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 사전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8
한소공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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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오 사전(馬橋詞典)>은 중국현대문학사에서 꽤 중요한 작품이다. 소설은 1996년에 발표되는데, 작가는 80년대 중반부터 '뿌리찾기(尋根) 문학'을 주장한다. 뿌리란 민간과 민중의 전통이란 의미겠다. '죽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던 중국이다. 10년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휩쓸고 간 중국이다. 80년대 중반에서야 작가들은 어느 정도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문학적 실험을 해갈 수 있었다. 몰래, 몰래 읽어오던 세계 문학으로부터 받았던 자극들이 소설의 갱신을 부추기기도 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이 영향을 미치는데, 마르케스 등이 보여준 마술적 리얼리즘은 표현은 새롭되 소재는 민족의 것을 취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케 한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여준 동양적 소재의 소설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작가 위화는 자전적인 글에서 가와바타의 소설을 젊은 날 탐독했다는 얘기를 한다. 장이머우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붉은 수수 가족(紅高梁家族)>(모옌)도 뿌리찾기 문학 계열로 분류한다.  

  소설의 배경인 마차오는 초나라의 굴원이 유배된 후 투신한 멱라강 주변에 위치한 곳이다. 벽촌이라 인근 마을과의 교류도 흔치 않다. 소설의 화자는 문혁 시기에 이 곳으로 와 지식청년으로 일한다. 화자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기이하기만 하다. 행색 뿐 아니라, 독특한 말들이 귀에 박힌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깨어나다(醒)'는 이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어리석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서 투신한 굴원은 <어부사(漁父辭)>에 이런 글을 남긴다. "중인(衆人)이 모두 취해 있는 가운데 나 홀로 깨어있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굴원을 보면 깨어있음이 어리석은 게 되고, 취함이 오히려 지혜로운 게 된다.  

  삶(生)과 관련한 말들도 특이한데, 남자 서른 여섯살과 여자 서른 둘을 이들은 만생(滿生)이라 부른다. 살 만큼 살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이를 먹으면 천생(賤生)이 된다. 가장 고귀한 삶은 귀생(貴生)이라 하는데, 여자 열여섯, 남자 열여덟 이전을 말한다. 이후의 삶은 일과 결혼으로 고되니 이때까지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마차오 사람들의 현실주의나 이기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통스런 중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그리 박대할 일도 아니다. 국가와 관은 언제나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였고, 그들은 그 와중에도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어갔다. 변덕스런 관에 맞서는 변치 않는 그들의 지혜가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한샤오궁은 근대 중국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狂人日記)>로부터 시작되는 비판정신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혼합해 재미 속에 날카로운 비판을 숨긴 소설을 보여준다. 희로애락이 섞인 마차오 사람들의 말들을 새기며 나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시간을 가졌다.

  

                      韓少功(1953-)

着語 : 책의 이름을 <마교 사전>이라 했는데, 마교는 지명이니 '마차오'라고 표기하는 게 맞겠다. 작가 이름도 '한샤오궁'으로 쓰는 게 맞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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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7-2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닥나무님 덕분에 제 문학적 영토가 점점 넓어지는 기분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6 22: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중국현대문학은 제 전공인데, 번역물이 너무 적습니다. 한국에선 중국의 인기 작가라 할 만한 사람도 없지만 루쉰과 위화 정도를 제외하곤 전작품이 번역된 경우도 없구요.
중국문학에 대한 인상은 저 역시 재미 없고, 촌스럽다는 생각이었어요. 체제도 다르구요. 그런데 문학은 어딜 가나 인간의 얘기잖아요? 위 리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도 마차오 사람들 같은 시대를 보냈고, 해서 공감할 부분이 있는거구요.
중국현대문학 읽어보실 계획이라 하셨는데, 저도 같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지 2010-07-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나무님 서평을 읽고 옛날에 신주처럼 모시던 굴원시집을 찾았더니 없습니다...^^ 저도 닥나무님처럼 잃어버린(아니, 저의 경우 내다버린) 기억을 찾아 헌책방순례를 시작해야 하려나 봅니다. 좋은 데 추천 좀 해주시지요..
중국어 표기 관련 여쭤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꼭 원음대로 표기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자문화권에서 살았고, 마오쩌둥보다 모택동이 표기와 전달에서 더 쉽습니다. 그런 실용적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한글이란 것이 중국말과 한국말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에 충실한 일종의 지역어로서 만들어진 것일텐데요, 우리가 한자를 한글식으로 전용해 온 역사에는 꽤 흥미로운 측면이 많이 있거든요... 통일보다 병용은 어떨까요? 하나에 대해 다른 하나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밝히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문화사적으로 꽤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문 표기에서는요. 고유명사는 좀 달라지나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6 23:10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는 통상 1911년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한글한자음으로, 이후는 현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합니다. 신해혁명을 중국 근대의 출발로 보기 때문이구요. 기점을 달리잡는 시각도 많구요. 그런데 이 기점이 좀 불편한 게 지명은 그렇다 쳐도, 인명 같은 경우는 사람의 삶이 장시간인데 어디를 기준으로 할 지 어려워지지요. 그리고 긴 기간을 다루는 문학사 같은 경우는 같은 지명을 달리 표기해야 할 경우도 생기니 하나로 통일해서 표기하기도 하구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원칙은 아니고 통상 이런 방식으로 표기합니다.
말씀하신 한글과 한문의 문제는 새겨들을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오쩌둥을 예로 드셨는데, 리영희 선생은 루쉰이 아닌 노신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고 줄곧 주장하시구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문문화권에서 문화로만 중국을 대하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좀 다르다고 봐요. 이전보단 중국과 중국어, 중국 문화가 실용적 의미를 더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중국어 발음 표기도 유용하다는 생각이구요. 李白을 이백이라 하지 않고, 리빠이라 표기하는 건 문제구요. 여담인데 이백의 시대엔 이백이 자신의 시를 읊는 소리와 우리가 현재 그의 시를 한글한자음으로 읊는 소리가 거의 비슷할 거라고 합니다. 재밌는 게 우리는 한자의 원 발음을 많이 유지하고 있는데 현대 중국인들은 상당히 다른 발음을 하고 있는거죠. 어학 수업에서 들은 얘기에요^^
쓸만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미지 2010-07-2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거 재밌는 얘긴걸요... 생각에 또다른 방향이 덧붙네요... 그, 저는 이백이나 두보 시를 한글한자음으로 읽으면서 이걸 그 리드미컬한 중국어로 읊으면 맛이 또 다르겠다는, 더 멋질 거라는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요. 한글이 탁월한 발음 기호인 것은 분명한가 보군요.

이것도 여담이지만, 저는 의미와 소리 사이의 차이를 우리가 언어, 문화적으로 계속 유지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이긴 합니다만..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3:27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의견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시대착오적이진 않구요^^

루쉰P 2010-11-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뒤지다 보니 제가 읽고 싶은 서적들이 나오는군요. 하기사 루쉰 선생 보다는 노신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강렬하고 확 와 닿거든요.^^ 저도 표기명을 바꿔야 할 듯 합니다. 괜히 루쉰이라고 했네요. 닥나무님의 말씀을 들으니 굳이 루쉰이라고 표기를 하지 않아도 될 듯한데요. 더 와 닿는 표현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1-08 19:18   좋아요 0 | URL
닉네임을 바꾸셨군요?
장단이 있을 듯 합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닌듯도 하구요.
 
<마을이 학교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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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가게'를 가는 일이다. 내가 가는 곳은 주로 헌책을 취급하는 곳인데, 지닌 책을 기증하기도 하고 책 구경도 한다. 기증하는 책에 비할 때 사오는 책이 많아 집안의 책은 점점 늘어만 간다. 아름다운 가게를 드나들며 설립자인 박원순이란 사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마을이 학교다>와 함께 출간된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에서 저자는 자신이 시민운동가가 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아주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평생 농사를 지어 우리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죠. ...... 저는 한때 일류학교를 나오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검사를 했습니다. 변호사를 개업한 뒤 제법 돈도 벌었고 집도 샀습니다. 탄탄대로가 열려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그 길은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내 집을 키워가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별장을 사고 은행에 두둑한 통장을 두는 것은 하나의 탐욕의 길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가난하고 억울하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부축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있고 재미있는 길이었습니다."  

  박원순을 생각할 때면 늘 조영래 변호사가 겹친다. 두 분은 막역한 사이이기도 한데, '망원동 수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함께 변론하며 조영래 변호사의 마지막 10년을 동행했다.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추모글('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에서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5공의 엄혹한 군사독재정권과 민주화의 이행기라는 시대 상황은 조영래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었다." 만약 역사의 신이 존재해 학비가 없어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을 가르치며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니던 조영래를 '법을 아는 전태일'로 사용했다면, 이젠 그의 후배 박원순을 역사의 신이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이 학교다>는 박원순의 발품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육의 대안과 미래를 꿈꾸는 교사, 학생, 활동가들을 만나고 얻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교육에 정말 희망이 있는 걸까? 이 질문은 한국 현대 사회에서 던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이다.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란 속담이 있다. 교육을 고리로 한 신분 이동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고랑은 앞으로도 고랑일 뿐이고, 이랑은 대대로 이랑일 뿐이다.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 모두 고랑에서 나 이랑이 된 격이다. 이들의 삶이 가치 있는 건, 애써 얻은 이랑의 삶을 마다하고 고랑의 삶들과 함께 하고 스스로 고랑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마을이 학교다>는 교육의 희망을 일구려 고랑의 삶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 활동가들과 그 안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책을 덮으며 이들 학교에선 조영래, 박원순 같은 이들이 다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겐 이 책이 희망의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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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헨드릭스의 책읽기 #15] 박원순의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from Fly, Hendrix, Fly 2010-07-23 22:34 
    마을이 학교다 - 박원순 지음/검둥소 2010/05/2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탈주, 코뮨 혹은 마을 그리고 약간의 공허함 2010/03/20 - [생각하기/가져온 글들] - 근대의 장례식을 누가 치를 것인가? 2009/04/1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래, 다시 마을이다! - 조한혜정, , 또 하나의 문화, 2007 2009/04/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놀아봐야 놀 줄 알지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반딧불이 2010-07-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분들을 알게 될 때마다 까닭없이 마음이 따뜻해져요. 역사의 신은 거들떠도 안보는 저 같은 존재는 대체 어디에 소용이 닿으려는지...씁쓸해지도 하면서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3 20:50   좋아요 0 | URL
무더위에 잘 지내시는지요? 시절이 수상해서 조영래 변호사를 더욱 떠올리게 됩니다. 박원순 선생님도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조영래 선배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묻는다고 해요. 이젠 박원순 선생님께 물어봐야 할 차례도 된 것 같구요.
저는 올해 서른에 접어 들었습니다. 저도 제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책을 통해서 좋은 분들 알아갈 때마다 '반딧불이'님처럼 따뜻한 마음 간직하려 한답니다. 그리 되려 조금씩 노력도 해보구요.
건강 하시구요.

미지 2010-07-27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희망을 만듭시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4:22   좋아요 0 | URL
그럼요^^
 
나비 (구) 문지 스펙트럼 28
왕멍 지음, 이욱연.유경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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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작인 <봄의 소리(春之聲)>와 비교해 사회주의적 이상이 한 풀 꺾인 작품들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책에는 <견고한 죽>, <밤의 눈>, <나비>가 실려 있다-에 실려 있진 않지만,  <봄의 소리>를 잠깐 살펴보자. 이 작품은 중국현대문학에서 '의식의 흐름'을 본격적으로 보여 준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의식의 흐름이 보이는 대표적인 장면은 이렇다. 위에즈펑(岳之峰)은 어두컴컴한 찜통차에서 공상에 빠진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이들과 고향을 떠올린다. 베이핑(北平)으로 달리던 생각은 이내 베이하이(北海)로 향한다. “그는 그를 위해 불어오는 환희에 들뜬 바람을 맞이하였다. 그는 작은 소리로 그가 몰래 사랑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는 이처럼 숱한 이들로 들어찬 기차 안에서 홀로 봄의 소리를 듣는다. 의식의 흐름이 파편화된 단상들을 주절주절 내보이는 것은 이미 그 인물이 위에즈펑처럼 파편화된 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왕멍은 계속해 실험을 하는데, 89년작인 <신비로운 새(神鳥)>에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멍티라는 지휘자가 지휘하던 도중 공연장을 나는 새를 발견한다. 멍티는 새의 날갯짓에 맞추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새의 날갯짓은 멍티의 눈에만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새를 보지 못했으며, 그들의 관심은 “새가 알은 낳을 수 있답니까? 편지는 전달할 수 있대요?”에 집중해 있다. 모더니즘 기법을 활용하는 중에도 왕멍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감행한다. 책에 실린 <견고한 죽(堅硬的稀粥)>을 보며 두 작품이 은연중 덩샤오핑 체제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 작품은 새가, 다른 작품은 죽이 매개가 되어 비판이 이루어진다.

  <봄의 소리>와 <신비로운 새>는 유사한 모습이다. 한 주인공은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고, 또 한 주인공은 지휘자이다. <봄의 소리>는 ‘꽝’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위에즈펑은 음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다. 미국의 추상파 음악, 경극의 징과 북소리, 프랑크푸르트 소년 합창단,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등 그는 음악에 관한 한 전방위적 지식을 갖췄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봄의 소리를 홀로 듣는다. 멍티가 보이지 않는 새를 홀로 보고, 위에즈펑이 봄의 소리를 홀로 듣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당대의 중국적 현실이 모든 이들의 의식과 사고를 동일화시켜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멍티와 위에즈펑은 감각으로 에둘러 가 개인의 독존을 말하고 있다. 감각이나마 홀로 있음을 인정해주라는 말은 아닌지? 위에즈펑의 말이다. “그가 당혹하였던 것은 설마 인간의 한평생이란 것이 검토를 받기 위해서였던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숨쉬고 살았던 것이 어떤 일당에게 검토를 받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왕멍이 펼치는 의식의 흐름은 비꼼 혹은 풍자와 닿아있다. “4대 현대화의 실현을 그리는 사람들 그런데 아직도 와트와 스티븐슨 시대나 있을 법한 찜통에 앉아 있다니!” 그러나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고향에 도착했을 때 위에즈펑은 이미 찜통차에서 듣던 봄의 소리를 생전 듣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음악‘이라 치켜세운다. 비판의 칼을 들이대던 그가 갑자기 긍정적 태도로 돌아서는 게 썩 개운치는 않다. 코피 터지도록 싸우다가 돌연 ’화해하자‘ 손을 내미는 꼴이다. 80년대의 정치 환경과 연관해 이해한다면 박대할 이유도 그다지 없겠지만 말이다.  

  

                  王蒙(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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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1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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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나웬에게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김두식 교수 때문이다. <세상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세상>에서 김두식은 헨리 나웬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하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김두식이 위 책에서 세세하게 얘기하지만 나 역시 그를 보수적 기독교계와 같이 스펙 좋은 성직자로만 알았는데 그에게도 큰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 작가 에드워드 포스터의 소설을 영화화한 <모리스>를 보고 오는 길에 내내 울던 나웬이었다. 영화는 동성애자 친구를 다룬 내용이고, 원작자 포스터 역시 동성애자였다. 영화 속 인물들과 작가에게 공감했던 나웬은 끝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대중에게 밝히지 않고 세상을 뜬다.

  책은 나웬이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펴낸 말년의 작품이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바탕으로 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나웬은 찬찬히 뜯어본다. 렘브란트에게도 이 그림은 말년의 힘을 모두 쏟아부은 작품인데, 두 사람의 말년이 이 그림에서 마주친다. 일생 자신의 연약함과 운명의 냉혹함에 고통했던 화가 렘브란트가 이제는 귀향을 말하고 있다. 평생 성직자로 존경받으며 하버드와 예일대학에서 청년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던 나웬도 어느새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대학을 떠나 지체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쉬로 귀향한다. 사뭇 다른 인생을 살던 두 사람의 말년이 어쩜 이리 같단 말인가? 나웬의 결단 속에는 동성애자로서의 탕자 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가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이다. 가수 유승준이 불러 유명해지기도 한 곡인데, 가사가 이렇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이 찬송가도 '탕자의 비유'에 바탕한 곡이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지만 <탕자의 귀향> 속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이 자애롭고 따스하다. 저 품에 안긴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무척이나 따스했을 것만 같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1666-1669)

             

         Henri Nowen(1932-1996)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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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7-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승준이 찬송가 도 불렀군요~

지금 티브이에는 김남길이 군대 간다고 무릎팍도사에 나오네요~

한국에서의 군대문제가 너무 예민해서~

유승준이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쩝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2 10:11   좋아요 0 | URL
저는 유승준을 참 좋아했는데요. 중국과 동남아를 빙빙 돌며 공연하는 그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언젠가 성시경이 '무릎팍 도사'에서 말했더랬는데, 별별 범죄자도 거리를 활보하는 이 나라에서 무슨 국가가 가수 하나를 입국금지 하는 지 모르겠어요. 사안이 다르긴 하지만 박재범도 들어오던데 말이죠.

Forgettable. 2010-07-22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포스터가 동성애자였군요! 난 왜 몰랐지;;; 그 동안 미심쩍었던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는 듯 합니다.
[모리스]를 보고 우는 스펙 좋은 성직자라니, 흐 왠지.. 마음이 싸하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2 10:16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하네요.
혹시 포스터의 <기나긴 여행> 읽어 보셨어요?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라는데, 읽어 볼 계획입니다. 포스터의 어떤 기억들이 떨어져 있는지 주워볼려구요.
<모리스>도 읽어봐야 할텐데요......

2010-07-22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2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학의 위기 - 인문의 새로운 길을 향한 중국 지식인의 성찰과 모색
백원담 엮음 / 푸른숲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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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이 거창한데, 90년대 중반에 있었던 중국 문학계의 '인문정신논쟁'을 정리한 책이다. 논쟁은 1993년에 시작되는데, 이 무렵 중국은 안팎으로 큰 변화속에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정치적 체제 굳히기에 성공한 중국 지도부는 이어 1992년 덩샤오핑이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한다. 이후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에 급격히 통합되어간다. 중국의 사회불평등은 도농간, 계층간, 지역간 할 것 없이 커져만 간다.  

  이 때 일군의 문학비평가들이 인문정신의 회복을 말하며 논쟁을 시작한다. 이들이 말하는 인문정신은 도학적 개념인데, 이에 반하는 일부 작가들-여기엔 영화감독 장이머우도 속한다-의 상업성, 선정성을 거론하며 비판한다. 문학적 지성의 지식인으로서 본래 모습을 찾자는 주장에 얼마전까지 문화부장(장관)을 지낸 작가 왕멍이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며 논쟁은 격렬해진다. 왕멍은 상업작가로 비판 받는 작가들을 두둔하며 상업화가 아닌 다원화라 주장한다. 논쟁을 일으킨 비평가들을 향해 그들이 주장하는 인문정신이란 문학에서 도학적 가치만을 따지는 또다른 전제주의라 비판한다. 소장 비평가들이 원로 작가와 대결하는 양상을 보인 논쟁은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으로까지 번지다 끝나게 된다.  

  이 논쟁도 인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기실 정치적이다. 문화대혁명의 상흔이 깊지 않은 젊은 비평가들이 톈안먼의 소요가 잠잠해지자 중국 지식인의 전통을 꺼내며 자신들의 자리를 요구하는데, 문혁의 상흔이 깊은 작가 왕멍은 다시금 그 때로 돌아가자는 얘기냐며 반대를 한다. 왕멍은 고래로 그 위상을 누구도 의심치 않는 루쉰을 거론하며 "지금 시대에 왜 루쉰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루쉰의 강한 정치성을 부담스레 여기는 대목인데, 문혁과 톈안먼 사태를 겪은 노작가로서는 문학의 정치성 복원을 주장하는 젊은 비평가들이 불편했을 것이다. 실제 왕멍은 문혁 때 16년 간 위구르로 하방되었고, 문화부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톈안먼 사태의 책임을 지고-실은 쫓겨나는 것이지만-부장직을 그만둔다.  

  이 논쟁에서 승자 같은 건 없었다. 이들은 제각각 중국 문학의 한 부분씩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왕멍 쪽으로 기운 듯 한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보며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감독한 장이머우를 보며 "그대가 승자군!"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사실 왕멍과 장이머우 사이의 거리는 꽤나 먼 편인데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던 이가 승리한 격이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무어라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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