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 - 한국, 동서독,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공동기획 / 역사비평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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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생각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전후 약 2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에 객관적인 시선을 담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의 모습에 대한 말할 수 없었던 기억마저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책이고 기억해야 할 점을 짚고 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한반도내에서의 전투라는 내전의 성격보다 훨씬 크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소련과 미국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고 중국과 서구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국제전의 성격마저 갖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과정 그리고 전후에 있어 남북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사건이다. 2차대전 종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으로 나뉘어 체제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화정책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군사적 대결도 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련은 1946년 이란사태와 1948년 베를린봉쇄건을 통해 계속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애치슨 선언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남북한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중심부 즉,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주변부 한반도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무력대결을 통해 공산세력에 대한 저지의지를 강하게 보여준 셈이고 소련은 공산화전략에는 차질을 입었지만 중국의 확실한 등장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할 수 있는 세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구소련의 해체 전까지 있었던 냉전체제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엄청난 군비를 통한 군사적 대립에 해당국가에 대한 통제가 심화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북한이라는 대리전을 통해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발전을 막았던 계기도 된다.
 
남북한 내부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체제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남한이나 북한모두 불안정하게 정권을 잡았던 이승만, 김일성에게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김일성 역시 당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체제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산업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범적 대립장소가 되면서 남북한 모두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국가재정(수입)이 남한의 경우 1959년 52%, 북한의 경우 1955년 28%가 해외 원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중심의 남한의 경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했고, 상업자본이 발달했던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제의 반대하는 자본세력들이 제거되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사회를 규정하던 헌법의 변화는 남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났는데 균등경제의 정신을 담고 있던 1948년 건국헌법이 1954년에 이르러 시장경제 중심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즉, 남한은 1948년 건국보다는 1954년의 체제가 이후의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균등경제는 남한 내부의 지주, 소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중심의 재건을 원했던 이승만 정부의 생각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의 자유로운 투자를 위해 시장경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이승만정부는 균등경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현재의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기틀이 되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 현대가 모두 이 때 시작된 기업이라는 점에서도 현재의 남한 자본주의는 전부자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끼친 영향 중에 재미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분단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이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연대에 따라 비자발적인 지원을 북한에 하게 되는데 동독 기술자의 파견과 북한대학생 유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독기술자의 파견은 동독기술자들의 식민주의적 행태와 그런 행태에 대해 좋은 인식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북한내부사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북한의 대학생파견의 경우도 귀환한 유학생들이 전문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몇 몇 유학생들은 자본주의세계로의 탈출과 유학생을 따라온 동독여성들의 북한에서의 부적응 등으로 성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자극받은 남한은 서독에 견습생 파견 등 강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것이 바로 파독간호사와 광부이다. 그러나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이 실제 광부가 아니었다는 점과 서독 역시 당시 열악한 광산업을 대체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남한은 외화획득, 서독은 노동시장 안정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던 관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도 파독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에 이민을 신청하는 등 예상외의 결과에 직면하게 되며 모순에 빠진다.
한국전쟁 과정 역시 동서독에 영향을 끼쳤다. 동서독 양측이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독의 경우는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 서독은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내부적으로는 이런 경고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동독의 경우 전쟁위험이 개인주의적인 방어형태로 나타났고 서독 역시 전비증가에 대한 우려로 나타났다. 약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한국전쟁을 체제경쟁과 무력통일이 갖는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갖게 되었고 느슨한 대화의 끈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전후 남한사회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공의식에 의한 자기통제 매커니즘이 발동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되었는다. 이런 반공규율사회를 지속시키위해서는 지속적인 전쟁의 기억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가의 공식기억만이 필요했다. '잊지말자 6.25','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표어아래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논의도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직후 이를 위한 전쟁기념물 충혼탑 등 건립이 줄을 이었고 박정희 정권 후반, 전두환 정권 초반인 1977년 부터 1981년까지 한국전쟁 전적비 등이 수없이 세워진다. 전쟁에 대한 공포의 기억을 강화해 안보체제 정당성을 확보해 강도 높은 사회통제를 위해서였다. 이런 공식적인 강제 기억의 정점은 1994년 문을 연 전쟁기념관이다. 1988년 계획된 전쟁기념관은 전후세대들의 6.25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6.25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반공안보관 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가에 의한 강압된 공식기억은 90년대 후반 들어 노근리사건 등 비공식기억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2MB 정부 이후 반공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고 있다. 특히 보수세력에 의해 진행되는 이런 과거로의 회귀로의 뒤에는 일본 극우세력과의 관계가 의심받을 정도여서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후퇴시키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 및 현재까지의 영속성을 잘 살피고 있다. 당사자의 경험에 의해 제한된 논의의 경계를 풀어헤침으로 앞으로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을 희망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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