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아내와 함께 TV 뉴스를 보다가 '참으로 이상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발단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TV 앞에서 잠깐 나눈 대화의 촛점만은 아주 간단했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면서 이런 얄궂은 질문을 떠올린 건 물론 '미투 열기' 때문이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양상'이 너무나 비슷했다. 미투에 엮인 사건들마다 '가해자의 주장'과 '피해자의 주장'이 정반대로 달랐다. 심지어는 미투와 아무런 관련조차 없는 '미투 가해자의 절친'마저 엉뚱한 문제로 뉴스에 뒤섞여 등장했다. 그 사람이 하필이면 미투 가해자가 오랫동안 도지사로 근무했던 바로 그 지역의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는 바람에, 애먼 가해자(?) 측과 엉뚱한 문제로 연일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피해자의 주장과 가해자의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 중인 사건은 물론 2011년 12월 '어느 날' 여의도의 모 호텔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성추행 피해 사건'이었다. 마침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서울시장 예비 후보 출마 선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사건'이 폭로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터져나온 '7년 전 성추행 사건'을 두고 양 쪽은 연일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낮에 발표된 가해자의 '최신판 반박 회견'에는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데 충분해 보일 만한 '사진 증거물'까지 제시했다. 그 바람에 이제는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명백해졌다. 어쨌든 가해자는 23일이든 24일이든 '여의도의 모 호텔'엔 아예 가지도 않았다고 딱 잡아떼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녁 뉴스를 보는 와중에도 어느새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지나갔다. 자신이 직접 가해자와 함께 23일 오후에 그 호텔에 갔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등장한 증인의 주장도 꽤나 놀라웠지만 저녁 늦게 등장한 '피해자의 새로운 반박문'은 더욱 놀라웠다. 그 두 사람의 주장만 들어보면 가해자가 주장하는 '피해자가 꾸민 대국민 사기극'이야말로 진짜로 '대국민 사기극'이 틀림없어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진실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저 '위대한 판관'인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 관전하는 사람들로서는 그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싶다.(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이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처음부터 오늘까지 한시도 '피해자의 주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의 확신은 오늘 가해자가 내세운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사진 증거물' 때문에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해'한 사실이 아예 없었다면 굳이 저런 구차한 증거물까지 내세울 필요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튼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좋다. 여기서 다시 내가 내세운 나의 화두로 얼른 되돌아 오자.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다가 이 화두를 맨 처음 던진 사람이 나였는지 아내였는지조차 어느새 헷갈린다. 최근 며칠 동안에 보도된 여러 사건들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를 너무 뒤죽박죽으로 만든 탓일까. 아무튼 이런 화두가 아내와 나, 두 사람 가운데 한 쪽의 입에서 틀림없이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내가 '피해자의 주장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가해자의 이상한 해명 때문이었다. 이런 해명이야말로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은 7년 전이고, 이 기억을 다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해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건 당일을 전후한 여러가지 다른 일들은 아주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해자와의 만남 여부'에 대해서만은 한사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나에겐 이보다 더 강한 '거부 신호'를 보내는 해명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중요한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일까.
과연 그럴까. 아무리 7년 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하루 온종일 연속해서 일어났다면 그 기억이 결코 흐릿해질 리는 없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무심코 나의 옛 추억들을 무수히 다시 떠올리게 만든 '어느 소설가의 경우'가 생각이 나서, 그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불쑥 꺼내고 말았다.(마침 그 사람이 쓴 자서전 같은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도 열심히 읽는 중이었고, '기억의 메카니즘'이 사람마다 다른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영국의 어느 필담 좋은 소설가의 경우는 말이지...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자신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겪은 온갖 일들을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내는지, 까마득한 옛날 일들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잘 그려놓았더라구. 표현들도 어찌나 놀랍던지, 읽는 내내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더라구..."
"그래?"
"그 작품을 읽는 동안에 나도 덩달아 무수히 많은 까마득한 옛날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지.. 어느 겨울날, 양지 바른 햇살이 내리 쬐는 창고 같은 건물 벽면에 잔뜩 쌓아 놓은 짚더미 사이에 몸을 눕히고 볕을 쬐다가, 그만 꼬박꼬박 졸던 추억들 까지도.. 아무튼.. 온갖 등장인물들이 다들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문장들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고 물 흐르듯 청산유수인지, 셰익스피어를 쏙 빼닮은 느낌이더라구......"
"그래? 그게 누군데?"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찰스 디킨스라고 들어 봤어?"
"그 사람 알지.. 들어는 봤어.. 마침 어제 TV에도 나오던데? <서프라이즈>에서 말이야..."
"아니, 그 사람이 <서프라이즈>에 나왔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다니까.. 무슨 무슨 드루드의 미스테리인가 하는 소설을 썼다고 하던데, 아직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하더라구... 그게 아마도 미완성인 추리소설이었다나 뭐라나... 작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통에 그랬다나 봐..."
햐~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요즘 한창 빠져서 읽고 있는 책이 바로 찰스 디킨스의 작품이었고, 그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까지 '해설'까지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그 작품의 '이름'을 나도 들어봤던 것이다. 아니다.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어느새 실제로 구경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어제 말이다. 결국 어제 하루 동안에 아내는 집에서 TV를 통해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보았고, 나는 같은 날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의 '실물'을 뒤적거리며 구경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나도 사실은『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알고는 있지... 그런데 그게 미완성인 추리소설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그 책이 국내에서 이미 번역까지 되어 나와 있을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마침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그 책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왔었는데, 바로 그 책이 TV에 소개되었다니 정말 놀랍군...."
"그랬구나.."
아무튼 찰스 디킨스가 미완성으로 남긴 그 작품이 아직도 그토록 화제일 줄은 몰랐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 작품을 두고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아직도 무슨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범인이 누군지만큼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도 드문데, 천재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바로 그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으니, 어찌 사람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는 일조차 마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쨌든 '범인'은 기어코 찾아내야 할 테니.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시선강탈] ‘서프라이즈’ 지금까지 논란 중인 찰스 디킨스의 애드윈 드루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