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런치 - 내가 낸 세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데이비드 케이 존스턴 지음, 박정은.김진미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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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미국은 아직 선진국이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지 않은. 세금에 대해서도 그렇다. 미국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해 세금을 쓸 걸 같다.
과연 그럴까? 뉴욕타임즈의 기자 데이비드 케이 존스턴은 미국의 세금 문제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기득권층은 공짜점심을 먹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민들의 세금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1년 7월 사우스캐롤라이나, 그곳에서 한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다. 부상자 77명에 사망자 8명. 그 사망자 가족 중 한명이 소송을 제기했고다. 선로보수 업체 CSX가 문제가 있음을 알아채고도 10년간이나 선로 보수 없이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총 5,600백만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물론 그 가족은 그 배상금을 기부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CSX의 원가절감액은 24억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CSX는 당시 열차 차량이 앰트랙(미국 공영 철도회사)이었고, 앰트랙과의 계약상 앰트랙 소유 철도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배상할 책임이 없음을 내세워 앰트랙으로부터 해당 배상금 전액을 회수한다. 즉, CSX는 안전소홀로 얻은 부당이익을 그래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철도민영화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철도 민영화를 통해 각 부분의 민영화를 얻어내면서도 그들은 로비를 통해 책임은 모두 공기업에 돌리는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즉, 위험은 국민의 세금으로 보충하고 수익은 그대로 챙겨먹고 있다.

 

십수년전 영국의 한 지역에서 삼성의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토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세금을 받지 않고 각 종 보조금 혜택을 제시하며 유치해낸 적이 있다. 이는 기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로 많은 예시로 사용되었다. 아직도 삼성이 그곳에 공장을 운영할까? 삼성이 공장을 철수하면서 그 지역은 삼성 유치전보다 더 큰 경제적 암흑기를 맡고 있다. 하지만 삼성이 철수하고 그 지역경제에 미친 폐해에 대해서는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는 대단했겠지만)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을 유치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아주 기본처럼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각 지역 경제를 위해 세금면제, 보조금 제공 등의 특혜를 주면서 기업 혹은 월마트 등 대형 상점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래서 대기업은 이런 점을 악용한다. 보조금을 더 주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 설립하겠다고. 게다가 그 대기업 유치를 위해 '강제토지수용권'까지 행사한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 지역에서 경찰서를 철수시키고, 각종 공공기관을 철수시킨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나라와 다를바 없는데...

문제는 이런 조치들로 개인의 권리가 침해받을 뿐 아니라 세금을 내지 않는 그들을 위해 세금을 낸다. 지역살림을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지만 유치기업에 대해서는 세금 혜택을 주기로 했으므로 세금수입 부족분은 기존 주민들에게 거둬야 한다. 게다가 그 기업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 지급을 위해 주민들은 추가적인 세금을 내야 한다. 대기업은 그 지역에서 손실을 보더라도 보조금 수입이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된다. 지역주민의 세금으로 그들의 이익을 보충해주니까.

 

"그들은 더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정부가 더 커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속한 계층을 위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과 보상을 획득해왔다. 오늘날의 정부는 유례없는 수준으로 민간부문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들은 호화스러운 잔치를 벌이고는 계산서는 우리들 나머지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말 그대로의 '공짜점심 Free Lunch'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공짜점심'은 정부가 개입을 했든 하지 않았든 관계없이, 한쪽이 비용을 부담하고 다른 쪽에서 경제적 혜택을 얻는 것을 칭한다.  .. 우리 경제에는 다양한 보조금이 존재하는데,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교모하게 설계되거나 알아차리기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37쪽)  

 

저자는 실제로 이런 공짜점심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500여쪽에 달하는 내용이 구체적인 사례들로 채워져 있다.

 

그 한 예가 바로 프로스포츠 구단이다. 미국 전 대통령인 부시조차 텍사스 레인저스라는 메이저리그 야구팀을 이용해 엄청난 보조금을 챙겼다.(물론 그가 챙긴것은 야구단 뿐은 아니지만..)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인수해 워싱턴 내셔널즈를 창단하는데 4억 5천만달러가 소요되었는데 워싱턴이 구장 건설 등 야구단 유치를 위해 사용한 보조금은 6억 1천만달러에 달한다. 구단 인수비용보다 보조금이 더 컸다. 구단주는 구단을 인수하자마자 구단의 가치는 인수비용보다 커진 셈이니 주 세금으로 앉아서 돈을 번 셈이다. 보통 구단주들은 미국 최고의 부자들인데 그들은 납세자의 세금을 프로스포츠단을 통해 자신의 주머니에 넣기에 바쁘다. 그래서 '음모의구장'이라는 책을 쓴 전 뉴욕 타임스 기자는 가장 부유한 자들에게 사회주의식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시민들에게 돈을 거둬 최고의 부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특히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왜 그런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니 이해가 간다. 일반 납세자들이 부자들의 '공짜점심'을 대신 지불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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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서는 거의 문외한인데 하는 짓거리는 음악 좀 듣는 사람이다. 2010년에는 쇼팽으로 그
티를 내 보려고 했다. 2010년은 쇼팽 탄생 200주년이었다.  

 

 사실 쇼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쇼팽은 음악성
이 떨어진다는 막연한 망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작년말에 듣고 읽었던 글렌 굴드의 영향이기도
하다. 왠지 듣기 좋은 선율은 철학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냥 거리낌없이 차용했다. 그래서 2010년 쇼팽 200주년에 쇼팽을 들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관심사가 생길 때 마다 버릇처럼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져본다.쇼팽에 출간된 책이며 위키피디아 등 관련 인터넷을 뒤젹거렸다. 쇼팽에 대한 유명세에 비춰 쇼팽에 대한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쇼팽에 대한 소설책 한권 정도인데 이 마저도 별 감흥이 없었다. 대신 명곡라이브러리 쇼팽을 준비했다. 뭐 대단한 음악애호가라도 되는 마냥 일단 구색은 갖춰놓고 본다.

인터넷과 클래식서적 내용을 토대로 들어야 할 목록들을 선곡해본다. 일단 고클래식에서 쇼팽의 대표작들을 저렴하게 구입해놓고 KBS F1에서 나온 Listen & Lesson 쇼팽편을 구매했다. 100번 듣기를 목표로했다. 공연정보도 좀 찾아보고.여기까지 6월이다.

MP3 중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Nocturnes와 Ballades를 주로 들었다. 가끔 운전할 때는 Listen & Lesson 쇼팽을 항상 돌려두었고, 여기는 8월까지의 이야기이다.

한참 음악을 듣지 않고 지냈다. 집에 있는 홈씨어터에는 항상 아기용 CD/DVD가 꽂혀 있었고 주말가족들이 움직일 때를 제외하곤 운전을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11월말 2011년은 말러서거 100주년이다. 말러를 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쇼팽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동안 음악 CD 구매도 하지 않았고, 말러와 쇼팽을 알라딘내 보관함에 담았다 빼기를 반복한다.

루빈스타인의 녹턴을 다시 꺼내 든다. 모음곡이 아닌 쇼팽의 다른 작품들은 솔직히 듣기 힘든 부분이 있다. 연습곡이나 전주곡 중 일부는 귀에 익은 곡이라 괜찮지만 다른 곡들은 아직 귀가 트이지 않은 이들이 듣기에는 힘든 부분이 적지 않다. 그에 비해 녹턴은 아름다운 선율과 적당한 길이로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루빈스타인 손끝에서 울려나오는 선율은 이어폰으로 듣고 있음에도 멈칫 멈칫 선율을 따라 움직일정도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녹턴을 들으며 쇼팽의 녹턴에 대해 들었는데 녹턴에 대해서는 클라우디 아라우를 선택했다. 전작을 모으고자 하는 자끄 루시에의 녹턴, 그리고 앞으로 전작을 모아보고 싶은 백건우를 이번에 쇼팽으로 시작했다.  



루빈스타인의 녹턴이 밝고 가볍고 경쾌하다면 아라우의 녹턴은 밝으면서도 가볍다는 느낌이 들지않을 정도로 준수하고 아름답다. 솔직히 쇼팽의 녹턴을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아라우를 선택하고 추천한다. 자끄 루시에의 녹턴은 그의 여느 작업처럼 박제화되어 있는 쇼팽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데, 원곡에서 벗어나지 않는 초기에서 후반으로 갈 수록 점차 녹턴에 자신만의 색을 입혀나간다. 쇼팽에서 시작했지만 듣다보면 어느새 자끄 루시에의 녹턴으로 변해 있다.특히 이번 앨범은 기존의 트리오에서 벗어나 독주로 연주했다고 한다. (클래식계의 반응이 궁금하다.) 

음악을 듣는 것은 그림을 보는 것 보다 조금 더 어렵다. 소리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쇼팽에 대한 아주 좋은 가이드를 옆에 두고 있는 것은 그만큼 큰 도움이 된다. 쇼팽의 음악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이 붙어 있고 각 곡마다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주제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악보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쇼팽을 공부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다. 바로 음악지우사의 명곡라이브러리 시리즈이다.  

이미 바흐에서 명곡라이브러리를 한권 갖춰놓았는데 관심있는 음악가가 생길때마다 한권씩 채워놓고 싶은 시리즈이다. 베토벤, 모차르트 생애가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지라는 의심이 들때는 바로 이 책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쇼팽 아직 못 읽을 부분이 너무 많다. 그래도 필요한 부분 여러번 찾아 읽었다. 쇼팽 녹턴의 초기작들은 영국의 작곡가 존 필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뒤에 작곡된 녹턴은 쇼팽만의 색깔이 분명하게 담겨있다고 한다. 또 어떤 녹턴은 혹평을 받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뛰어나다는 점도 이 책에서 얻은 내용이다.  

2011년 올해는 어떤 작곡가로 이 시리지를 한권 더 구매할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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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7일 세계적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가 2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와 내한공연을 연다.  

   3월 7일                                                  3월 8일
Dvorak Carnival Overture
Dvorak Violin Concerto                        Bruckner Symphony No.8 
***
Dvorak Symphony No.7  

아쉽게도 이번 내한 공연에도 발걸음을 하기는 힘들 것 같다. 7일 오후임에도 아직 많은 좌석이 남아 있지만, 개인적인 형편상 마음편하게 공연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출산이 임박한 와잎을 두고 혼자 즐기기가 마음 편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는 상태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귀로 듣고 그대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이탈리아 태생의 리카르도 샤이(이탈리아, 1953~)는 아바도, 무티와 더불어 이탈리아 출신 3대 지휘자로 불린다. 

리카르도 샤이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Berlin Radio Symphony Orchestra), 런던 필하모닉(London Philhamonic Orchestra),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Royal Concertgebouw Orchestra)를 거쳐 현재 라이프치히 게트반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 Berlin Radio Symphony Orchestra(1982~1988) 

-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1988~2004)

- Leipzig Gewandhaus Orchestra(2004~현재)

2004년 리카르도 샤이가 16년간이나 함께 했던 세계 최고(最高)의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는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Royal Concertgebouw Orchestra)를 떠나 라이프치히 게트반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로 옮긴 것은 놀라운 일 중의 하나였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역시 267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멘델스존이 지휘했던 세계 최고(最古)의 민간 오케스트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찬란한 유산을 자랑하지만 음악성이나 자금조달에 있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이는 멘델스존의 오마쥬를 담아낸 '한여름밤의 꿈'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수작을 Decca와 함께 담아낸다.  이 앨범은 발간 당시 "우리가 기다려 온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세트"라는 찬사와 더불어 2007년 그라모폰지 선정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다. 특히 이 앨범은 Zimmerman/Rattle 의 브람스 협주곡과 더불어 최고의 브람스 협주곡으로 인정받는다. 

이 앨범으로 리카르도 샤이를 못만나게 될 아쉬움을 달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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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라이더 - 대한민국 세금의 비밀 편 프리라이더 1
선대인 지음 / 더팩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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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라이더(무임승차자)는 경제학적 용어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을 뜻한다. 쉬운 예를 들자면 단독주택이 있는 골목에 폭설이 내렸는데 10가구가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중 8가구에서 나와 골목의 눈을 말끔히 치웠다면 눈을 치우지 않고 골목을 이용하게 된 두가구는 프리라이더(무임승차)로 볼 수 있다. 무임승차자 문제는 주로 공공재(공공의 성격을 가진 물건이나 서비스)에서 발생하게 된다.
 

저자 선대인은 공공서비스라는 것으로 이 프리라이더를 설명한다. 길을 내고, 공원을 이용하고, 불이 나면 소방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공공서비스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뉴스를 보면 이 나라의 장관이라는 이들은 대체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고,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고 하는 삼성그룹도 세금 문제(이건희가 이재용에게 넘겨주면서 상속세를 내지 않았던)가 거론되고 있다. 그렇다고 장관이나 이건희 일가가 도로를 사용하지 않고, 치안서비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시민들의 세금으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이들에게도 공공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즉,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만을 누리고 있는 프리라이더(무임승차자) 인 것이다.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각종 국방과 교육, 건강보험 등 공공 서비스 혜택을 누리는 게 무임승차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같은 무임승차 문제가 만연하게 되면 그 국가는 재원 부족 등으로 적절한 수준의 공공재를 제공할 수 없게 되고, 종국에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세금을 내지 않는데 그치지 않는다. 2MB 정부에서 보듯이 탈세 등의 혐의가 있는 이들이 국가의 장관 등 국가를 운영하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세금을 흥청망청 써대고 있는 것인데 선대인은 그들이 어떻게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지 각종 자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현 정부의 세금이 많이 쓰이는 곳 중에 하나는 건설사업이다. 특히 4대강으로 대변되는 현정부의 방향은 건설이외에 아무런 정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데, 선대인의 지적에 따르면 이 4대강 공사의 입찰이 대기업의 나눠먹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최저가 입찰인데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이 적당하게 배분받는 것은 그들이 모종의 담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4대강 공사는 대부분 입찰 받은 시공사가 해당지역 모든 공사를 전부 다하는 턴키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턴키 방식은 대체로 3~40% 정도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다. 즉, 국민의 세금으로 대기업 배불리는데 쓰일 뿐이다.

근래에 이루어지는 많은 공사 중에 하나가 바로 민자방식이다. 국가예산이 아닌 민간자본으로 건설을 하여 국가 예산을 아낄 수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민자공사의 경우 수익이 예상에 못 미칠 경우 국가 혹은 지방정부가 손실을 보장해 주고 있다. 어떻게 하든 수익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업인 셈이다.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더 있다. 건설은 민간회사가 하지만 공사를 마치면 운영은 페이퍼 컴퍼니에서 이루어진다. 주로 대기업들이 자본을 댄 페이퍼 컴퍼니가 운영수익 및 손실에 따른 정부 보조금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법상 배당분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물리지 않고 있다. 페이퍼 컴퍼니는 말 그대로 실체가 없는 회사이기 때문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들에게 배당을 해버리면 끝이다. 돈은 벌지만 세금을 안내고 있는 것이다. 맥쿼리라 불리는 회사가 대표적인 페이퍼 컴퍼니이다.

 

이렇게 대기업에게 국민 세금을 가져다 주는 현 정부는 부자들의 감세까지 추진하고 있다. 실제로 종부세들은 세율이 낮아져 부자들의 세금을 낮춰주고 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상속세도 내지 않고 자식들에게 회사를 상속하고 있다. 법으로 정해진 세금을 내지도 않고 있고, 그 법 마저 바꿔 세금을 깎아 주는 것이 현 정부가 하는 일이다.

 

세금과 관련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가 내고 있는 세금이 3~40년 전 개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생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었고, 금융경제나 자본경제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세금수입이 주로 생산경제에 부과되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금융,자본경제가 생산경제의 몇 배에 달하지만 세금제도는 구식을 따르고 있어 생산경제의 세금이 몇 배에 달하고 있다. 특히 주식시장 활성화등을 위해 주식차액에 대한 세금을 물리지 않는 세금구조를 갖게 되면서 연봉 5천만원의 직장인은 정해진 세율에 따라 세금을 내게 된다. 보통 2백만원 정도의 근로소득세금에 이외의 세금 더 내게 될 텐데 주식으로 5천만원의 수익을 거둔 경우에는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부동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해진 기간 만 넘긴다면 별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봉급생활자에게는 쏙쏙 세금을 거두어 가지만 불로소득이라 할 수 있는 수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조금만 걷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평생 내는 세금은 약 5억 원에 이른다. 이 5억 원의 주인 노릇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이 돈을 제대로 쓰면 이 나라 경제에 활력을 주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이웃의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울수 있다. 우리 부모님들을 좀 더 편안히 모시고, 우리 아이들 교육의 질도 크게 높일 수 있다. 반면 이 돈을 잘못 쓰면 기득권의 배만 더욱 불리고 금수강산의 자연을 훼손하는 엉뚱한 사업들을 잔뜩 벌려놓게 된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이 고통 받게 되고, 많은 돈을 탕진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 나라가 잘 되기를, 삶의 질이 올라가기를 바란다면 이제 5억 원이 어떻게 걷히고 쓰이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시을 바탕으로 납세자 혁명에 함께 나서야 한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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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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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남과남 북과북에서의 전쟁을 마주하게 된다. 군이 아닌 민간인끼리의 학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쟁 중 전투와 상관없이 후방에서 사망한 민간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마을에서 어떤 전쟁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남과 북, 미국과 소련이라는 눈에 보이는 요소 이외에도 친일과 항일운동이 함께 내재되어 있고, 양반제도가 무너지는 과정과 신문명과 옛것을 추구하려는 전통과의 마찰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까지도 양반가문에 의해 마을이 좌지우지 되었다. 특히 소작문제는 한국전쟁 당시까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양반가문에 억눌렸던 머슴, 소작농 들이 인민군의 진주와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를 냈고, 반대로 국군의 재점령으로 반대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양반가문 사이에 잘 나가는 문파와 그렇지 않은 문파가 있다. 잘 나가는 문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자연스레 그들의 기득권세력을 유지해나갔고 자연스럽게 우익세력에 가담한다. 그런다 그렇지 않은 문파에서는 비교적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항일운동 및 건국운동에 앞장서고 인민군의 진주시 인민위원장 등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국군이 들어서면서의 상황은 뻔하다. 이 뿐만 아니다. 미국의 남한 신탁통치와 더불어 기독교가 자연스레 이승만 세력을 지원하는 우익의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한 공산군의 남한 점령은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이다. 특히나 기독교세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무속인들은 기독교세력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마찬가지로 국군이 점령하고 기독교는 굳건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런 사회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다섯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과연 남한내부에서의 전쟁이 어떠했었는지를.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학살 사건

서울경기를 제외하면 꽤 많은 씨족마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진도의 경우도 창녕 조씨나 밀양박씨에는 밀리나 임진왜란 이후 자리를 잡은 현풍 곽씨가 있다. 현풍 곽씨는 장파, 중파, 계파의 3개의 파를 이루어 X리에 자리잡았는데 일제시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 등이 중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에 반해 계파의 경우는 별로 세력을 갖지 못하면서 각 파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보도연맹 사건 때 였는데 계파 출신의 경찰에 의해 곽씨 일가 5명이 처형당하면서였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에 앙심을 품었던 좌익계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다. 경찰 가족에 대해 아이 부터 노모까지 처형하는 등 족보상 약 110명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좌익계열 들이 입산을 하고 남은 가족 약 20여명에 대한 보복 학살이 이루어진다. 각 파간에도 큰집은 우익, 작은 집은 좌익 등으로 구분이 되었기에 파 간 학살도 있었지만 크게는 중파와 계파간의 갈등이 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파는 흩어지는 등 세력이 약해졌고 인민군의 희생자였던 계파가 세력을 찾았다고 한다. 결국 남북간의 정치 갈등이 진도 X리 친족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고향을 등져던 부역자가 고향에 돌아오길 희망했지만 고향 측의 반대로 인근마을에 살았다고 하니 친족간의 갈등이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장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 마을의 시련

영암의 영보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의 동성마을이었다. 영보의 경우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져 1930년대에 영암공산주의자협회가 만들어졌고 소작이전에 따른 불합리한 소작에 항의한 영보농민시위 등이 일어났다. 영보 마을 역시 해방후 우익, 경찰에 의해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민위원들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영암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영보사람들은 화를 피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근처로 피란을 간다. 상황이 개선되면서 전원자수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해방후 인민군 점령시 일부 처형된 이들이 있긴 하였지만 근처 마을 구림과는 달리 학살은 없었다. 이는 일찍 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양성씨간의 유대관계가 좋았고 또한 농민시위에서 보여준 지도층 지도력에 양반,평민간의 관계 또한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근처 구림마을에서는 좌익에 의한 교회방화학살사건으로 우익 쪽 주민 32명을 학살하였고, 반대로 경찰이 진입하면서 마을주민에게 사격을 가해 7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림마을의 경우는 보수적인 양반동네라 평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고 이에 대한 보복이 일어난 것인데 이에 반해 영보는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다. 그렇더라도 사회주의라는 딱지에 의해 영보의 두 가문은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3장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군에서는 두 동족마을이 있었다. 진주 강씨의 A마을은 민촌(평민)마을이었고 B마을은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풍양조씨의 반촌(양반)마을이었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형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양반 출신들은 평민들을 하대하였고 조선시대 마냥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두 종족마을에서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어 B마을에서 A마을을 하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성격만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A마을은 사회주의 경향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데 반해 B마을의 경우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보수적인 색체가 강했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을 폭발시킨 것 역시 보도연맹 사건인데 보도연맹 사건에 A마을 4명이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A마을이 위상이 강해졌고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자 경찰과 A마을은 B마을을 포위, 연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A마을은 B마을의 물건, 집기 등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B마을 사람들이 돌아온 후에도 이런 약탈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갈등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홍수에 대한 두 마을의 필요에 의해 두마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게다가 학교에 가기 위한 나루터가 B마을에 있어 A마을의 현실적 필요도 관계 개선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두 마을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갈등이 증폭이 가져올 폐해를 깨달았다.

 

4장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당진의 합덕면은 특이한 갈등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사상의 갈등, 성씨간의 갈등, 지주-마름간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주중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재지주와 거주하지 않는 부재지주로 나뉘는데 부재지주의 경우 마름(소작농중에서 세우기도 함)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소작을 운영한다. 재지주의 경우 유연하게 소작 정책을 펼치거나 덕을 배풀기도 하는데 마름의 경우 소작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마름과의 갈등이 굉장히 컸다. 합덕면의 경우는 종교 갈등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천주교에서 H마을의 상당한 토지를 사들였는데 이를 소작을 하였다. H마을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한 조건에서 소작을 할 수 있었고 우익청년회가 조직되는 등 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보수화되었다. 반면 주변 Y마을의 경우는 종교-사상적으로 틀렸고 농수문제로 H마을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H마을을 습격해 신부 등을 압송하고(후에 처형됨) 주민 8명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자 Y마을 청년 모두가 H마을 청년단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합덕면에서는 이와 더불어 성씨간 갈등도 나타났다. z마을에서는 해주 오씨, 의령 남씨, 선산 김씨 등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 중 오씨가 영향력이 가장 약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남씨 일가의 남정갑은 면서기를 하며 징병,징용을 담당했고, 남정갑의 아버지는 일본인 부재지주의 마름노릇을 했는데 해방과 동시에 남정갑의 아버지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조리돌리기를 당했다. 서울로 피신한 남정갑 부자는 미군정과 함께 돌아와 조리돌리기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오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인민군이 진주하자 세상이 바뀌어 남정갑 등 남씨 일가를 처형하게 되는데 이에 오씨 일가 및 남씨일가의 머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이 바뀌어 선별된 부역자가족은 모두 쫓겨 나게 된다.

 

5장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금산군 부리면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두 양반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31년 부터 1960년까지 단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길씨와 양씨 중에서 면장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는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왔다. 일제시대 길씨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반면 양씨는 대체로 우익편에 있었다. 특히 길씨 중에서 주류는 우익에 길씨 비주류와 양씨는 우익에 대체로 섰었다. 보도연맹과 인민군 점령시 길씨, 양씨 일가 중에서 처형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고, 대규모 학살도 없었다. 이는 두 가문이 사돈으로 돈독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금이 간 사건이 발생한다. 길씨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인민군 후퇴 후 근처에서 빨치산이 되는데 1950년 11월 2일 우익을 중심으로 한 결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빨치산이 결의대회장을 습격해 78명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우익을 대변했던 양씨집안과 비주류 길씨 집안의 많은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길씨와 양씨간의 관계는 깨어졌고, 이후 길씨는 마을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된다.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에서 나오는 질문은 바로 '국가는 무엇했냐'이다. 실제 해방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형식적으로 남과북 각각에서 각 세력(이승만과 김일성)이 장악했지만 실제 마을 공동체까지 장악했느냐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따른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마을 내부의 권력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는 마을내부의 갈등을 이용 혹은 방치하여 마을 내부까지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남과 북 각각 인민위원회와 우익청년단을 이용해 마을을 단속하고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을의 문제 역시 제대로 된 국가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용납되기 힘들다. '평온하던 남한에 적화야욕의 북괴가 침략했다'라는 한국전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은 논의의 토대를 갖기가 힘들다.

이제 한국전쟁 60년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이런 작업이 보다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겁 없이 전쟁을 이용하려는 세력들(현 정권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행태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을 이용해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 생각에 국민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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