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破戒)>는 걸작이다. 1906년 작품이니 1887년 첫 근대소설이라는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浮雲)>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 20년 사이에 누가 있었나? 소설엔 모리 오가이와 다야마 가타이가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근대문학의 문호로 추앙받는 작가이다. 낭만주의 계열의 소설을 주로 썼는데, <무희(舞姬)>와 <청년(靑年)>이 대표작이다. 다야마 가타이는 자연주의 문학을 주창한 작가이다. <이불(蒲團)>이 대표작이다. <이불>이란 소설은 꽤 문제적인데,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 무렵의 일문학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메이지 20년대 초에 씌어진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 쪽이 훨씬 나중에 씌어진 소설보다 더 서양적인 의미의 소설을 실현했으며, 그 후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에 의해 방향이 비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대충 이상이 문학사의 상식이다.('고백이라는 제도')  
   

  가라타니가 말하는 '비틀어짐'은 일본근대소설의 주류인 사소설의 효시가 바로 <이불>이라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불> 이후 사소설은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지금까지 일본 소설의 주류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계>의 존재는 기이하다.  

  소설의 대종은 이렇다. 교사 세가와 우시마쓰는 백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백정임을 절대 밝히지 말라는 계율을 남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우시마쓰가 백정 출신임이 밝혀지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소설의 제목은 계율을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파계'이다.  

  신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이 이 시대에 나올 수 있음은 대단한 것이다. 20년 후에야 계급주의 소설인 <게공선(蟹工船)>(고바야시 다키지)과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미야모토 유리코)가 나오니 말이다. 해서 나프문학(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쪽에선 <파계>를 사회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럼, 이 소설은 완벽한가?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두 가지 정도 흠을 잡겠다.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우시마쓰는 어디로 향할까? 자신의 사상적 은사인 렌타로의 유골을 들고 도쿄로 향하는 우시마쓰인데, 이후 그는 오히나타를 따라 미국 텍사스로 향한다. 신분에 따른 박해가 없는 미국으로 향한다는데, 이 모습은 낯이 익다. 이광수가 <무정(無情)>의 끝을 이형식의 시카고행으로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도 고향에선 핍박받는다'던데, 계몽적 지식인의 도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또 하나는 이런 대목이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말한다. "집안의 조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도 그때였다. 도카이도 연안에 사는 많은 백정 종족처럼,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또는 이름도 모르는 섬에 표착하여 귀화한 이방인의 후예와는 달리 ....... 가난하기는 해도 죄악으로 더럽혀진 가족은 아니라고 했다."(16면)  
   

   재일 조선인을 '죄악으로 더렵혀'졌다고 말하는 작가이다. 작가가 백정 신분에게 동정심을 쏟듯 같은 처지의 재일 조선인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한다. 일본 사회에서 신분의 문제가 이제는 많은 부분 해결되었지만, 재일 조선인 문제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작가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파계>에서 가졌던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하는데, 특히 <집(家)>(1911)을 보면 그렇다. 자연주의 문학이 더 이상 사회에 대한 관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사소설로 귀결되는데 작가 역시 적은 몫이나마 하게 된다.

 

              島崎藤村(1872-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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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문학 계보가 한눈에 보이는 군요. 소세키를 읽으면서 <청년> <이불>등을 찜해두었는데 아직 근처에도 못가보고 있어요. 차츰 리뷰의 내용이 길어져서 제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0:52   좋아요 0 | URL
대학 때 아주 오래된 번역으로 봤던 소설인데, 새 번역으로 읽어봤어요. 옛 번역은 세로판이었는데요. 리뷰 적어보며 대학 때 들었던 일본근대문학사 수업도 떠올리며 문학사 책도 좀 찾아보구요. 제게도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청년>과 <이불>은 번역이 되어 있죠. 특히 <이불>은 사소설을 알아가는 데 지침이 되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론 후대 소설가들이 이 소설을 오독하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쏙 가져간 듯도 하구요.
언제고 읽어보시면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루쉰P 2010-10-2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읽으며 사실 파고세운닥나무님께서 언급한 부분은 주의 깊게 읽지를 못 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자신의 신분에 괴로워 하며 몸부림치는 묘사가 너무나도 신랄하여 거기에 흠뻑 빠져서 읽었습니다. 저는 주로 독서가 감정 몰입적인 경험이 있어 저런 부분들에 대해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기사 <파계>의 결론이 사실은 자신의 은사처럼 사회를 향해 외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서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나쓰메 소세키 역시 신문 기자로서 조선도 여행을 한 사람 이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문제에 대해서는 죽는 날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죠. 일본 근대 문학가들의 한계는 거기인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는 점 말이죠. 근데 한국의 작가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고민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8:03   좋아요 0 | URL
지금에 와서야 현실도피라 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신분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용기만으로도 <파계>는 걸작이라는 말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스타일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따지기를 좋아해 저렇게 적어 본 거구요.
일전에 <요코 이야기>라는 소설 때문에 꽤 시끄러운 적이 있었죠. 한편으로 부끄러웠던 게 한국 문학도 일본인을 비하하는 데 만만치 않은 노력을 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본인이 가해자는 아닐 뿐더러, 작품을 대하는 한국인들이 필요 이상의 반일 감정을 갖는 것도 경계해야 하니까요.

다이조부 2010-10-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기존의 전집류와는 전적으로 다른 기준으로 책을 선정하나봐요?

주는 거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이지만 참 이 출판사는 얄미울 정도로 장사를 잘한단

말이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30 09:17   좋아요 0 | URL
전집 편집자 가운데 일문학자인 박유하 교수가 있는데, 이 분이 일본 소설을 전집에 많이 넣는듯 해요. 여타의 세계문학전집보단 일본문학이 많죠. 중문학이 전혀 없어 아쉽지만요.
그거 제외하곤 크게 다르지는 않은듯 해요. 늘 번역되는 작품 다시 하고 말이죠. 타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들 다시 살리기도 하고 말이죠. <킴>처럼 안 넣어도 되는 소설을 넣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론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좋아합니다.

소나무 2021-04-0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년이 지났지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