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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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破戒)>는 걸작이다. 1906년 작품이니 1887년 첫 근대소설이라는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浮雲)>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 20년 사이에 누가 있었나? 소설엔 모리 오가이와 다야마 가타이가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근대문학의 문호로 추앙받는 작가이다. 낭만주의 계열의 소설을 주로 썼는데, <무희(舞姬)>와 <청년(靑年)>이 대표작이다. 다야마 가타이는 자연주의 문학을 주창한 작가이다. <이불(蒲團)>이 대표작이다. <이불>이란 소설은 꽤 문제적인데,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 무렵의 일문학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메이지 20년대 초에 씌어진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 쪽이 훨씬 나중에 씌어진 소설보다 더 서양적인 의미의 소설을 실현했으며, 그 후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에 의해 방향이 비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대충 이상이 문학사의 상식이다.('고백이라는 제도')  
   

  가라타니가 말하는 '비틀어짐'은 일본근대소설의 주류인 사소설의 효시가 바로 <이불>이라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불> 이후 사소설은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지금까지 일본 소설의 주류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계>의 존재는 기이하다.  

  소설의 대종은 이렇다. 교사 세가와 우시마쓰는 백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백정임을 절대 밝히지 말라는 계율을 남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우시마쓰가 백정 출신임이 밝혀지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소설의 제목은 계율을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파계'이다.  

  신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이 이 시대에 나올 수 있음은 대단한 것이다. 20년 후에야 계급주의 소설인 <게공선(蟹工船)>(고바야시 다키지)과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미야모토 유리코)가 나오니 말이다. 해서 나프문학(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쪽에선 <파계>를 사회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럼, 이 소설은 완벽한가?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두 가지 정도 흠을 잡겠다.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우시마쓰는 어디로 향할까? 자신의 사상적 은사인 렌타로의 유골을 들고 도쿄로 향하는 우시마쓰인데, 이후 그는 오히나타를 따라 미국 텍사스로 향한다. 신분에 따른 박해가 없는 미국으로 향한다는데, 이 모습은 낯이 익다. 이광수가 <무정(無情)>의 끝을 이형식의 시카고행으로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도 고향에선 핍박받는다'던데, 계몽적 지식인의 도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또 하나는 이런 대목이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말한다. "집안의 조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도 그때였다. 도카이도 연안에 사는 많은 백정 종족처럼,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또는 이름도 모르는 섬에 표착하여 귀화한 이방인의 후예와는 달리 ....... 가난하기는 해도 죄악으로 더럽혀진 가족은 아니라고 했다."(16면)  
   

   재일 조선인을 '죄악으로 더렵혀'졌다고 말하는 작가이다. 작가가 백정 신분에게 동정심을 쏟듯 같은 처지의 재일 조선인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한다. 일본 사회에서 신분의 문제가 이제는 많은 부분 해결되었지만, 재일 조선인 문제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작가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파계>에서 가졌던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하는데, 특히 <집(家)>(1911)을 보면 그렇다. 자연주의 문학이 더 이상 사회에 대한 관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사소설로 귀결되는데 작가 역시 적은 몫이나마 하게 된다.

 

              島崎藤村(1872-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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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문학 계보가 한눈에 보이는 군요. 소세키를 읽으면서 <청년> <이불>등을 찜해두었는데 아직 근처에도 못가보고 있어요. 차츰 리뷰의 내용이 길어져서 제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0:52   좋아요 0 | URL
대학 때 아주 오래된 번역으로 봤던 소설인데, 새 번역으로 읽어봤어요. 옛 번역은 세로판이었는데요. 리뷰 적어보며 대학 때 들었던 일본근대문학사 수업도 떠올리며 문학사 책도 좀 찾아보구요. 제게도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청년>과 <이불>은 번역이 되어 있죠. 특히 <이불>은 사소설을 알아가는 데 지침이 되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론 후대 소설가들이 이 소설을 오독하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쏙 가져간 듯도 하구요.
언제고 읽어보시면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루쉰P 2010-10-2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읽으며 사실 파고세운닥나무님께서 언급한 부분은 주의 깊게 읽지를 못 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자신의 신분에 괴로워 하며 몸부림치는 묘사가 너무나도 신랄하여 거기에 흠뻑 빠져서 읽었습니다. 저는 주로 독서가 감정 몰입적인 경험이 있어 저런 부분들에 대해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기사 <파계>의 결론이 사실은 자신의 은사처럼 사회를 향해 외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서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나쓰메 소세키 역시 신문 기자로서 조선도 여행을 한 사람 이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문제에 대해서는 죽는 날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죠. 일본 근대 문학가들의 한계는 거기인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는 점 말이죠. 근데 한국의 작가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고민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8:03   좋아요 0 | URL
지금에 와서야 현실도피라 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신분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용기만으로도 <파계>는 걸작이라는 말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스타일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따지기를 좋아해 저렇게 적어 본 거구요.
일전에 <요코 이야기>라는 소설 때문에 꽤 시끄러운 적이 있었죠. 한편으로 부끄러웠던 게 한국 문학도 일본인을 비하하는 데 만만치 않은 노력을 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본인이 가해자는 아닐 뿐더러, 작품을 대하는 한국인들이 필요 이상의 반일 감정을 갖는 것도 경계해야 하니까요.

다이조부 2010-10-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기존의 전집류와는 전적으로 다른 기준으로 책을 선정하나봐요?

주는 거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이지만 참 이 출판사는 얄미울 정도로 장사를 잘한단

말이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30 09:17   좋아요 0 | URL
전집 편집자 가운데 일문학자인 박유하 교수가 있는데, 이 분이 일본 소설을 전집에 많이 넣는듯 해요. 여타의 세계문학전집보단 일본문학이 많죠. 중문학이 전혀 없어 아쉽지만요.
그거 제외하곤 크게 다르지는 않은듯 해요. 늘 번역되는 작품 다시 하고 말이죠. 타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들 다시 살리기도 하고 말이죠. <킴>처럼 안 넣어도 되는 소설을 넣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론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좋아합니다.

소나무 2021-04-0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년이 지났지만 잘 읽었습니다.
 
갈증이며 샘물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22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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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강연회에서 정현종 시인은 가스똥 바슐라르와 파블로 네루다를 에둘러가 자신의 시론(詩論)을 말하고 있다. 바슐라르와 네루다를 함께 틀거리지을 수 있는 건 뭘까? 개인적인 생각은 '가벼움'이 아닐까 한다. '공기와 꿈'을 말하는 바슐라르다.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던 네루다이다. 바슐라르와 네루다에서 보여지는 가벼움은 경박함과는 다르다. 마음은 충만하되, 몸은 날래다.  

  정현종의 시도 가볍고 날래다. 그는 시가 서정일 뿐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정현종의 시는 시답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날랜 시 한 편이다.

   
 

 <날아라 버스야>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야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버스 차체도 가볍게 날려 버리는 정현종이다. 날랜 우리 시인은 인간이 갖는 가장 무거운 질문인 죽음에 대해선 어찌 생각할까? 강연회에서 사회자가 정현종에게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시인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날랜 우리 시인이 죽음이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선 멈칫하고 있다. '잘 모르겠'다니 좀 더 알게되면 그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 언제쯤 정현종의 전언을 무거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현종(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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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이었던 제 아들이 엄마 생일 선물로 사다준 첫 시집이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였어요. 왜 이 시집을 샀느냐고 물었더니 제목이 멋있어서 샀다고 하더라구요. 10여년이 지난것 같은데 저는 아직도 이분과 친해지지를 못햇어요. 좀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6 10:33   좋아요 0 | URL
아드님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네요^^. 시집을 주고 받는 모자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지네요.
저도 집에 정현종의 시집이 몇 권 더 있는데, 잘 안 읽어요. 실은 그리 좋아하는 시인도 아니구요. 요번에 강연회에서 강연을 들은 기회로 뽑아들어 봤어요. 좋은 시간이 되었구요.
 
창작과 비평 149호 - 2010.가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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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준필의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현재성과 문제성>을 읽었다. '리얼리즘론'에 대해 말한다지만 내겐 '백낙청 소론'으로 읽혔다. "문학엔 서사도 없어지고 비평도 사라졌다."는 한 언론인-김선주-의 말처럼 비평의 의미를 묻기 힘든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서 40년 가까이 문학자와 비평가로 살아가는 한 문학인에 대한 후배 문학자의 경모가 글 사이에 숨어 있는 듯 하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방법론으로 확장되고 '지혜의 시대'를 열어가는 데 밑절미가 된다는 게 소론의 요지일 듯 하다. 그런데 확장과 밑절미가 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류준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선 백낙청의 원불교 수련과 로런스에 대한 공부를 언급해 주었으면 했는데 없어 아쉬웠다. 백낙청은 90년대 중반부터 원불교에 관련한 글들을 써온 걸로 아는데 류준필의 눈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나 보다. 또 리얼리스트 로런스가 <묵시록(Apocalypse and the Writings on Revelation)>을 썼던 걸 생각하면 평생 로런스를 공부했다는 백낙청의 지금 모습이 그리 기이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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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지 2010-10-22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론인에게 진중함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문학의 가능성에 자기 삶을 바치는 작가와 비평의 재생을 꿈꾸는 이론가들이 매진중인데... 그런 소중하고 묵묵한 노력들을 귀하게 여기고 의미화하는 글들이 오히려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선생이 그런 종교적 이력을 갖고 계신 줄은 닥나무님 덕에 알게 되었네요.. 과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닥나무님께선 남다른 고증가적 안목이 분명 있으신 듯^^!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3 00:43   좋아요 0 | URL
김선주 기자 칼럼은 경박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는 거였어요. 문학도 그리 변하는 걸 아쉬워하며 쓴 대목인데,저 부분만 따오니 그리 읽힐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종교가 있어서인지 어떤 종교든 종교에 관심이 있는 문학인을 보면 반가워요. 백낙청 선생은 원불교 경전을 영역하기도 했다고 해요. 본인은 겸사로 부인만 따라 다닌다지만 그 공부와 수련이 만만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이 좌파 비평가들의 눈엔 거슬릴테구요.
강성좌파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이 근래 신학과 관련한 책을 많이 내던데요. 한 비평가는 그 현상을 두고 '신학의 귀환'이라고 말하더군요. 동양의 종교든,서양의 종교든 문학과 종교에 대해선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2010-10-25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5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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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간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77-78면)

 
   

 <휴전(La tregua)>은 아우슈비츠에서 구조된 프리모 레비가 이탈리아 집으로까지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수기이다. 서경식은 이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에서 <휴전>을 '자전적 소설'이라 말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휴전>과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지금이 아니면 언제?(Se non ora quando?)>를 함께 읽었는데 뒤의 책은 소설이 맞겠다. 소설이 워낙 잡식성이긴 하지만 <휴전>은 기록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더 강한 듯 하고, 아우슈비츠 기록인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e' un Uomo)>의 속편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산문으로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작가가 책의 제목을 가져온 부분이기도 하고 이 책의 주제가 담긴 부분이기도 하다. 레비와 대화를 나누는 모르도 나훔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리스인이다. 이 리뷰를 쓰기 전 읽었던 블로거 'bari_che'님의 서평은 나훔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의견에 몇 마디를 보태본다. 나훔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로 <나훔서>의 저자이다. 그는 당대의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가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의 신에게, 그는 이스라엘에겐 구원을 적국엔 벌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고 있기도 하다. 나훔이란 이름은 '위로하는 자'란 뜻이다.  

  레비는 왜 이 그리스인에게 나훔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내 생각에 <휴전>의 나훔 역시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 선지자이다. 미래를 먼저 보고 아는(先知) 이가 선지자라면 분명 그의 예언은 정확하다. 전쟁은 진정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레비의 비극적 세계관이 나훔에게 덧씌워지는 걸 확인하는 대목이다. <구약성경>의 나훔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시다. "유다야, 적의 병력이 아무리 많고 강하여도 내가 낫질하듯 없애버리리라. 이제까지 나는 너를 너무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너희를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 야곱의 포도덩굴. 그 이스라엘의 자랑을 적들은 짓밟고 털어갔었다. 그러나 야훼께서 그 포도원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나훔서> 1장 12절, 2장 3절) 악의 화신인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야훼인데 <휴전>의 나훔은 전혀 그렇질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라거-강제 수용소-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모르도 나훔-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2년에 대해서는 나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78-79면)

 
   

  전쟁은 늘 있다. 악의 화신 역시 심판받지 않고 늘 있을 뿐이다. 괴물도 늘 있다.  레비는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도 남긴다. “괴물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아 그리 위험하지 않다. 실제로 위험한 것은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평범한 기계적 인간들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인 한 전쟁은 늘 있다. 나훔이 레비에게 아우슈비츠의 2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아우슈비츠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종전이 아니다. 휴전일 뿐이다.   

  악의 도시 니느웨를 향해 선지자 나훔은 저주한다. "피로 절은 이 저주받을 도시야. 협잡이나 해먹고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그치지 않더니. ... '나 이제 너를 치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 네 상처는 나을 길이 없고 얻어터진 자리는 아물 길이 없다. 내내 너의 행패를 당하던 사람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손뼉을 치며 고소해하리라." (<나훔서> 3장 1절, 5절, 19절) 레비는 자신에게 지옥을 보여준 독일이란 나라의 한 도시 뮌헨-그에겐 현대판 니느웨가 아니었을까?-를 보고 무어라 말할까?  

   
 

독일의 한 자락을 느낀다는 사실은 피곤함에 더하여, 견딜 수 없는 초조함과 좌절과 긴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심정을 가중시켰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322-323면)

 
   

  니느웨를 향하여 심판을 말하며 저주를 퍼붓던 나훔은 행복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진정 위로하는 자였다. 우리의 모르도 나훔과 프리모 레비는 위로하는 자일 수 없다. 위로의 내용은 거짓이고, 하여 그 위로는 기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는 그저 수인번호 174517의 비명을 듣고만 있다. 비명은 독일인이 질러야 하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묵하고 깔끔한 독일인들은 침묵을 지키고 레비의 팔에 새겨진 지옥의 번호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지옥을 보았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지옥과 괴물은 없고, 전쟁은 끝났다는 저들의 완고한 침묵 앞에 레비는 자살로 몸소 외쳤다. 지옥에서 돌아온 지 40년이 지난 후였다. 

 

                        Primo Michele Levi(1919-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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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0-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미씨의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도입부의 글은 기독교사상 인가 하는

잡지에 기고한 글이어서인지 읽기 조금은 버거운 감이 있는데 책의 모든 글이 난해하지는

않겠죠.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9 18:12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좋은 책을 공유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루쉰P 2010-10-2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파고세운닥나무님이 프리모 레비를 좋아하실 줄이야! 저도 저 책을 지금 사려고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팬이거든요. 저도 그의 책은 번역되는 족족 사서 읽었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는 프리모 레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좀 읽기가 어렵더군요. 뭐랄까 레비의 말하고 싶은 바가 소설로 표현돼 있어서 그런지 그의 강렬한 기억이 많이 안 읽힌다고 할까요? 암튼 레비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왜 자살을 택했는지 그것이 서경식의 책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가장 안타깝기도 하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5 00:42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읽으며 비슷한 생각 했어요. 아무래도 수기 형태의 글이 제겐 더 다가오는 듯해요.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대해선 서경식 선생이 언뜻 짐작을 하며 얘기를 꺼내긴 하죠. 저도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가졌던 의사소통의 불능이 아니었을까해요. 서경식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교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인데 더이상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상상하며,공감해주지 않고 마치 없던일인양 잊어버리라고 말하는게 고통스러웠을듯 해요.
짐작만 해봅니다. 자살 한해전에 펴낸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 책을 접하면 실마리를 찾을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루쉰P 2010-10-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보고 싶군요. 레비가 자살한 것이 어찌보면 현대인의 이기주의에 지쳐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님의 글을 보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 참 말은 쉬운데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신을 단련해야 할까요? 게다가 자신이 고통을 겪지 못하고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레비가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책이라.. 참 읽고 싶네요. 서경식 교수의 책도 남김 없이 사 읽었는데 뭐랄까 초창기에 쏟아 지는 책들에 비해 요즘 나오는 책은 좀 어렵고 난해하다고 할까요? 서경식 교수의 글도 레비의 글과 흡사한 면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논리적인 글과 수필적인 글이 옷이라면 아무래도 서경식 교수나 레비는 후자의 옷이 어울리고 더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 옵니다. ㅋㅋㅋ 그냥 개인적 소견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5 18:12   좋아요 0 | URL
그 책의 제목이 아마 <구조된 자와 가라앉은 자>인데, 돌베개출판사에서 계약해 출간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아요. 서경식 선생과 프리모 레비가 닮은듯도 해요. 사랑하고 좋아하면 닮아간다는데 레비의 문체를 서경식 선생이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레비가 특히 상처받은 건 독일인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직 자신은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이젠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자살로 소리를 쳤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창동의 영화 <밀양>과도 비슷하죠.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용서받았다며 해방감을 느끼니 말이죠.

루쉰P 2010-10-27 19:4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돌베게에서 계약을 맺고 출간 준비를 하고 있군요. 정말 좋은 소식만 주시니 감사하네요. 레비는 독일인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비 생존 당시 유태인 나라 건설이라는 목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나치가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을 레비는 지켜 봤으니까요. 말을 해도 글을 써서 알려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힙니다. 가해자가 용서받았다며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종류겠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8 01:04   좋아요 0 | URL
레비의 또다른 책인 <멍키 스패너>도 계약해 번역을 준비중이랍니다. 제목을 보니 레비의 전공을 살린 작품이 아닐까 해요. 기계화된 인간을 다루지 않을까 싶구요.
레비가 인간 모두에게 실망했으리란 말씀에 동의합니다. 레비의 표현처럼 괴물 밑에서 얌전히 일만 해대는 기계적 인간이 많아짐을 그는 두려워 했을 거예요. 그의 메시지가 어느 순간부터 전해지지 않자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했으리란 생각을 해 봅니다.

루쉰P 2010-10-29 17:38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빠른 시간 안에 레비의 책들이 빨리 출판 됐으면 좋겠네요. 너무 기다려 지네요. 어찌보면 홀로코스트라는 상징이 이 세상 어디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읽혀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고등학교 때 실업계를 나았습니다. 거기 급훈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였죠.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반어적 표현을 쓴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요? 레비의 책은 읽을 수록 더 반복해서 읽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작가구요. 파고세운닥나무님 덕분에 왕창 좋은 소식 많이 얻어 갑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8:09   좋아요 0 | URL
근래 일과 노동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수용소에 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노동의 끝은 죽음이죠. 그 수용소에서 노동을 열심히 하다보면 다치거나 아파 노동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죠. 노동의 끝은 자유가 아닌 죽음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저 구호를 믿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유를 얻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건 자유가 아닌 죽음이 아닐까 해요.
참 어려운 문제이죠?
 
7기 인문 B조 마지막 도서 :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
앤서니 루이스 지음, 박지웅.이지은 옮김 / 간장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이다.  

   
  의회는 국교를 설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을 금지하는, 그리고 의사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또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회동할  수 있는 권리와 불만사항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귄리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도 만들 수 없다.  
   

  제1조를 비롯한 수정헌법의 첫 10대 조항은 1789년에 발의되어 1791년에 비준되었다. 수정헌법은 일명 귄리장전으로도 불리는데, 1787년 미연방 헌법에는 귄리장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귄리장전이 추가되는 2년 사이 격렬한 논쟁이 인다. 논쟁은 이런 것이다. 연방헌법을 기초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임스 매디슨 같은 사람은 헌법에 실린 다른 조항들-이를테면 정부의 권한-이 소홀히 여겨질까 걱정했다. 반면 권리장전의 도입을 주장한 사람들은 정부의 과도한 권한을 우려하며 시민의 권리를 옹호했다. 2년 사이 이들이 했던 논쟁은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Freedom For The Thought That We Hate)>에서 말하듯 2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미국 헌법에 대해선 <페더랄리스트 페이퍼(The Federalist Papers)>를 읽으며 잠깐 공부한 적이 있다. '연방주의자 교서' 정도로 번역될텐데 미국에선 독립선언문, 헌법과 더불어 미국 정치사에 있어 가장 권위있는 글로 여겨진다. 제임스 매디슨과 더불어 알렉산더 해밀턴과 존 제이가 작성한 글인데 정부의 구성과 권한에 대한 교서이다. 앞서 말한대로 연방헌법의 기초가 되는 이 책엔 의사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의 저자 앤서니 루이스는 연방헌법 제정 이후 수정헌법 제1조가 명시한 의사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미국 사회가 어떻게 운용하여 왔는지 보여준다.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우리 역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 자유를 위해 싸워왔기 때문이다. 힘겨이 얻어낸 자유가 쉽사리 사라지는 모습을 나만이 자주 목격하는 것은 아닐테다. 앤서니 루이스가 지적하듯 "의사표현과 언론의 자유는 외면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자유이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는 곧 사상의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두식 교수가 한 강연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표현의 자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심는 거예요. 이 말 하면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누가 명예훼손 당했다던데. 표현의 자유라는 건 정부와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자기 마음안에 있는 두려움과의 싸움이구요." 결국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구속은 우리 내면의 사상도 스스로 검열하게끔 한다. 진정 두려워 할 것은 자신에 대한 검열이다. 스스로 하는 검열 앞에선 헌법이고 무엇이고 없다.

 

        Anthony Lewis(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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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에 대한 정의부터 하고 들어가는 우리나라 헌법과는 참 다르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7 10:18   좋아요 0 | URL
본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미국 헌법의 역사는 정부(국가)의 권한과 시민의 권리간의 싸움인 듯 합니다.
미국 헌법 제1조에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를 명시하는 건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삼권 분립과 더불어 정부의 권한 역시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이니까요.

다이조부 2010-10-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두식교수 강연회가 있다길래 신청은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며칠전에 삼성을 생각한다 를 읽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책인데도 완독하는데는

며칠 안걸리더군요.

아참~ 혹시 2008년 문학동네 겨울 호 시간 나시면 한 번 보세요. 김종철선생이랑

이문재씨가 대담을 하는데 주인장이 생각나더군요. 2년 이라는 시차에도 여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7 13:12   좋아요 0 | URL
이문재씨는 생태시도 쓰고 하니까 대담의 상대가 될듯 합니다. 한번 찾아볼게요^^
김두식 교수가 학기중인데도 강연을 많이 하는군요? 책도 그렇지만 강연도 참 위트 있고 재미있던데요^^ 좋은 시간이 될듯 합니다!

다이조부 2010-10-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녹색평론 작년 7~8월 호를 보는데 박경미씨의 글을 봤습니다.

주인장을 통해서 알게된 사람의 글이라 꼼꼼히 봤는데,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8 11:13   좋아요 0 | URL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저는 박경미 교수가 번역한 책들도 한 번 찾아 읽어보려 합니다.

다이조부 2010-10-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외수의 책을 읽었어요.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중국에서 다년간 공부를 하고 돌아온 아들놈을 보면 혹시 저 자식도 짝퉁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길 때가 있다"

중국은 정말 짝퉁의 천국이라고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을 종종 접하지만, 이 대목에서

불편한 감정이 들더군요. 대학시절에 한창 인기 좋던 괴물 을 읽어봤는데 이건 뭥미

싶더군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0 13:07   좋아요 0 | URL
그러잖아도 중국산 치킨 관련해 이외수씨가 회자되더군요.
작가로서 갖는 이외수씨의 염결함은 존중하지만, 제겐 그의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아서요. 실은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어요.
말씀하신 대목은 저도 좀 불편하네요.

비와구름 2010-10-2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외수 작가가 염결하다.. 이외수 작가의 과거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신것 같습니다. 여학생들과 모텔을 전전하며 대마초를 하던 사람이 이외수 입니다.
언제부턴가 그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작품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 시작하더군요.
대작가라는 이름아래 지자체에서 집과 작품활동에 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TVCF활동 까지 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선행에 대한 소식은 없는 반면 인터넷 누리꾼들이 관심가질 법한 뉴스에는 꼭 트위터나 뭐다 해서 이슈를 남기려 하는 듯 보이더군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6 21:59   좋아요 0 | URL
'작가로서'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말이죠. 그가 글에 대해 갖는 신념의 염결함을 말하는 거였어요.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선 알지 못하구요.
몰랐던 사실을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