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자체가 쉽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은데 죽음에 대한 부분 역시 어렵다. "삶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으므로[生卽死],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이 삶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된다.[死卽生] 즉 죽음이 필연적일 수 바에 없는 삶의 실상을 아는 것은 곧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는 생즉사 사즉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95쪽) 생과 사를 동일시 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생과 사가 서로 구분되므로 괴롭고, 번뇌가 생긴다. 그래서 생과사를 동일하게 여기게 되면 번뇌의 원인이 사라지는 無常, 無我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의 수련을 통해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불교에서는 죽음 역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다른 종교에서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공포를 통해 절대자에게 의지하도록 한다면 불교는 개인의 수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게 하는 것 같다.
불교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먼저 눈에 들어온 부분은 49재에 대한 부분이다. 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기는 한데 죽은 후에도 칠일이 지나면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갖게 되는데 그 최대기간이 칠칠일(49일)로 본다. "대승불교의 범망경에서는 "부모나 형제나 화상이나 스승이 죽으면, 그 날은 물론 삼칠일(21일)이나 칠칠(49일)일에도 마땅히 대승의 경전과 계율을 독송하고 강설하는 경건한 모임을 가져 복이 도래하길 구하고 좋은 삶을 얻길 구하라"(84쪽) 49재는 불교의 바탕위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불교가 아닌 무교, 기독교(카톨릭 포함)에서도 많은 이들이 49재에 모여 별도의 예를 차리는데 불교의 영향을 받을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