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돌이님이 전태일 열사 반신상을 페이퍼로 올리신 걸 보니 생각나는 하루가 있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러 갔던 날.
1995년 11월 개봉, 딱 10년 전이다.

박광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제작비는 한푼 두푼
국민들의 기금을 모아 만들어졌다.
전태일 열사의 열렬한 팬으로서 나도 얼마간 정성껏 냈다.

박광수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나는 그의 영화들이 별로였다.
아무튼 영화사에서 초대권을 두 장 보내주어서 그때 연애도 아닌 것이 묘한 관계로 만나던
몇 살 연하의 시인이랑 강남의 극장에 갔다.

엔딩 크레딧에 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영화보다 그것이 감동적이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에나, 전태일 열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가슴에 돋은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만든 홍기선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박광수 감독은 그 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 실수를 하여 완전히 내 눈밖에 났다.
부산 출신인데 자신이 나온 고등학교를 '똥통학교' 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고등학교 출신 중에 한동안 내가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던 것.

극장 로비에서 시인이 내심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소설가를 만났다.
이름에 '응'자가 들어가는 그 젊은 소설가는 나와 시인을 보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소설가 '응'과도 나는 안면이 있었던 것.
그날, 부산의 내 도서관 친구가 예술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오기로 되어 있어 우리는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

내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가랑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인을 대동하고 약속장소에 나타나자
너무나 즐거워했다.
나도  그 상황이 즐거웠다.
노래방에서 쾌감(!)은 극에 달했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와 두 미남자가 나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열창을 할 수밖에......
시인은 '사랑한 후에'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소설가도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술, 노래방.....유흥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냈다.
그들과 헤어져 친구와 집으로 돌아올 때 조금 깨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문인들이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얻어먹기만 하다니!
아무리 우리가 노처녀기로!
물론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즐겁게 놀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정말 아까운 건 따로 있다.
그날 내 가방 속에 이윤기의 <하늘의 문> 1권이 들어있었는데 소설가 응에게  빌려준 것이다.
절판이라 구할 수도 없는 책이니 두고두고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응은  꽤나 재밌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었는데 이젠 '내 책을 빌려가서 안 갚은 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시인은 '우디 알렌의 <범죄와 비행>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가 안 갚은 놈!'과
멋들어진 필체의 편지 한 통으로만 남아 있고.

아무튼 전태일 영화 개봉일은 내 인생에서 제일 흥청망청했던 날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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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9-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
아 흥청망청은 했으나 소득이 별로 없었던 듯.... 게다가 이후 장기 투자의 역할도 별로 안됐던듯....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

hanicare 2005-09-2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응준씨가 문득 떠오르긴 하네요.후훗..시인은 누굴까. 미남자라니 더 궁금하지만. 완전히 맨입으로 얻어만 먹었다니. 쯔쯔...저라도 기분 상하겠어요.아무리 내 주머니가 토실토실하고 상대가 삐쩍 말랐다 해도 차라도 한 잔 사야지....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요, 자기 품위를 유지하는 길이었을텐데.

인터라겐 2005-09-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마지막이 .... 책 떼어 먹는 사람이 제일 얄미워요...

국경을넘어 2005-09-2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태일 평전>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들이 평이 엇갈리더군요. 본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가 별로라고...

비로그인 2005-09-2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하하하. 텅 빈 공간 안에서 우렁차게 웃어봅니다. 소설가 '응'님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죠. 그날 로드무비님이 쏘신 덕분에 그 분들의 가문 살이 두룩두룩 올라 글케 기름진 문장들이 나왔다 생각하렵니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하는 문학계의 진정한 큰 손..

히나 2005-09-2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너무 재미있어요 특히 소설가 응씨와 관련된 부분, 정말 이응준씨 맞나요? 이번에 중앙일보 문학상인가 수상한 여자가 이응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러는데 재미있더라구요 이제 이응준도 선생님 소리 들을 나이인가 싶어서.. 박광수 감독 영화는 저도 그냥 그래요 우선 재미가 없고 너무 심각하셔서.. 안경을 쓴 그 인상때문인가.. ^^;

로드무비 2005-09-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이름에 응 들어간 소설가가 이응준 씨밖에 없나요?
낭패인데...^^;;
박광수 감독 영화는 칠수와 만수부터 뭔가 삐그덕거리더라고요.
요즘은 아예 그의 영화 안 봐요.^^;

복돌이님, 님이 우렁차게 웃으셨다니 기뻐요.
사실은 유명한 문인들이 우리와 놀아주어 감지덕지했답니다. 헤헤~

폐인촌님, 맞아요.
평전 읽고 울고불고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난리도 아니었는데
영화는 너무 멋을 부려서 마음에 탁 걸리더군요.
홍기선 감독이 만들었으면 기가 막혔을 텐데.....

로드무비 2005-09-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책 한 권에 비디오테이프 한 개에 제가 너무 야박한가요?ㅎㅎ

하니케어님, 저녁 메뉴도 별것 아니었거든요.
서초동 교대앞 유부우동집.
김밥하고 다 해서 돈도 얼마 안 나왔는데......
(저도 조금 아쉬워요. 그런데 사실 돈이 없긴 했어요. 그들!^^)

바람돌이님,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페이퍼로도 쓰고...
소득이 있네요, 뭐!^^

urblue 2005-09-2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진 제 책들이 생각납니다. 코스미코미케, 아르마다, 키니냐가, 픽션들...으흑..

코마개 2005-09-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그 영화 저도 좋았어요. 감독 이름은 로드무비님이 말해 주셔서 알았네요. 그 영화랑 느낌이 비슷한 소설이 '숨은 그림찾기'인가...뭐 그런게 있었는데..(금주현상)
별로 본 사람 없는 영화를 본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서...

마태우스 2005-09-2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의 장점은 하루 일과를 얘기하실 때 지루하지 않게, 멋드러지게 쓰신다는 거예요. 님의 글,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마지막 결론도 어쩜 그리 멋지십니까.

숨은아이 2005-09-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최응삼인가요? 라 하려구 했는데... ㅎㅎ 이 영화에서도 로드무비님과 공통점을 하나 발견! 그것만으로 좋으네요, 그냥.

엔리꼬 2005-09-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이 중간에 들어가는 사람 중에 최응삼도 있습니다. 다들 그분을 무시하지 마시길... 저도 <전태일> 영화 자체보다는 마지막 사람들 이름 쫙 나오는 부분이 더 멋졌어요.. 도저히 자막 끝날 때까지 극장 밖을 나갈 수 없었죠.

야클 2005-09-2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동안 흥청망청 한번쯤 써 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딱 한번쯤은. 그래야 여한이 없죠. ^^

클리오 2005-09-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얻어먹었던 그 사람들이 나빠요... (어째 별 관계있는듯, 없는 듯한 댓글... --;)

인간아 2005-09-2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의 문> 1권은 종종 헌책방에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구하게 되면 로드무비님께 보내드릴게요.

이리스 2005-09-22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로드무비님이 아까워하시던 <하늘의 문>도 (언젠가는)구할 수 있게 되고.. ^^; 근데 그 문인들 참 나쁘군요. 흥... 저도 응준.. 이라는 이름만 생각나더라는..^^

로드무비 2005-09-2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운빈현님 고맙습니다.
2권, 3권만 달랑 꽂혀 있는 걸 보면 속상해요.
다 읽은 책인데도......^^

클리오님, 수입이 거의 없는 청년들이었으니 이해해 주자고요.^^

야클님, 전 그런 의미에선 여한이 없습니다.
행운이죠.^^

서림님, 님의 이름도 자막에 있었던 건 아닌지...^^

숨은아이님, 그 공통점이 뭘까요?
궁금합니다.^^

마태우스님, 예, 저도 제 글이 마음에 들어요. 헤헤^^
(알라딘에서 제가 세번째로 좋아하는 마태우스님!=3=3)


로드무비 2005-09-2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괜찮은 한국영화는 무조건 개봉관에서 보는 걸 원칙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저 영화 보셨다니 저도 반가운데요?^^

블루님, 픽션들 외엔 모두 모르는 책.
책들이 발이 달렸나?
(친구에게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언젠가 쓰셨죠?)

로드무비 2005-09-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낡은구두님.
글고보니 저 그날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불렀군요.
페이퍼에 쓸걸.ㅎㅎ
님도 그런 책 있으면 운빈현님 졸라 보세요.^^

2005-09-22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09-2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통점은, 그거죠 뭐. 내 이름 언제 나오나 보려고 자막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는... -_-; (앗, "언젠가는"은 제 노래란 말입니닷.)

돌바람 2005-09-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 이상은


젊음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이렇게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로드무비님! 엽서 받았답니다. 필체가 너무너무너무 멋져서 무조건 손들고 저요 저요 하길 잘했다고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조조영화과랍니다.^^ 보내주신 시집은 301번에서 멈춰 있는 걸 어찌 아시구. 곱씹으면서 잘 보겠습니다. 글구요, 저도 조정현(? 갑자기 이름이 헷갈려요. 맞나? 피아노에 나왔던) 나왔던 <가슴에 돋은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대학 때 보았답니다.^^


로드무비 2005-09-2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돌바람님!
잘 들어갔군요.
빠른우편으로 보낸 보람이!^^
조'재'현이 연기를 참 잘했죠.
거친 사내들의 세계가 그냥 막 육박해 오는 영화였어요.
'언젠가는' 올려주셔서 너무 기뻐요.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5-09-2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그랬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속삭이신 님, 책이 잘 도착했군요.
다행입니다.
책은 천천히 보내주셔도 되는데...^^

혜덕화 2005-09-2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재미있어요. '내 책을 빌려가서 안갚은 놈!" 앞에서는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님이 부럽네요.

클리오 2005-09-2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돌바람님이 올려준 노래의 저 가사 참 좋아해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날개 2005-09-22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글은 읽고 나면 수많은 댓글들 때문에 항상 스크롤의 압박이......^^;;

로드무비 2005-09-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모처럼의 흥행이구만요.
흥=3 님은 요즘 장난도 아니시면서!^^

따우님, 사진 정말 멋지더군요.^^

클리오님, 알라딘엔 유난히 이 노래 좋아하는 분들이 많당게요.^^

혜덕화님, 전 언제나 차분한 님이 부러운 걸요.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ㅎㅎ

플레져 2005-09-2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주 맛있는 장아찌에 아주 고소한 비빔밥이랑 곁들여 먹은 것 같아요. 꿀꺽~ 그 "응" 짜 들어가는 소설가...그분이죠? 제가 생각하는 그 분이요 ㅎㅎ
그 "응" 소설가는 제 친구랑 친구이기도 한데...헤~ 이르지 않을게요 ^^;;

chika 2005-09-2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저도.. 눈알빠지게 내 이름 찾았더랬지요. 그 깨알같은 이름.. ;;;

근데요.. 로드무비님, 모처럼의 흥행이라니요. 컴 고장나서 뜸하다가 글 쓰신거 아니었어요? 흥행한번 못하는 나는 주눅들게스리~ ;;;;

로드무비 2005-09-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오, 님의 이름도 그 자막 속에 있었군요. 반가워라!^^
그리고 괜히 그냥 그렇게 말해본 겁니다.
치카님이 주눅드실 일이 뭐 있다고.
님도 괜히 그냥 그렇게 말씀해 보신 거죠?^^

플레져님, 아주 맛있는 장아찌에 비빔밥 먹고 싶어요.
그리고 응이라는 소설가는 플레져님 친구의 친구분이 맞겠죠?
이르지 마세요. 흑=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