은 일일까.

 

누구나 죽는다. 노화로 인해 죽게 된다면 누구나 혼자 힘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시기가 온다. 그럴 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시설이다.

 

프레데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서 오베의 친구이자 원수인 루네의 시설 행을 막기 위한 루네 아내와 오베, 이웃들의 고군분투의 일화가 나온다. ‘선진국에서나 떠올릴만한 갈등이군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래야만 했다.

 

저자인 아툴 가완디 박사에 따르면 획일적인 시설에 들어간 노인들은 대부분 불행한 상태로 죽음을 맞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는 순간 인간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가족이 노인을 돌보는 것이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사례를 통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를 성심성의껏 돌보던 셸리는 끊임없이 사생활이 침해받자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죽을까봐가 아니라 아버질 죽일까봐’.

 

이러한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명가들이 있었다. 윌슨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집과 같은 요양원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파크 플레이스를 오픈한다. 파크 플레이스는 후에 어시스티드 리빙시설로 확장되지만 윌슨이 추구한 집 같은 요양원의 개념은 퇴색되고 만다.

 

의사 빌 토머스는 체이스 요양원에 부임하자 즉각적으로 요양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눈에 요양원은 절망과 우울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요양원에 생기를 불어넣을 계획을 추진한다. 꽃과 개, 고양이, 그리고 어린 아이들. 나중엔 새와 토끼, 심지어 암탉까지.

(새장이 늦게 와 잉꼬 수백 마리가 병실 안을 날아다닌 일화를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토머스의 에덴 얼터너티브프로그램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세상과 관계 맺고, 사랑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웃기 시작했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호스피스 케어도 하나의 대안이다. 의료 행위가 생명 연장이 목적이라면 호스피스 케어는 환자가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스피스 케어를 선택할 경우 환자들은 고통을 덜 느끼고 화학요법을 선택했을 경우보다 생존기간도 25%나 더 늘었다고 한다.

 

가망없는 치료를 계속 고집하는 건 환자의 의도일까,

아니면 죄책감을 덜고 싶은 환자 가족의 의도일까.

 

아툴 가완디는 환자 가족(그의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이었고 의사다. 그가 보기에 의사들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 가부장적 의사, 정보를 주는 의사, 그리고 해석적인 의사. 가완디는 자신이 정보를 주는 의사의 입장이 가장 편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환자 가족의 입장이 되었을 때에야 그는 의사들이 해석적의사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해석적 의사들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해석적 의사들은 환자 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걱정되는 게 뭐지요?”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환자의 가족 들도 환자가 중요시하는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치료는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환자가 의식이 불명일 경우 환자 가족들이 결정을 대리해야 한다. 그럴 경우 환자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완디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고통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의 몸에 수십 개의 관을 꽂아 생명을 연장시킬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아버지의 생각을 몰랐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삶에는 끝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 죽음을 앞둔 환자. 환자의 가족.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인간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밑줄 그은 문장

 

p9.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그는 죽어 가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때로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수척해짐녀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극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채 산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난 후에 그가 가장 원했던 건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 데다 턱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나이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

 

p70. 가장 심각한 위협은 폐결절도 요통도 아니다. 바로 넘어지는 것이다.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는다. 그중 40%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고, 20%는 다시 걷지 못했다.

 

넘어지는 데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균형 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그리고 근육 약화다. 이런 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 1년 사이에 낙상할 확률은 12%. 반면 이 요인들을 모두 가진 노인의 낙상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p94.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p279. 사용하는 말도 중요하다. 완화치료 전문가에 따르면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한 이렇게 물어서도 안 된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그보다는 이게 낫다. “만약 시간이 촉박해진다면,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p227.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궈녉을 더 바라지도 않느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p355. 라케스는 이를 인정하고, 갑자기 니시아스 끼어든다. 그는 용기란 전쟁을 비롯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기서도 잘못된 점을 찾아낸다. 미래에 대한 완벽한 지식없이도 용기를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기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지혜란 분별력있고 신중한 힘이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p380.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죽는 자의 역할이라는 개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죽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둔감하게 도외시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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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ology 2016-02-1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하던 게임에서는 mortal을 필멸자 라고 번역했었습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2-17 09:24   좋아요 0 | URL
필멸자, 비장하네요^^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늙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기 싫고
보기 또한 싫어
서랍 속 깊숙히 넣어둔 숙제 같은거 아닐까요.
결국은 꺼내봐야하고
들춰봐야 하는. .

시이소오 2016-02-17 12:16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렇다고 청춘이 굳이 죽음을 고민할 필욘 없을것 같아요. 외면한다해도 언젠가 그가 찾아올테니까요. 카르페 디엠!!^^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순간~~
그러나
청춘은 짧으니까요ㅎ

시이소오 2016-02-17 12:23   좋아요 1 | URL
길고 짧은건 대봐야알죠. 죽는날까지 청춘이라 우길거에요^^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방법이 ^^

시이소오 2016-02-17 12:42   좋아요 0 | URL
가네시로 카즈키의 주인공들 처럼 언제나 `Go`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