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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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건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이라기보단 에세이에 가깝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기 보단 <불안>,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같은 보통의 에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보통 역시 이 작품을 일반적인 소설로 고려하진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는다면 이보다 더 밋밋한 플롯의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완벽한 17년 만의 실패작이다.(보통의 17년 만의 소설) 이 작품을 구제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기초를 소설을 빙자한 에세이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결혼이 낭만적 사랑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서 - 정이현의 주장과는 달리-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이보다 식상한 주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아무런 기대없이 보통의 문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p22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가혹하지만 타당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56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p65

 

이 달콤한 삶. 그리고 배후에서 전개되는 어른의 고달픈 삶. 그 둘의 대비를 인식할 때면 벤의 눈가는 축축해졌다. 동화 속 악당이 못된 짓을 그만두거나, 버릇없던 어린 주인공이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선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정글북>을 읽어주다 말고 황급히 방밖으로 나와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가 눈물나는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었다. 세상의 아주 많은 것들이 아름답지도 순수하지도 않건만, 유년기에 속한 어떤 특별한 것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기 때문이었다. p81

 

예전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집중해서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체호프와 경쟁할 만한 거라곤 골목길을 따라 이십 분 걸어가서 나누는 이웃과의 수다가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델 컴퓨터의 모니터 창을 두 개로 나눠서 한쪽에는 치어리더 사진을 띄워놓고 다른 창으로는 MSN 메신저로 스물다섯 살의 날씬한 뮌헨 아가씨와 미네소타에 사는 십대 풋내기 레즈비언 행세를 하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한 시대에 체호프든 다른 어떤 문학작품이든 간에 읽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P 101

 

그가 원하는 것을 섹스라고 기술하는 것은 벤의 흥분 상태의 근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베키는 섹스에 해당하는 고대영어 단어 알다와 완전한 동의어였고, 본질적으로 어울렸다. , 그녀는 알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와 발목, 그리고 목덜미를 알고 싶었다. 그녀의 옷장, 책장에 꽂힌 책들, 샤워를 마친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알고 싶었다. 어린 소녀였을 땐 어떤 성격이었는지, 친구들과 나누는 비밀 얘기는 뭔지 전부 다 알고 싶었다. P117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각각 다른 것들에 위협이 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섹스하는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 이상 흥분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P139

 

통상적인 시각에서 약간 비켜나면, 외도 자체가 죄는 아니다. 외도가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그 부조리한 천친난만함, 그 속에 담긴 희망, 그것의 감상주의 때문이다. , 그것에 깃든 낭만성이 거슬리는 것이다. P 140

 

벤은 극적인 운명을 원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그런 운명을 가졌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을 잘 지켜내는 것, 온전한 정신상태와 생활할 수 있는 경제력을 유지하고, 결혼생활에서 살아남고, 아이들이 잘되는 것. 이런 계획들은 노르웨이 시인의 서사시만큼이나 영웅이 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상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헬리콥터 안에서의 짧은 순간, 그리고 그 뒤로도 가끔씩 우리의 영웅 벤은 이 과제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P165

 

보통은 평범한 삶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결론짓는다

현명한 대답이긴 하나 시시하거나 거짓처럼 들린다.

 

사랑의 기초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소설의 몰락을 생각한다. 디킨스의 소설을 읽기 위해 항구에 몰려든 19세기의 독자들에겐 배트맨도 슈퍼맨도 아이언맨도 없었다. LA 다저스도 없었고 첼시도 없었다. 심지어 포르노도 없었다. 현대 소설은 TV, 영화, 인터넷, 페이스북, 트위터, 온갖 종류의 게임, 스포츠, 포르노와 대결해야 한다.

 

도서관은 어느새 소설책들의 납골당이 된지 오래다.

그나마 읽히는 소설들은 말초적일 수밖에 없다. 섹스나 살인, 낭만적 사랑을 다루지 않는 소설은 대부분 읽히지 않는다.


예술은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다. 현대 미술 역시 쓰레기들만이 잘 팔린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언제까지 순문학을 고집할 것인가? 올해 출판계에서 한국 문학은 거의 아사상태다. 한국 소설가들은 분명 다른 나라 작가들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좋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순문학을 읽을 수 있을만한 독자층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감소할 것이다. 소설 좀 읽는다는 나 조차도 도서관에 꽂힌 한국 소설들을 둘러보면 꽂히는 작품이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2015. 5. 1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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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삶을 견뎌내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결론은 저 역시 시시하면서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불순하기까지 하고.

그닥 재미 없는 농담이지만 보통은 정말 보통이네요.

시이소오 2016-02-16 16:2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도 보통은 보통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시이소오 2016-02-16 16:32   좋아요 0 | URL
그냥 보통의 농담으로 ㅋ^^

2016-02-16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재미 없는 농담쯤으로... ^^

깊이에의강요 2016-02-16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ㅠ
나는 많이 읽는 사람이라 생각...아니, 상상했습니다ㅋ


시이소오 2016-02-16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상상 아니 착각했어어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1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각 아니신데요ㅡㅡ
저는 모래정도인지
먼지 정도인지...
가늠이...

시이소오 2016-02-16 17:37   좋아요 0 | URL
아직 청춘이시잖아요? 저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대략 ......50년?! 음 .....희망사항이네요 ^^;;

서니데이 2016-02-16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시이소오 2016-02-16 18: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