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서커스> / 최인석 / 책세상 / 2002
확신과 주저 사이에서
최인석론
1.
정말로, 우리는 세상 밖에 있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의 감촉이 사라졌다. 아! 나의 성, 나의 작센산(産) 모직옷, 나
의 버드나무숲. 저녁, 아침, 밤, 낮들......난 지쳤다!
난 분노를 위한 나의 지옥이, 오만을 위한 나의 지옥이, 그리고
애무의 지옥이 있어야 할텐데. 지옥들의 모의(謀議)가.
지긋지긋해 죽겠다. 이건 묘지다. 나는 구더기들에게로 간다. 공
포 중의 공포로다! 사탄이여, 어릿광대여, 너는 너의 매력으로 나
를 분해하고 싶어한다. 나는 애원한다! 쇠스랑의 타격을, 한 방울
의 불을.
아! 다시 삶으로 떠오르기! 우리의 추한 모습에 눈길을 던지기!
그리고 이 독, 정말로 저주받을 이 입맞춤! 나의 연약함, 세계의
잔혹함! 맙소사, 불쌍히 여기시오, 날 숨겨주오, 나는 너무 행실
이 나쁩니다!―나는 숨겨지고 숨겨지지 않는다.
불로 천벌받은 자와 함께 되살아나는 것은 바로 불이다.
―<지옥의 밤> 부분(김현 譯)
랭보(A. Rimbaud)의 어린 날을 마냥 즐겁게 해주던 성(城)과 작센산 모직옷과 버드나무숲은 이제 저녁처럼, 아침처럼, 밤처럼, 낮처럼 사라지고 있다. 19세기 말 그가 목도한 부르주아 문명은 그 있는 곳을 세상 밖이며 지옥이며 묘지로 바꾸고 만다. 그는 이제 자본주의 문명과 중산계급에 저주와 조롱을 퍼붓는다.
작가 최인석(崔仁碩)이 목격하는 현금의 자본주의 세계도 랭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들이 탄광촌, 매음굴, 감옥, 군대, 판잣집 촌 등과 같은 시대의 아픔과 슬픔이 결집된 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될 듯 싶다.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에서 자칭 폐인국의 왕인 동찬은 랭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가출, 어쩌면 랭보의 평생은 가출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이 궁핍하고 비참한 세계와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베를렌과 파리의 시인들 속에서도, 홍해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그는 위엄을,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출을 한단 말인가? 어쩌면 랭보가 가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쪽문이 악덕과 조롱, 그리고 상상의 세계였다.(19면)
최인석의 소설들은 이내 날카롭게 다듬어진 촌철(寸鐵)처럼 '궁핍하고 비참한 세계와 삶'의 급소를 찔러대고 있다.
근작인 중편 <서커스 서커스>(책세상, 2002)도 예외는 아니다. 우렁이들이 서커스를 해야만 돌아갈 줄 아는 자본주의 세계를 그 역시 우렁이가 되어 느릿느릿 그려내고 있다. 우렁이가 그려낸 우렁이들의 서커스를 들여다보자.
2. 우렁이들의 서커스; 우렁이의 생태학적 보고서
윤상준의 아들 승호가 여자 친구 주희에게 들려주는 <우렁이와 장꾼> 우화는 이렇다. 우리가 아는 여느 우렁이처럼 이 우렁이 각시도 하루에 한 번씩 여자로 변해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밥도 짓는다. 그런데 각시의 옆에는 농사꾼이 아닌 장사꾼이 있다. 그는 힘든 장사 일을 때려치우고 <사람으로 변하는 우렁이!!! 관람비는 단돈 오백원!!!> 간판을 달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다. 전국의 관람객들은 앞다투어 서커스하는 우렁이를 구경하고, 장꾼은 엄청난 부자가 되어 서울에서 대학 나온 예쁜 여자를 구해 결혼도 하고 새끼도 낳고 잘 먹고 잘 산다. 그리고 우렁이는 철망에 갇혀 살다 죽는다.
이야기를 들은 주희가 '징그러운 패러디'라고 쏘아붙이듯 그저 장난기 서린 상상력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뭔가 꺼림칙한 우화이다. 승호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이놈의 세상 꼴이 그런걸. 이놈의 세상엔 장사꾼하고 우렁이가 있는 거야. 우렁이는 장사꾼에게 잡혀 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 거고, 장사꾼은 우렁이를 철망에 가둬놓고 배 두들기고 놀면서 돈을 버는 거고. 난 뭐가 되어야 하지? 넌 뭐가 되고 싶어? 우렁이가 되어야 하나, 장사꾼이 되어야 하나? 둘 다 싫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16면)
승호는 둘 다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선택한다.(18면) 영화를 만드노라면 장사꾼도 우렁이도 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그런데 대체 영화가 무엇이기에 그에게 이런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협동작업에 의한 예술활동'(아르놀트 하우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창작과비평사 1999, 310면)이다. 여타의 예술 장르 대부분은 개인적인 고투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영화는 작가, 감독, 카메라맨, 미술감독, 각종 기술자 등의 공동작업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관중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이다. 창작 주체 안에서의 호환(互換), 창작 주체와 관중간의 호환을 통해 영화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와 닮은 연극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인석의 90년도 작인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에서 물신(物神)사회의 한 화신으로 여겨질 만한 박형욱과 대결하는 그의 아내 오명실이 연극에 끝없이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명실이 연기하고자 한 배역에게 비둘기라는 한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명실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명실은 안다. 그것은 윤조(그것이 여주인공의 이름이다)의 환상이다. 윤조에게는 물론이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힘을 주는 환상이다. 그것이 없이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행복에의 꿈이요, 의지다. 고통과 거짓과 억압과 추악함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그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이요, 의지다. 그러나, 윤조에게는 중요한 결함이 있다. 그것은 그 꿈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방법에 대한 아무런 탐구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윤조의 꿈은 허구로 떨어지고 윤조의 의지는 고집으로 전락한다.(202면)
명실이 연극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살을 맞대고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를 수 있는 '살아있음'을 그 안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을 뿐이다. 윤조에게 비둘기라는 환상이 허구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듯이 연극 역시 한 순간의 도취 혹은 승리일 뿐이다.
우화에서 보았듯이 우렁이와 장꾼은 함께 이윤을 만들어간다는 합력(合力)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입장의 대립이라는 쉬이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져 있다. 승호의 미완 시나리오인 <우렁 각시 서커스>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우렁이는 장꾼에게 사랑을 주고자 하지만 사랑에 전연 관심 없는 장꾼은 우렁이를 통해 얻는 돈만을 원하고 있다. 모지게도 등을 맞대고 돌아선 상황에서 마음을 함께 하기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승호의 영화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는 힘주어 확신하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튼실한 미더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작품 초반부 그의 비명횡사도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승호도 역시 우렁이일 뿐이었다. 승호의 죽음 후 등장 인물들의 주위를 맴도는 환영(幻影)이 승호일 거라 짐작하는 것도 그저 환상으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렁이들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이다.
승호의 죽음 이후 이야기를 이끄는 상준은 그의 아들의 확언―"그는 우렁 각시 서커스의 장사꾼이다."(136면)―대로 장꾼일까? 그는 실제 직업이 장사꾼(금은방 주인)이다. 그리고 승호의 시나리오 속에서 장꾼의 아들이 책 만드는 사람이나 책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에 장꾼이 돈이 되는 일을 하라며 꾸중하듯이 상준도 역시 아들 승호의 평소 행태를 꾸짖고 그가 장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아들에게 장꾼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렁이의 삶이 곧 약자의 삶임을 상준은 체험을 통해 그리고 선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영상가의 임대 상인들이 임대료 문제로 싸움박질 하는 걸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승호의 화법에 따르면 이것은 욕망과 욕망의 싸움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승자도 패자도 욕망이다. 그들의 영주(領主)는 욕망, 그들은 욕망의 포로요 욕망의 전사, 이곳은 욕망의 전장이었다. 유일한 승자는 그러니까 욕망.(135, 136면)
욕망이라는 영주가 다스리는 봉토(封土) 안에는 강자와 약자가 살고 있다. 강자는 장꾼과 같이 얍삽하여 비굴하리 만치 욕망에 복종한다. 반면 약자는 우렁이처럼 굼실대는 바람에 욕망으로부터 호된 타박을 듣는다. 욕망에 지배된다는 것은 분명 비굴한 일일 테지만 장꾼은 소용없을 법한 저항을 애초부터 내던지고 욕망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렁이라는 굼떠 보이는 존재를 지배함으로 그들에게 강자로 군림한다. 상준이 이해했던 세계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승자는 아닐지라도 강자로나마 자위(自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 그는 역시 승호에게도 같은 삶을 강요한다. 하지만 승호의 죽음 이후 상준은 더 이상 자신이 강자가, 또한 장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슬기라는 아들과 채팅을 즐기던 소녀에게 욕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고백한다.
그 장꾼은 바로 나다. 난 내 우렁 각시들을 다 팔아먹었어. ......아무도 안 남기고 아무것도 안 남기고 다 팔아먹어 버렸다.......그런데......이제 와 돌아보니, 나 역시 누군가의 우렁 각시에 불과했던 것 같구나. 누군가가 날 팔아먹어 버린 것 같아. 그게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난......장사 잘 하고 잘 먹고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169면)
자신이 우렁이임을 힘겹게 깨닫는 상준이지만, 아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또 다른 우렁이들인 조카 승태의 친구들에 의해 비명횡사한다. 원뿔 꼴의 껍데기에 짧은 목을 잔뜩 움츠려야만 겨우 살아낼 수 있는 세상, 이 곳이 바로 지옥이, 그리고 묘지가 아닐까?
3. 유토피아―아무데에도 없는 나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서 처절하리 만치 슬픈 우렁이들의 서커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우렁이들이 살만한 그 곳은 대체 어느 곳에도 없단 말인가? 우선 최인석의 그동안 작품들을 통해 그가 바라 본 세상과 바라는 세상을 살펴보고 <서커스 서커스>에서는 그의 바람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도 알아보자.
10여권의 그의 소설들을 일별하며 느낀 것은 그가 바라 본 세계는 날이 갈수록 어둡고 음습해져만 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6년 장편 <구경꾼>이 소설문학사 주관 제6회 '小說文學賞'에 당선됨으로 희곡 작가에서 소설가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21세기를 세 해나 보내는 현재까지도 그의 소설들이 어두워져만 가는 것은 왜일까? 그의 초기작들이 분명 일정의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숱한 작가들이 천착했던 '노동 문제'와 '정치 문제'에 그 역시 골몰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잠과 늪>(실천문학사, 1987)에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김대리를 뒤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도 뭔가 후광에 싸인 듯한 노조위원장 태재영에게 김대리의 아내 박경선이 끌리는 것은 작가의 문제 의식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또한 <새 떼>(현암사, 1988)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여 운동권 출신이자 그 자신 노동자인 한태훈이 이야기를 이끈다는 사실도 덧붙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서문에서 작가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획득해내는 변화만이 이 나라를 진정으로 민주화시킬 것이요, 분단된 이 나라, 이 겨레를 통일시킬 것이며, 이 나라 금수강산에 이빨을 박고 있는 외세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요, 마침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7면)
87년의 항쟁의 함성이 채 가시기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 해방의 지평'이라는 지금에 와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말도 이해가 간다.
그는 이후로도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살림, 1990)와 <인형 만들기>(한길사, 1991)와 같은 당대 현실을 충실히 그려내는 작품들을 내 놓는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이전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그것은 혹 그가 바라는 세상에 변화가 와서가 아닐까?
90년대 초반 잇따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뼈아픈 배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최인석은 이제 대뜸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에서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끄집어낸다. 시체 애호증 혹은 시간(屍姦)을 뜻하는 네크로필리아는 일종의 페티시즘(fetishism)이다. 생명 없는 것에 대한 애착과 숭배라는 점에서 자본제 사회의 화폐에 대한 물신 숭배와 그 의미가 통한다.(서영채 <알레고리에서 심연으로>, <문학동네> 1997년 여름호.)
이념의 장막이 걷혀 가는 과정 속에서 최인석은 좌절감마저 금새 걷어 버리고 좀더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이제 그는 바야흐로 '제2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그는 이 때 다시금 "스물 여섯 해를 살았으면서도 세계의 핵심에 이르는 글은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한국문학> 1980년 6월 신인상 당선 소감)라는 초심(初心)을 되새겼는지도 모른다.
최인석은 95년 <내 영혼의 우물>(고려원)을 상재하며 제2의 유토피아를 찾아 침잠(沈潛)한다. 그는 이제 환상성을 도입하여 그의 작품 세계의 반경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간다.
그가 환상(幻想)을 들고나서는 것은 왜일까?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환상이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느끼는 상념(想念)을 말한다. 이제 최인석은 현실에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그려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현실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고 현실에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눈에 가득한 현실의 문제들을 그려내지만 여전히 그 문제들은 치유가 불가능하다. 이제 그는 현실에는 없는 상념들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진 않지만 현실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들을 탐구하고, 현실에는 없는 유토피아를 더욱 치열하게 그려나간다.
<세상의 다리 밑>(<내 영혼의 우물>)에서 이복기 병장은 여호와의 증인이었기에 현실 가운데서 천국을 가졌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하지만 군 입대 후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일고 이내 배교자(背敎者)가 되어 세상으로 뛰쳐나간다. 이제 그의 앞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가? 그가 생각했던 천국은 사실 지옥이었다. 그런데 서둘러 지옥을 빠져나오자 이제 다시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병장은 외친다.
"죽다니요? 내가 왜요? 죽지 않아요. 하지만, 이대로는 못 삽니다. 낙원을 찾을 겁니다. 없으면 만들 겁니다. 그것이 나라가 됐건 종교가 됐건 만들어서라도 살 겁니다."(108면)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절절히 다가오는 것이다. 환상은 현실에 없는 것을 그려내는 것이기에 현실의 문제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깊게까지 담아낼 수 있다. 유토피아 도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환상성 도입은 이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하다.
작가의 육성이 흥건히 녹아있을 법한 자전적 소설인 <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를 잠깐 살펴보자.
최보가 보기에, 그는 사실은 봄이어서 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느라 앉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선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는 영원히 앉지 못할지도 모른다.......모두가 어제의 친구들이지만, 모두가 어제만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친구들이었다.......그 역시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으니까.(140―142면)
그의 믿음대로 그 언젠가라도 신선의 봄은, 그리고 내일은 오고야 말 것인가?
4. 유토피아―아무데에도 없지만, 그려야하는 나라
이제 그가 환상을 통해서까지 그려내고자 한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보자. 소설가 최보는 "세상과 사람이 끝내 이 지경으로 살다 사라지고 말리라고 믿기에는 사람에 대해 너무 큰 신뢰를 품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그의 작품에서 제2의 유토피아는 우선 존재들간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노래에 관하여>(<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창작과비평사 1997.)를 보자. 이 작품은 5공 정권하의 삼청교육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심성의 폭력성과 야만적 광기'를 보여주고 있다.(염무웅<부정의 치열성과 예술적 형상화>,<혼돈을 향하여 한걸음>1997.)
김중연 중사로 대변되는 인간심성의 폭력성은 그의 수하 수용자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광기에 젖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김중사가 수용자들에게 강요하는 노래란 울며 먹는 겨자처럼 무서우리 만치 매운 것이다. 억압된 공간에서 순번을 매기며 강요로 부르는 노래란 이미 '노래'가 아닌 것이다. 마치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의 재주 부림이 헛웃음과 함께 슬픔을 동반하듯.
그런데 수용자들 사이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군종 하사 권성진의 집례로 수용자들 사이에서 예배가 이루어진다. 수용자들은 모두 한 형제요, 한 아버지의 아들이요, 쉼을 얻어 마땅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똑같은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노래(찬송)한다.
바늘 사건으로 서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들이 이제는 한 형제, 동일한 죄인이 되었다. 예배 후 순식에게 돌려지는 바늘은 서로간의 화해와 신뢰를 상징한다.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노래도 이제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들은 정겹고 따뜻한 노래에 서로 박수를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발장단을 맞춘다. 그들은 이제야 한 울타리 안에서 '너와 나'라는 구분을 넘어 진정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순식의 노래에 취하여, 김중사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자신들의 온몸을 결박하고 있던, 저 철조망이나 김중사의 폭행 따위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잔인하게 그들을 결박하고 있던 무엇인가로부터 이미 해방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체 취한 듯 홀린 듯 순식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151면)
수용소라는 억압된 공간 속에서 참다운 노래가 불러지고 있다. 이것이 최인석이 바라는 유토피아의 일면(一面)일 것이다. 이 곳엔 우렁이와 장꾼의 대립 같은 것은 없다. 그 곳에선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별이 되고 달이 되'며(<내 사랑 나의 귀신>) '한 사람의 기쁨이 다른 이에게 슬픔이 되는 일이나 열 사람의 행복이 천 사람에게 불행이 되는 일 같은 것은 절대 없'을(<나를 사랑한 폐인>) 것이다.
다음으로 제2의 유토피아에선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최인석은 '환난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심판의 순간을 꿈꾸는 의식, 근본적으로 종말론에 가까운 역사 초월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방민호<"시장과 구정물의 늪"의 딜레마를 넘어><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
종말론이란 유대교,기독교에서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는 설이다. 성경의 비유대로 '도적 같이' 찾아드는 것이 바로 종말이다. 물론 최인석이 기독교적 종말관을 지니고 있다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는 청년 시절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두어 번 읽어나갔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신의 존재부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신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악을 택하는 인간을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임을 들고 있다.(홍기돈<영혼의 깊은 우물로 남는 두 개의 상처>, <작가세계>2000년 봄호.)
그가 '기독교적' 의미의 종말론에 공감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가 바라는 유토피아가 혁명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부터 도적 같이 찾아드는 종말에 의한 것으로 바뀐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종말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이 절대 바뀔 수 없다는 슬픈 인식에 의한 것이고, 그만큼 세상은 더욱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종말에 다다라 있는 사형수 한주선은 말한다.
"왜냐하면 이놈의 세상이 이 지경인 한 아무리 많은 속죄양을 희생시켜가며 제사를 지내봤자 실패하는 게 당연하니까. 전쟁이나 혁명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거야."(<봉천동, 그 찬란하던 날>,<구렁이들의 집>272면)
그리고 그는 '푸른 송아지라는 건 없'는데도 푸른 송아지를 생각하며 기다린다. 종말 이후의 세계는 유토피아이다. 이 세계는 만물이 홀연히 변화된다. 그 곳은 '사람 같은 것들은 못 살고 용(龍)이 살'며(<지리산에 저 바다>) '양 같은 범이 놀고 범 같은 양이 노는 곳'(<염소 할매>)이다. 그 세계는 온갖 부정과 거짓 투성의 인간인 채로는 들어갈 수 없다. 지금의 세상이 홀연히 변화되어야 하고 그 안에 속한 각 존재들도 홀연히 변화되어야 한다. 결국 유토피아의 두 번째 모습은 첫 번째 모습을 내포할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존재들간의 깊은 신뢰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5.'서커스 서커스'를 넘어
<서커스 서커스>속의 유토피아는 우렁이와 장꾼의 대립이 사라지고, 더 나아가 우렁이와 장꾼이라는 존재 구분마저도 사라진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두 우렁이는 죽고 만다. 그리고 나머지 우렁이들은 기이하게 생긴 껍데기 속에서 좀처럼 나오려 들지 않는다. 뭔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던 승호와 상준 우렁이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세상은 그들의 깨달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제 우렁이들의 목은 더욱 움츠려만 갈 것이다.
이제 유토피아란 꿈꿀 수조차 없단 말인가? 필자는 <우렁 각시 서커스>의 우렁 각시에게 귀 기울인다. 우렁 각시는 "사랑이 장꾼을 만들고 나를 만들었으며, 우렁이들의 사랑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162, 163면)
<서커스 서커스>를 통해 바라 본 최인석의 유토피아가 이제 보인다. 사랑이 우렁이 각시를 사람으로 만들 듯이, 사랑만이 존재의 근본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존재들간의 사랑만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 글 중에 최인석의 기독교 이해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당시 최인석은 중요한 신의 속성 한 가지를 빠뜨린 것 같다. 인간이 악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넘어선 '사랑'때문이 아닐까 한다. 굳이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제 최인석은 어찌하든지 사랑으로 유토피아를 만들어가자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대학원생과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이성만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이성 더하기 알파, 알파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야말로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모성적 이성, 관대한 이성, 이런 생각을 해보는 적도 있습니다......나는 모성적 이성이라고 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해나 지식, 이런 것의 가장 작은 씨앗이 되는 것은 관심이나 사랑이 아닐까......그러니까 사랑이나 관심이 없는 이성, 남성적이고 지배적이고 재판관 같은 이성이라기 보다 모성적이고 따뜻하고 관대한 이성, 이런 것을 상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수용소 없는 혁명, 이런 것을 생각해보는 겁니다.(최인석,정여울 대담<세상의 모든 우렁이들에게><서커스 서커스>, 책세상 2002.)
살펴본 것과 같이 최인석이 유토피아에 다다르기 위한 도정(道程)은 사뭇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유토피아를 열망함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다. 결코 희망도, 내일도 없으며 고통만이 확실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영원'을 발견한 랭보처럼 최인석도 힘겹게 발견한 유토피아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커스보다, 무거운 등껍데기 보다 우렁이를 더욱 힘겹게 하는 것은 눈을 빼꼼이라도 들어 쳐다볼 수 있는 하늘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인석이란 우렁이가 바라 본 하늘은 오늘 맑게 개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