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서커스> / 최인석 / 책세상 / 2002 

 

확신과 주저 사이에서

최인석론




1.



정말로, 우리는 세상 밖에 있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의 감촉이 사라졌다. 아! 나의 성, 나의 작센산(産) 모직옷, 나

의 버드나무숲. 저녁, 아침, 밤, 낮들......난 지쳤다!

난 분노를 위한 나의 지옥이, 오만을 위한 나의 지옥이, 그리고

애무의 지옥이 있어야 할텐데. 지옥들의 모의(謀議)가.

지긋지긋해 죽겠다. 이건 묘지다. 나는 구더기들에게로 간다. 공

포 중의 공포로다! 사탄이여, 어릿광대여, 너는 너의 매력으로 나

를 분해하고 싶어한다. 나는 애원한다! 쇠스랑의 타격을, 한 방울

의 불을.

아! 다시 삶으로 떠오르기! 우리의 추한 모습에 눈길을 던지기!

그리고 이 독, 정말로 저주받을 이 입맞춤! 나의 연약함, 세계의

잔혹함! 맙소사, 불쌍히 여기시오, 날 숨겨주오, 나는 너무 행실

이 나쁩니다!―나는 숨겨지고 숨겨지지 않는다.

불로 천벌받은 자와 함께 되살아나는 것은 바로 불이다.

―<지옥의 밤> 부분(김현 譯)


  랭보(A. Rimbaud)의 어린 날을 마냥 즐겁게 해주던 성(城)과 작센산 모직옷과 버드나무숲은 이제 저녁처럼, 아침처럼, 밤처럼, 낮처럼 사라지고 있다. 19세기 말 그가 목도한 부르주아 문명은 그 있는 곳을 세상 밖이며 지옥이며 묘지로 바꾸고 만다. 그는 이제 자본주의 문명과 중산계급에 저주와 조롱을 퍼붓는다.

  작가 최인석(崔仁碩)이 목격하는 현금의 자본주의 세계도 랭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들이 탄광촌, 매음굴, 감옥, 군대, 판잣집 촌 등과 같은 시대의 아픔과 슬픔이 결집된 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될 듯 싶다.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에서 자칭 폐인국의 왕인 동찬은 랭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가출, 어쩌면 랭보의 평생은 가출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이 궁핍하고 비참한 세계와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베를렌과 파리의 시인들 속에서도, 홍해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그는 위엄을,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출을 한단 말인가? 어쩌면 랭보가 가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쪽문이 악덕과 조롱, 그리고 상상의 세계였다.(19면)



  최인석의 소설들은 이내 날카롭게 다듬어진 촌철(寸鐵)처럼 '궁핍하고 비참한 세계와 삶'의 급소를 찔러대고 있다.

  근작인 중편 <서커스 서커스>(책세상, 2002)도 예외는 아니다. 우렁이들이 서커스를 해야만 돌아갈 줄 아는 자본주의 세계를 그 역시 우렁이가 되어 느릿느릿 그려내고 있다. 우렁이가 그려낸 우렁이들의 서커스를 들여다보자.


2. 우렁이들의 서커스; 우렁이의 생태학적 보고서



  윤상준의 아들 승호가 여자 친구 주희에게 들려주는 <우렁이와 장꾼>  우화는 이렇다. 우리가 아는 여느 우렁이처럼 이 우렁이 각시도 하루에 한 번씩 여자로 변해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밥도 짓는다. 그런데 각시의 옆에는 농사꾼이 아닌 장사꾼이 있다. 그는 힘든 장사 일을 때려치우고 <사람으로 변하는 우렁이!!! 관람비는 단돈 오백원!!!> 간판을 달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다. 전국의 관람객들은 앞다투어 서커스하는 우렁이를 구경하고, 장꾼은 엄청난 부자가 되어 서울에서 대학 나온 예쁜 여자를 구해 결혼도 하고 새끼도 낳고 잘 먹고 잘 산다. 그리고 우렁이는 철망에 갇혀 살다 죽는다.

  이야기를 들은 주희가 '징그러운 패러디'라고 쏘아붙이듯 그저 장난기 서린 상상력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뭔가 꺼림칙한 우화이다. 승호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이놈의 세상 꼴이 그런걸. 이놈의 세상엔 장사꾼하고 우렁이가 있는 거야. 우렁이는 장사꾼에게 잡혀 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 거고, 장사꾼은 우렁이를 철망에 가둬놓고 배 두들기고 놀면서 돈을 버는 거고. 난 뭐가 되어야 하지? 넌 뭐가 되고 싶어? 우렁이가 되어야 하나, 장사꾼이 되어야 하나? 둘 다 싫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16면)



  승호는 둘 다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선택한다.(18면) 영화를 만드노라면 장사꾼도 우렁이도 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그런데 대체 영화가 무엇이기에 그에게 이런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협동작업에 의한 예술활동'(아르놀트 하우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창작과비평사 1999, 310면)이다. 여타의 예술 장르 대부분은 개인적인 고투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영화는 작가, 감독, 카메라맨, 미술감독, 각종 기술자 등의 공동작업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관중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이다. 창작 주체 안에서의 호환(互換), 창작 주체와 관중간의 호환을 통해 영화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와 닮은 연극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인석의 90년도 작인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에서 물신(物神)사회의 한 화신으로 여겨질 만한 박형욱과 대결하는 그의 아내 오명실이 연극에 끝없이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명실이 연기하고자 한 배역에게 비둘기라는 한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명실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명실은 안다. 그것은 윤조(그것이 여주인공의 이름이다)의 환상이다. 윤조에게는 물론이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힘을 주는 환상이다. 그것이 없이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행복에의 꿈이요, 의지다. 고통과 거짓과 억압과 추악함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그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이요, 의지다. 그러나, 윤조에게는 중요한 결함이 있다. 그것은 그 꿈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방법에 대한 아무런 탐구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윤조의 꿈은 허구로 떨어지고 윤조의 의지는 고집으로 전락한다.(202면)



  명실이 연극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살을 맞대고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를 수 있는 '살아있음'을 그 안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을 뿐이다. 윤조에게 비둘기라는 환상이 허구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듯이 연극 역시 한 순간의 도취 혹은 승리일 뿐이다.

  우화에서 보았듯이 우렁이와 장꾼은 함께 이윤을 만들어간다는 합력(合力)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입장의 대립이라는 쉬이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져 있다. 승호의 미완 시나리오인 <우렁 각시 서커스>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우렁이는 장꾼에게 사랑을 주고자 하지만 사랑에 전연 관심 없는 장꾼은 우렁이를 통해 얻는 돈만을 원하고 있다. 모지게도 등을 맞대고 돌아선 상황에서 마음을 함께 하기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승호의 영화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는 힘주어 확신하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튼실한 미더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작품 초반부 그의 비명횡사도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승호도 역시 우렁이일 뿐이었다. 승호의 죽음 후 등장 인물들의 주위를 맴도는 환영(幻影)이 승호일 거라 짐작하는 것도 그저 환상으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렁이들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이다.

  승호의 죽음 이후 이야기를 이끄는 상준은 그의 아들의 확언―"그는 우렁 각시 서커스의 장사꾼이다."(136면)―대로 장꾼일까? 그는 실제 직업이 장사꾼(금은방 주인)이다. 그리고 승호의 시나리오 속에서 장꾼의 아들이 책 만드는 사람이나 책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에 장꾼이 돈이 되는 일을 하라며 꾸중하듯이 상준도 역시 아들 승호의 평소 행태를 꾸짖고 그가 장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아들에게 장꾼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렁이의 삶이 곧 약자의 삶임을 상준은 체험을 통해 그리고 선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영상가의 임대 상인들이 임대료 문제로 싸움박질 하는 걸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승호의 화법에 따르면 이것은 욕망과 욕망의 싸움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승자도 패자도 욕망이다. 그들의 영주(領主)는 욕망, 그들은 욕망의 포로요 욕망의 전사, 이곳은 욕망의 전장이었다. 유일한 승자는 그러니까 욕망.(135, 136면)



  욕망이라는 영주가 다스리는 봉토(封土) 안에는 강자와 약자가 살고 있다. 강자는 장꾼과 같이 얍삽하여 비굴하리 만치 욕망에 복종한다. 반면 약자는 우렁이처럼 굼실대는 바람에 욕망으로부터 호된 타박을 듣는다. 욕망에 지배된다는 것은 분명 비굴한 일일 테지만 장꾼은 소용없을 법한 저항을 애초부터 내던지고 욕망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렁이라는 굼떠 보이는 존재를 지배함으로 그들에게 강자로 군림한다. 상준이 이해했던 세계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승자는 아닐지라도 강자로나마 자위(自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 그는 역시 승호에게도 같은 삶을 강요한다. 하지만 승호의 죽음 이후 상준은 더 이상 자신이 강자가, 또한 장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슬기라는 아들과 채팅을 즐기던 소녀에게 욕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고백한다.



  그 장꾼은 바로 나다. 난 내 우렁 각시들을 다 팔아먹었어. ......아무도 안 남기고 아무것도 안 남기고 다 팔아먹어 버렸다.......그런데......이제 와 돌아보니, 나 역시 누군가의 우렁 각시에 불과했던 것 같구나. 누군가가 날 팔아먹어 버린 것 같아. 그게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난......장사 잘 하고 잘 먹고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169면)



  자신이 우렁이임을 힘겹게 깨닫는 상준이지만, 아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또 다른 우렁이들인 조카 승태의 친구들에 의해 비명횡사한다. 원뿔 꼴의 껍데기에 짧은 목을 잔뜩 움츠려야만 겨우 살아낼 수 있는 세상, 이 곳이 바로 지옥이, 그리고 묘지가 아닐까?


3. 유토피아―아무데에도 없는 나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서 처절하리 만치 슬픈 우렁이들의 서커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우렁이들이 살만한 그 곳은 대체 어느 곳에도 없단 말인가? 우선 최인석의 그동안 작품들을 통해 그가 바라 본 세상과 바라는 세상을 살펴보고 <서커스 서커스>에서는 그의 바람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도 알아보자.

  10여권의 그의 소설들을 일별하며 느낀 것은 그가 바라 본 세계는 날이 갈수록 어둡고 음습해져만 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6년 장편 <구경꾼>이 소설문학사 주관 제6회 '小說文學賞'에 당선됨으로 희곡 작가에서 소설가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21세기를 세 해나 보내는 현재까지도 그의 소설들이 어두워져만 가는 것은 왜일까? 그의 초기작들이 분명 일정의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숱한 작가들이 천착했던 '노동 문제'와 '정치 문제'에 그 역시 골몰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잠과 늪>(실천문학사, 1987)에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김대리를 뒤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도 뭔가 후광에 싸인 듯한 노조위원장 태재영에게 김대리의 아내 박경선이 끌리는 것은 작가의 문제 의식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또한 <새 떼>(현암사, 1988)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여 운동권 출신이자 그 자신 노동자인 한태훈이 이야기를 이끈다는 사실도 덧붙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서문에서 작가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획득해내는 변화만이 이 나라를 진정으로 민주화시킬 것이요, 분단된 이 나라, 이 겨레를 통일시킬 것이며, 이 나라 금수강산에 이빨을 박고 있는 외세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요, 마침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7면)



  87년의 항쟁의 함성이 채 가시기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 해방의 지평'이라는 지금에 와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말도 이해가 간다.

  그는 이후로도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살림, 1990)와 <인형 만들기>(한길사, 1991)와 같은 당대 현실을 충실히 그려내는 작품들을 내 놓는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이전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그것은 혹 그가 바라는 세상에 변화가 와서가 아닐까?

  90년대 초반 잇따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뼈아픈 배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최인석은 이제 대뜸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에서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끄집어낸다. 시체 애호증 혹은 시간(屍姦)을 뜻하는 네크로필리아는 일종의 페티시즘(fetishism)이다. 생명 없는 것에 대한 애착과 숭배라는 점에서 자본제 사회의 화폐에 대한 물신 숭배와 그 의미가 통한다.(서영채 <알레고리에서 심연으로>, <문학동네> 1997년 여름호.)
 


  이념의 장막이 걷혀 가는 과정 속에서 최인석은 좌절감마저 금새 걷어 버리고 좀더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이제 그는 바야흐로 '제2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그는 이 때 다시금 "스물 여섯 해를 살았으면서도 세계의 핵심에 이르는 글은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한국문학> 1980년 6월 신인상 당선 소감)라는 초심(初心)을 되새겼는지도 모른다.

  최인석은 95년 <내 영혼의 우물>(고려원)을 상재하며 제2의 유토피아를 찾아 침잠(沈潛)한다. 그는 이제 환상성을 도입하여 그의 작품 세계의 반경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간다.

  그가 환상(幻想)을 들고나서는 것은 왜일까?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환상이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느끼는 상념(想念)을 말한다. 이제 최인석은 현실에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그려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현실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고 현실에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눈에 가득한 현실의 문제들을 그려내지만 여전히 그 문제들은 치유가 불가능하다. 이제 그는 현실에는 없는 상념들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진 않지만 현실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들을 탐구하고, 현실에는 없는 유토피아를 더욱 치열하게 그려나간다.

 <세상의 다리 밑>(<내 영혼의 우물>)에서 이복기 병장은 여호와의 증인이었기에 현실 가운데서 천국을 가졌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하지만 군 입대 후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일고 이내 배교자(背敎者)가 되어 세상으로 뛰쳐나간다. 이제 그의 앞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가? 그가 생각했던 천국은 사실 지옥이었다. 그런데 서둘러 지옥을 빠져나오자 이제 다시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병장은 외친다.



  "죽다니요? 내가 왜요? 죽지 않아요. 하지만, 이대로는 못 삽니다. 낙원을 찾을 겁니다. 없으면 만들 겁니다. 그것이 나라가 됐건 종교가 됐건 만들어서라도 살 겁니다."(108면)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절절히 다가오는 것이다. 환상은 현실에 없는 것을 그려내는 것이기에 현실의 문제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깊게까지 담아낼 수 있다. 유토피아 도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환상성 도입은 이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하다.

  작가의 육성이 흥건히 녹아있을 법한 자전적 소설인 <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를 잠깐 살펴보자.



  최보가 보기에, 그는 사실은 봄이어서 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느라 앉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선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는 영원히 앉지 못할지도 모른다.......모두가 어제의 친구들이지만, 모두가 어제만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친구들이었다.......그 역시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으니까.(140―142면)



  그의 믿음대로 그 언젠가라도 신선의 봄은, 그리고 내일은 오고야 말 것인가?



4. 유토피아―아무데에도 없지만, 그려야하는 나라



  이제 그가 환상을 통해서까지 그려내고자 한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보자. 소설가 최보는 "세상과 사람이 끝내 이 지경으로 살다 사라지고 말리라고 믿기에는 사람에 대해 너무 큰 신뢰를 품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그의 작품에서 제2의 유토피아는 우선 존재들간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노래에 관하여>(<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창작과비평사 1997.)를 보자. 이 작품은 5공 정권하의 삼청교육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심성의 폭력성과 야만적 광기'를 보여주고 있다.(염무웅<부정의 치열성과 예술적 형상화>,<혼돈을 향하여 한걸음>1997.)


  김중연 중사로 대변되는 인간심성의 폭력성은 그의 수하 수용자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광기에 젖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김중사가 수용자들에게 강요하는 노래란 울며 먹는 겨자처럼 무서우리 만치 매운 것이다. 억압된 공간에서 순번을 매기며 강요로 부르는 노래란 이미 '노래'가 아닌 것이다. 마치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의 재주 부림이 헛웃음과 함께 슬픔을 동반하듯.

  그런데 수용자들 사이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군종 하사 권성진의 집례로 수용자들 사이에서 예배가 이루어진다. 수용자들은 모두 한 형제요, 한 아버지의 아들이요, 쉼을 얻어 마땅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똑같은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노래(찬송)한다.

  바늘 사건으로 서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들이 이제는 한 형제, 동일한 죄인이 되었다. 예배 후 순식에게 돌려지는 바늘은 서로간의 화해와 신뢰를 상징한다.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노래도 이제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들은 정겹고 따뜻한 노래에 서로 박수를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발장단을 맞춘다. 그들은 이제야 한 울타리 안에서 '너와 나'라는 구분을 넘어 진정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순식의 노래에 취하여, 김중사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자신들의 온몸을 결박하고 있던, 저 철조망이나 김중사의 폭행 따위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잔인하게 그들을 결박하고 있던 무엇인가로부터 이미 해방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체 취한 듯 홀린 듯 순식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151면)



  수용소라는 억압된 공간 속에서 참다운 노래가 불러지고 있다. 이것이 최인석이 바라는 유토피아의 일면(一面)일 것이다. 이 곳엔 우렁이와 장꾼의 대립 같은 것은 없다. 그 곳에선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별이 되고 달이 되'며(<내 사랑 나의 귀신>) '한 사람의 기쁨이 다른 이에게 슬픔이 되는 일이나 열 사람의 행복이 천 사람에게 불행이 되는 일 같은 것은 절대 없'을(<나를 사랑한 폐인>) 것이다.

  다음으로 제2의 유토피아에선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최인석은 '환난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심판의 순간을 꿈꾸는 의식, 근본적으로 종말론에 가까운 역사 초월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방민호<"시장과 구정물의 늪"의 딜레마를 넘어><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


  종말론이란 유대교,기독교에서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는 설이다. 성경의 비유대로 '도적 같이' 찾아드는 것이 바로 종말이다. 물론 최인석이 기독교적 종말관을 지니고 있다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는 청년 시절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두어 번 읽어나갔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신의 존재부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신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악을 택하는 인간을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임을 들고 있다.(홍기돈<영혼의 깊은 우물로 남는 두 개의 상처>, <작가세계>2000년 봄호.) 
 그가 '기독교적' 의미의 종말론에 공감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가 바라는 유토피아가 혁명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부터 도적 같이 찾아드는 종말에 의한 것으로 바뀐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종말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이 절대 바뀔 수 없다는 슬픈 인식에 의한 것이고, 그만큼 세상은 더욱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종말에 다다라 있는 사형수 한주선은 말한다
.




  "왜냐하면 이놈의 세상이 이 지경인 한 아무리 많은 속죄양을 희생시켜가며 제사를 지내봤자 실패하는 게 당연하니까. 전쟁이나 혁명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거야."(<봉천동, 그 찬란하던 날>,<구렁이들의 집>272면)



  그리고 그는 '푸른 송아지라는 건 없'는데도 푸른 송아지를 생각하며 기다린다. 종말 이후의 세계는 유토피아이다. 이 세계는 만물이 홀연히 변화된다. 그 곳은 '사람 같은 것들은 못 살고 용(龍)이 살'며(<지리산에 저 바다>) '양 같은 범이 놀고 범 같은 양이 노는 곳'(<염소 할매>)이다. 그 세계는 온갖 부정과 거짓 투성의 인간인 채로는 들어갈 수 없다. 지금의 세상이 홀연히 변화되어야 하고 그 안에 속한 각 존재들도 홀연히 변화되어야 한다. 결국 유토피아의 두 번째 모습은 첫 번째 모습을 내포할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존재들간의 깊은 신뢰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5.'서커스 서커스'를 넘어



 <서커스 서커스>속의 유토피아는 우렁이와 장꾼의 대립이 사라지고, 더 나아가 우렁이와 장꾼이라는 존재 구분마저도 사라진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두 우렁이는 죽고 만다. 그리고 나머지 우렁이들은 기이하게 생긴 껍데기 속에서 좀처럼 나오려 들지 않는다. 뭔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던 승호와 상준 우렁이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세상은 그들의 깨달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제 우렁이들의 목은 더욱 움츠려만 갈 것이다.

  이제 유토피아란 꿈꿀 수조차 없단 말인가? 필자는 <우렁 각시 서커스>의 우렁 각시에게 귀 기울인다. 우렁 각시는 "사랑이 장꾼을 만들고 나를 만들었으며, 우렁이들의 사랑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162, 163면)

 <서커스 서커스>를 통해 바라 본 최인석의 유토피아가 이제 보인다. 사랑이 우렁이 각시를 사람으로 만들 듯이, 사랑만이 존재의 근본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존재들간의 사랑만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 글 중에 최인석의 기독교 이해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당시 최인석은 중요한 신의 속성 한 가지를 빠뜨린 것 같다. 인간이 악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넘어선 '사랑'때문이 아닐까 한다. 굳이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제 최인석은 어찌하든지 사랑으로 유토피아를 만들어가자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대학원생과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이성만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이성 더하기 알파, 알파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야말로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모성적 이성, 관대한 이성, 이런 생각을 해보는 적도 있습니다......나는 모성적 이성이라고 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해나 지식, 이런 것의 가장 작은 씨앗이 되는 것은 관심이나 사랑이 아닐까......그러니까 사랑이나 관심이 없는 이성, 남성적이고 지배적이고 재판관 같은 이성이라기 보다 모성적이고 따뜻하고 관대한 이성, 이런 것을 상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수용소 없는 혁명, 이런 것을 생각해보는 겁니다.(최인석,정여울 대담<세상의 모든 우렁이들에게><서커스 서커스>, 책세상 2002.)


  살펴본 것과 같이 최인석이 유토피아에 다다르기 위한 도정(道程)은 사뭇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유토피아를 열망함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다. 결코 희망도, 내일도 없으며 고통만이 확실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영원'을 발견한 랭보처럼 최인석도 힘겹게 발견한 유토피아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커스보다, 무거운 등껍데기 보다 우렁이를 더욱 힘겹게 하는 것은 눈을 빼꼼이라도 들어 쳐다볼 수 있는 하늘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인석이란 우렁이가 바라 본 하늘은 오늘 맑게 개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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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인> / 최인훈 / 문학과지성사 / 2008

 

회색의 영혼, 사랑과 시간의 이중주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신현림의 이 시가 떠올랐다. 관념적인 것도 그렇고 또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라는 화자의 토로가 독고준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독고준은 말한다. “젊은 사람이 할 만한 일이라면 사랑과 혁명일 것이다.” 하지만 혁명을 하기에는 마음은 높고 현실은 낮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과 시간’이다. 역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시간이다. 시간은 역사의 한 요소이자 지배자이기도 하다. 이 시간 앞에 역사는 언젠가 무릎 꿇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지배하고 이루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신현림의 시에서 수많은 시간을 들여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과 싸워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듯이 독고준도 사랑으로 채워진 시간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려 한다. 이제 독고준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이 소설은 최인훈의 여타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 속에 별다른 사건을 갖지 못하고 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김학이 독고준의 하숙방을 찾는 것을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인물들의 외적 변동이 거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회색인>의 연작소설이라 할 수 있는 <서유기>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의 서두는 독고준이 이유정의 방에서 나오는 것으로 시작되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몇 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자신의 뇌리를 스쳐갔던 단상들로 한 권의 소설을 끝마치고 있다.  

  독고준은 이북이 고향인 평범한 문학도이다. 그에게는 김학이라는 정치학도 친구가 있는데 김학의 권유로 정치학과 학술 동아리인 ‘갇힌 세대’에 들게 된다. 무엇이 이들 자신을 ‘갇힌 세대’로 생각하게끔 했을까? 이들의 불만은 정치학도들답게 정치적이다. “자유의 역사에는 끈적끈적한 피가 엉겨붙어 있어. 우리들의 경우는 피 대신에 막걸 리가 흐르고 인간의 모가지 대신에 고무신이 굴러가고 있어” ‘갇힌 세대’의 일원인 김정도의 말이다. 서양의 역사와 비교하여 우리의 정치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특권을 유지하려는 계급과 그것을 거부하는 계급 사이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왜냐하면 다름아닌 그들의 피를 주고 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서구로부터 민주주의를 이식받았다. 때문에 막걸리 한 잔과 고무신 한 짝에 표를 파는 것이다. 서구인들에게 있어 피, 그리고 자신의 모가지와 같은 표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막걸린 한 잔과 고무신 한 짝보다 못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힘이 아닌 남의 힘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갇힌 세대’의 동인들은 각각 처방안을 내놓는다. 그 중 김학의 의견은 주목할 만하다. 학은 젊은이답게 혁명만이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급진적인 학의 의견에 준은 다소 끌리기도 하지만 그는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시간’이다. “애써도 추켜세울 수 없는 이 허물어진 마음. 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 묻혀서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자는 이 몸가짐.” 준은 이렇게 회색의 의자에 앉아 사랑을 하고자 하고 또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관조라는 말이 여기에 꼭 어울릴 것 같다. 

  최인훈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관조적 태도는 다른 소설들에서도 자주 보인다. <GREY 구락부 전말기>에서 M이라 불리는 창백한 청년은 “우리는 잿빛을 사랑하는 자로 나섭니다. 어찌하여 속물들은 ‘치기’를 그리도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분명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마다한다고. 잿빛의 저녁놀 속에서만 슬기의 새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눈을 뜹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의 중세에 있어서 회색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회색의 회한의 잿빛이요 고뇌의 조짐, 미덕과 악덕, 환희와 고통의 혼인으로 신이 타기하는 어중간한 위인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전에 신이 타기하던 이들을 지금에서도 우리는 몰아내야 하는 것일까? 독고준의 태도는 허무주의 혹은 순응주의로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독고준의 깊은 곳을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독고주의 시간들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준은 작품 속에서 자주 자신의 고향인 W시를 떠올린다. 그 곳에는 가족, 오월의 사과꽃 그리고 가을의 코스모스 등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느꼈던 소년 독고준의 행복도 깨지고 만다. 그것은 존재의 자각 때문이었다. 자신은 분명 그대로인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예전과는 달리 대한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 준은 변해가는 주위의 시선(사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일탈의 두려움에 다시 그곳에 속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준은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귀를 찢는 듯한 제트기의 공습을 피하려 들어간 방공호 속에서 한 여인이 그를 뜨겁게 포옹한다. 소년 독고준은 놀라 숨을 헐떡이지만 이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커다란 의미가 되어버린다. 준에게 있어 이 경험은 사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시린 아픔 중에서 이 여인을 만나고 뭔가 알지 못한 따뜻한 느낌을 갖는다. 그것은 훗날 그가 청년 시절 여성들로부터 그토록 얻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랑’이다. C.G.융이 말하는 ‘아니마’가 독고준의 경험 속에서 엿보인다. 독고준은 아니마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녀의 얼굴이 겹쳤던 방공호 속의 여자의 얼굴. 폭음. 살 냄새. 여름날의 햇빛. 밤나무숲에서 멀리 도시를 바라보던 소년의 설렘.” 준은 김순임으로부터 방공호 속 여자의 환영을 발견한다. 하지만 김순임도 어디까지나 방공호 속 여자의 환영일 뿐이다. 이후 그는 사랑의 원형을 찾기 위해 이유정에게 구애하기도 하고, 자신의 시간의 원형이기조차 한 부친의 고향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김순임에게서도 그랬듯이 그들은 어디까지나 환영이고 흔적일 뿐이다. 독고준은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경주, 또 경주하지만 그것은 모습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독고준의 사랑을 얻기 위한 시간들은 이미 그것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황선생이 말하는 불교의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랑이 독고준의 시간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랴?” 이 독고준의 아포리즘에서 나는 그의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확인하고, 또 기대한다.

  최인훈은 얼마 전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고별 강연회에서 독특한 예술론을 펼쳤다. “예술은 때로는 엄숙하게 폼 재고 종교의 모자를 엉터리로 갖다 쓰기도 하지만, 예술은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돌격 5분 전에 휴식을 취하면서 부르는 노래, 그 때 피우는 담배 한 개비 같은 것이다.” 생의 한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은 이 때의 노래의 재미, 그리고 담배의 맛과 같은 것이 아닐까? 독고준의 치열함을 더욱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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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1-5권) / 막스 갈로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영원히 살아있는 나폴레옹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이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한 이 말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말들 중 하나일 것이다. 7-8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그마한 위인전에서 읽었던 이 말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에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쾌재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그가 마지막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생을 마감할 때는 눈물을 참으며 슬퍼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로 나폴레옹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7-8년이 지난 시절의 감동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폴레옹’, 항상 그를 따라 다니는 부정적 수식어들. 독재자! 내가 그를 존경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 점을 이 책을 불식시켜줬고, 또 그로 하여금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시켜줬다. ‘독재자’, 과연 그는 독재자였을까? 우선 이책은 나에게 이 점을 불식시켜줬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코르시카’라는 섬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프랑스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동료들에게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고독과 열등감을 이겨내에 황제에까지 이르는 그의 삶을 뒤돌아보면 어쩌면 그의 독재자적 성향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민중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며 몇 백년간 유지되어온 전제 군주제를 타파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였기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평생동안 민중의 의견, 즉 ‘여론’을 가장 중요시했던 좀을 생각하면 그가 독재자가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귀족을 상징하는 흰색기를 내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내 건 그의 모습에서 그의 이러한 점을 더 잘 알 수 있다. 어느 주간지에서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막스 갈로는 “나는 감히, 나폴레옹은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지나친 비약일는지는 모르지만 국립 학교의 설립, 이혼할 권리 주장 등 그의 행동은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수긍이 가게도 한다. 어쨌든 이 책은 그가 독재자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에게 진정한 애국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프랑스의 속국인 한 섬에서 태어난 그였기에 유년 시절 그는 프랑스를 자신의 고향을 정복한 나라, 반드시 자신이 정복해야 할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커가면서 마음을 달리 먹었다. 프랑스는 그가 성장하게끔 한 나라라고, 그가 사랑하고 이끌어가야 할 나라라고. 이후로 그는 프랑스의 명예와 행복을 위해서만 살게 된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것은 다름 아닌 프랑스 민중이었다. 민중은 그를 존재하게끔 해주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유일한 대상이라며. 이러한 그의 민중, 즉 조국 사랑은 한 가지 행동을 통해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들 사리사욕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황제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돈, 즉 재물에 초연했다.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라며. 그에 반하여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두 전직 대통령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 형성으로 구속되었던 사실은 나폴레옹의 행동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작금의 현실은 반성하게끔 해주었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애국일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진정한 애국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느꼈던 그의 새로운 면모는 그가 죽은 지 약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영향력이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봤던 기사가 생각난다. 최근 영국 총리 관저로 파리 시의회 의원으로부터 편지가 배달됐다. 내용은 이렇다. 파리 시의회 의원이 영국 총리에게 유로스타 기차의 런던 종착역인 워털루 역을 개명해주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워털루! 나폴레옹군이 영국군에게 격파된 곳. 나폴레옹, 그의 찬란했던 업적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곳. 그곳에서의 전투가 끝난 지 1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건이 양국간의 미묘한 감정대립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 기사를 통해 나는 그의 힘, 영향력을 느꼈다. 약 200년 전 인물의 업적이 지금까지도 문제시되고 있다니! 이 책의 마지막 구절처럼 나폴레옹, “그는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업적으로. 작가의 글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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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1-15권) / 시오노 나나미 / 한길사 / 1995-2007
  

  팍스 코리아나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 / 한길사 / 1999년 / 314-316면 수록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긴 노력의 과정이 필요한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경구처럼 사용하는 이 말로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로마하면 떠오르는 것들 중 나는 우선 천년제국이 떠오른다. 도대체 로마는 어떤 나라이기에 1천 년 동안이나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어 융성의 세월을 누렸는지 그것이 궁금하였다. 강한 군사력, 아니면 경제력? 누구나 그 나라의 융성을 논할 때는 군사력 아니면 경제력 등의 외적 요인에서 그 이유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는 그러한 외적 요인에서 로마 융성의 원인을 찾고 있지 않다. 바로 개방성이라는 내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작가의 이러한 의견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개방성이 무엇이기에 로마 융성의 원인을 그 한마디로 단정 짓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차츰 책을 읽어가면서 로마인들이 개방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과는 다른 타문화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나도 작가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되면서 얻었던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개방성과 결단성의 중요성이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는 로마 융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개방성과 관용성에 두고 있다.

  타문화의 이질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발전함으로써 오히려 타문화를 가진 사람들까지 동화시키는 그들의 개방성에 로마 융성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개방성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로마의 시민권’이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적장도 내일이면 로마의 시민권을 얻어 아군의 장군으로 기용하고 타국의 노예도 로마에 들어오기만 하면 시민권을 얻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로마의 시민권은 그들의 개방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라 하며 남의 인권을 존중해준 행동과 항복한 마르세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지 않고 독립국으로서 존속하는 것을 허용해 준 행동에서는 로마인들의 관용성을 느낄 수 있었다.  

  로마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보며 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요즘 왕따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너는 우리가 아냐”하며 자신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이면 따돌리는 배타적 성향 때문에 왕따 문제도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러한 시점에서 로마인들의 개방성과 관용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로마인들처럼 좀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로 어떤 일에 임한다면 왕따 문제 같은 배타적 성향에서 야기되는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사회문제에 앞서 나 자신도 많이 변화된 것 같다.

   다음으로 이 책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결단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브루투스, 스키피오, 옥타비아누스 등 이 책에는 로마를 이끈 수많은 지도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정치 체제 등의 개혁을 통해 로마 융성의 시대를 이끈다. 요즘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개혁일 것이다. 정치 개혁, 경제 개혁, 교육 개혁 등 일련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점에서 로마 지도자들의 개혁과 지금의 개혁을 비교해보았다. 어느 책에서 개혁은 위로부터의 변혁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지도층으로부터의 변혁이라는 점에서는 양자가 같지만 로마의 개혁과 지금의 개혁 사이에는 뭔가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지도자의 결단성의 차이이다. 한 가지 실례로 카이사르는 원래 귀족 출신이지만 귀족들이 대부분을 이루는 원로원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그 원로원이 부패했다고 생각하여 쇄신을 위해 루비콘강을 건넌다.

  그에 반하여 우리 현실에서의 개혁은 어떠한가? 목표만 거창할 뿐이지 개혁이 진행되다보면 학연, 지연, 등 사적 이익에 얽매여 처음의 개혁 목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만다. 카이사를 보라! 자신과 같은 신분인 귀족들의 이익보다는 로마 시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루비콘강을 건너는 그의 행동에서 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결단성의 중요성을 느꼈다. 나 자신부터도 이제는 어떤 일에 임했을 때 좀 더 결단성을 갖고 행동해야겠다. 
  

  그리스인보다 못한 지력, 켈트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한 체력,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한 기술력, 카르타고인보다 못한 경제력으로도 로마인들은 천년제국을 이루었다. 바로 개방성과 관용성, 그리고 지도자의 결단성으로 그들의 단점을 보완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가 로마인들에 비하여 모자란 게 무엇인가? 우리도 로마인들처럼 자신의 단점을 선각하고 그 단점을 보완해갈 자신만의 장점을 깨달아 활용한다면 우리도 21세기에는 로마 못지 않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21세기는 분명 팍스 코리아나의 세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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