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동안에 독자가 흔히 겪게 되는 가장 놀랍고도 다채로운 경험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감정이입'이 아닐까 싶다. 숱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 상황' 속에 '자신이 겪은 경험'을 대입시킨다. 그럴 경우에 독자들이 저마다 소설 속에 이입시키는 감정들이 얼마나 각양각색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독자들이 저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유일하고 독특한 경험만큼은 결코 남들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감정이입'이 매우 비슷하게 나타날 만한 드문 예외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경우일까?

 

만약에 어떤 특정한 시기에 몇몇 독자들이 어떤 특정한 작품을 거의 동시에 읽는 경우가 있다면, 그들은 비록 서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약간이나마 서로 비슷한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어떤 강렬한 충격을 던져 주는 놀라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와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한동안 그런 사건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럴 경우라면 아마도 몇몇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읽고 있는 어떤 특정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는 아주 특이한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독자들이 저마다 겪은 삶의 경험들이 비록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이런 희안한 상상을 하게 된 까닭은 바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는 도중에 경험한 '다소 기이한 감정이입' 때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기묘한 '연애 사건'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느 유명한 미투 사건'을 떠올렸는데, 만약에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더라도) 나와 똑같이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나 말고도 몇 사람쯤 더 있었더라면, 그 사람도 틀림없이 나와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흥미진진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최근의 미투 사건 당사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어찌 그리 쏙 빼닮았는지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나왔으니 내가 적잖은 놀라움을 가지고 '거듭' 읽었던 그 대목을 여기에 잠깐 소개해 보고 싶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연애 사건'은 예로부터 너무나 자주 다뤄지는 몹시도 전형적인 '연애 사건'이기 때문에 '서로의 속사정'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사건의 개요는 대략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에밀리는 청순 가련하면서도 몹시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배운 거나 가진 게 거의 없는 시골 처녀이다. 남자 주인공인 스티어포스는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 쏟아 키운 훌륭한 집안의 귀한 자식이다. 옥스퍼드를 졸업했을 정도로 두뇌도 명석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품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서 장래가 몹시 촉망되는 젊은이다.

 

어릴 때 같은 학교에서 동창생으로 함께 어울려 지냈던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어느 날 스티어포스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2주일쯤 여행을 가게 되고, 거기서 두 사람은 데이비드의 어릴 적 유모였던 페거티 양의 오빠네 식구들과 함께 어울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선원으로 일하는 페거티 씨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던 에밀리(매형의 딸)와 햄(형의 아들), 그리고 동료 선원의 미망인인 거미지 부인과 함께 넷이서 바닷가에서 '배로 만든 집'에서 함께 살면서 너무나 행복하게 오손도손 지내던 터였다.( ☞ "디킨스 소설속 거미지부인 닮아가지만"…하퍼 리 편지 사후공개)

 

에밀리는 꼬마일 때부터 너무나 예쁜 모습이어서 페거티 씨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따금씩 페거티 씨네 뱃집으로 여행을 왔던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도 그녀에게 첫눈에 홀딱 빠질 정도였다. 차츰 나이가 차게 되자 에밀리는 우직하고 믿음직스런 총각인 햄을 사랑하게 된다. 그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생각만으로 들떠 있던 에밀리의 얼굴에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희미한 옅은 그늘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녀는 어느 날 하루 아침에 홀연히 바닷가 마을에서 사라지고 만다!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꼬마 에밀리, 잊을 수 없는 첫 사랑 - 데이비드 코퍼필드...)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런던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놀러 왔던 스티어포스가 런던으로 되돌아간 이후, 아무도 몰래 자신의 충직한 하인을 시켜 바닷가 마을에 몰래 남아 에밀리를 꼬드겼던 행적이 밝혀졌고, 처녀 에밀리가 동네에서 사라진 날 아침에 바로 그 하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바닷가를 급히 떠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다. 에밀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햄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친딸처럼 몹시도 아끼고 사랑했던 페거티 씨도 비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작정 조카딸 에밀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이내 데이비드와 함께 런던에 있는 스티어포스네 집까지 직접 찾아가게 된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부인?" 페거티 씨는 조용한 투로 천천히 반박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부인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애가 지금의 백배쯤 더 귀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제가 이보다 더 그애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부인께선 모르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재물도(비록 저한테는 그런 것이 없지만) 그 애를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서 그 애를 구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다시는 그 애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애를 고이고이 길러 왔습니다. 십몇 년 동안 함께 살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듬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애의 아름다운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헤어져서, 머나면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기꺼이 그 애를 남편에게ㅡ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ㅡ맡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서 위아래 구분 없이 살 수 있는 날을 꾹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련됐다고는 할 수 없는 그의 능변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인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한 가닥의 부드러움이 엿보였던 것이다.

 

"나는 둘러댈 이유도 없거니와, 당신의 말을 반박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절대 안 된다고 거듭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결혼은 우리 아이의 일생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 놓을 것이며, 그 애의 앞길을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달리 보상할 방법이 있다면 하겠습니다만ㅡ"

 

"아아,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군요." 페거티 씨는 불꽃이 이는 눈으로 뚫어지게 부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집 난롯가에서, 그리고 내 배에서 곧잘 보았던 그 얼굴과 똑같군요. 끔찍한 배신을 꾸미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의 집 처녀를 타락시켜 망쳐놓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니라 성격도 똑같군요. 아니지, 여자이니만큼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겠군요."

 

부인의 태도는 갑자기 변했다. 그녀의 온 얼굴이 노기로 가득 차면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안락의자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나와 내 아들 사이에 이토록 깊은 수렁을 파놓고, 내게 어떻게 보상하실 생각입니까? 당신의 사랑 따위가 내 사랑에 비교나 될 줄 아십니까? 당신이 그 애와 헤어진 것이, 내가 우리 아이와 헤어진 것에 비교해 무엇이 대수라는 겁니까?"

 

미스 다틀이 뒤에서 부인의 몸에 살며시 손을 대고 머리를 숙여 소곤거렸으나 부인인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로사.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이 사람에게 내 뜻을 알려 줘야 해요! 잘 들어요. 내 아들로 말하자면 내 삶의 전부예요. 나는 그 아이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 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으며, 그 애가 태어난 뒤로는, 말하자면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 애가 순간이나마 보잘것없는 계집애와 눈이 맞아서 이 어미를 버리다니! 그깟 계집애 때문에 이토록 굳건한 어미의 믿음을 거역하고, 내 곁을 떠나다니! 나는 내 아들에게 어미에 대한 의무와 사랑, 감사하는 마음을 갖길 기대했었어요. 그 아이와는 소원해지기는커녕 날로 돈독해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이런 볼썽사나온 연애문제로 단박에 파탄나다니! 그런데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다시금 로사 다틀이 부인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안 돼, 로사. 한 마디도 하지 마! 그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그 애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자 한다면, 나도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내가 사랑하므로 물려준 재산을 가지고 그 애가 어디론가 가겠다면 멋대로 해도 좋아!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꺾일 줄 알고? 천만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애는 이 어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 애가 마음을 바꾼다면 내 기꺼이 그 애를 맞아주겠어. 그러나 그게 싫다면 그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든 죽어서 돌아오든 이 집에는 절대로 들이지 않을 거야. 그 천한 계집애와 영원히 헤어져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못 돌아오는 거야. 이것은 어미의 권리이니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겠어!" 처음 만났을 때의 거만하고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이래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부인의 이러한 말을 들으며 그 태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어쩐지 그 어머니에게 대드는 아들의 말과 표정이 선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스티어포스에게서 보아온 고집 세고 방자한 모습이 부인에게도 그대로 있었다. 이상하게 비뚤어진 그의 정열을, 이제는 모두 이해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그 둘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것도 알았다.

 

부인은 전과 같은 자제력을 되찾아, 더 들어도 소용없고 말해도 소용없으니 이것으로 면담을 끝내자고 말했다. 부인은 방에서 나가려고 위엄 있는 태도로 일어섰다.

 

그때 페거티 씨가 일어설 필요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막지 않겠습니다. 저도 더 이야기할 것은 없습니다, 부인." 그는 문께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차피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다만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집은 저나 제 조카딸에게는 몹시 유해하며, 제정신으로 무슨 부탁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왔다. 스티어포스 부인은 안락의자 옆에 서 있었다. 과연 고귀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돌바닥으로 된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양쪽 벽과 지붕 모두 유리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잎도 새싹도 푸르렀고, 마침 아주 맑은 날이었으므로 정원으로 이어진 유리문도 양쪽으로 활짝 젖혀져 있었다. 우리가 문 가까이 갔을 떄 로사 다틀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내게 말했다.

 

"저런 사람을 이곳에 잘도 데려왔군요!"

 

그녀의 얼굴빛을 흐리게 하고 그 검은 눈 속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분노와 비웃음으로 인해, 쇠망치에 맞아서 생긴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전에도 보았듯이 상처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느닷없이 손을 들어 그곳을 때렸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옹호하면서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죠, 네?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미스 다틀," 나는 대꾸했다. "당신이 설마 나를 꾸짖는 건 아니겠죠?"

 

"그렇지만 당신은 어째서 그 광적인 모자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죠? 그들은 둘 다 자기 고집과 자존심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게 내 탓이란 말입니까?"

 

나는 대꾸했다.

 

"그렇고말고요! 왜 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셨습니까?"

 

"저분은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사람입니다. 미스 다틀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물론 알고 있어요. 제임스 스티어포스는," 그녀는 손을 올려 가슴을 눌렀다. 마침 그곳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우가 고스란히 목소리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보가 뒤틀린 잔인한 사람이에요. 성실치 못하고 퇴폐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배신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이나 그 조카딸인가를 제가 염려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미스 다틀, 당신은 저분을 또 한 번 모욕하는군요. 상처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넉넉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저분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두 사람 모두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인걸요. 그 계집을 흠씬 매질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페거티 씨는 아무 말도 없이 우리 곁을 지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미스 다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무죄도 없이 지독한 일을 당한 저분을 당신은 어찌 그렇게 마구 짓밟을 수 있습니까!"(534∼538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런 스토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TV 드라마에서 너무나 자주 봐왔기 때문에 새로울 게 별로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변치 않는 '익숙한 구도' 하나가 새삼 눈에 밟힌다.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 제공자는 언제나 남자 쪽에서 시작되고, 피해자 역할은 대체로 여자가 떠맡는 반면에, 정작 연애 사건이 문제가 되고 나서는 거의 언제나 남자 쪽에서 도리어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남 탓'을 한다는 구도 말이다. 물론 가끔씩 여자가 남자를 꼬드기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이런 구도에 놓인 남녀가 겪게 되는 갈등은 스토리 전개 과정이 너무나 뻔하다. 많은 걸 갖춘 쪽에서는 '남자의 앞길을 망치게 생겼다'느니 '크나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면서 길길이 날뛰고, 여자 쪽에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데도 도리어 무슨 '크나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이내 수세에 몰리거나 괜한 오해와 함께 턱도 없는 비난을 받기 쉽다.

 

따지고 보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 만큼 인간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경우도 드물다. 저 까마득한 옛날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도 따지고 보면 트로이의 얼빠진 총각이 헬라스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유부녀였던 헬레네를 납치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소동이었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상세히 다룬 '악티움 해전' 또한 로마의 유부남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돌싱녀 클레오파트라와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의 입장이 뒤바뀐 경우이긴 하지만 『오셀로』의 비극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나이도 많고 피부까지 검었던 용병대장 오셀로 보다는 베네치아에서 손꼽힐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데스데모나가 훨씬 더 갖춘 게 많았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때 무척이나 인기를 끌었던 불륜 소재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은 제목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연스레 싹트는 진실된 사랑이 아닌, 언제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불륜이거나 가짜 사랑일 테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히는가를 이번 미투 사례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우도 드물지 싶다. 미투 덕분에 하루 아침에 흉칙한 괴물로 둔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두고 시비곡직을 가려줄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다만 '가짜 사랑'임이 이미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한사코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온갖 가식과 허위를 거듭 덧보태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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