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본시장의 흐름을 바꾼 불후의 명저

















벤저민 그레이엄의 불후의 명저인『증권분석』(1934년판) 국내 번역본이 '저작권법 위반'이라는군요.

초판본은 역사적인 책이기도 하고 희귀본이기 때문에 현재 미국에서도 1,000달러 이상에 거래된다고 하고,
초판의 국내 번역본(박동욱, 하상주 역) 역시 출간 2년여 만에 '너무 일찍' 절판된 이후,
중고서적 매매가격이 한 때 20만원을 넘나들 정도로 '희귀본' 대접을 받았던 책이었는데,
저간의 사정을 알고 보니 정말 '희귀본'이 될 것 같네요.

혹시라도 이 책을 운 좋게 구입해 두신 분은 '저작권법 위반으로 인해 시중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희귀본'임을 아시고,
더욱 애착을 가지고 소장하시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아마도『증권분석』(제3판,1951년) 번역본이 역자를 바꿔 재출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을 구입하기 어려우신 분들은 최근에 나온『증권분석』(제3판) 번역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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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0년 전에 쓰여진 투자에 관한 가장 훌륭한 고전
    from Value Investing 2011-03-16 17:29 
    만약 사고의 명확함이 요구되면, 그에게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만약 격려나 조언이 필요할 때면, Ben이 그곳에 있었다.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다른 사람이 그 나무 아래서 쉬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면Ben Graham이 그런 사람이었다.-워렌 버핏,《Financial Analysts Journal》기고문(1976년) 中에서* * * * *지금으로부터 117년 전인 1894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895년 부모님을 따라뉴욕으로 이주한 벤저민
 
 
마녀고양이 2010-12-23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아쉬워요.
밑에 리뷰 말씀하시는거죠. 이걸 왜 놓쳤지.
내리시기 전에.... 빨리 읽어야겠어요.

oren 2010-12-23 14:06   좋아요 0 | URL
쉬운 방법이 한 가지 떠올랐어요~

최근에 새로 번역되어 출간된『증권분석』제3판(1951년판)을 주문해 놨는데, 그 책이 도착하는대로 얼른 훑어보고 난 뒤에 그 책의 리뷰글로 다듬어 올리면 되겠더라구요. 어차피 초판(1934년판)이냐 3판(1951년판)이냐의 차이만 있는 책이니까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작권 위반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초판본의 번역이 너무 꼼꼼하고 훌륭하다는 점이겠지요.

2010-12-24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마지막 현장고증!
조선의 오천년 역사와 백두산의 생태를 함께 담은 안재홍 선생의 대작을
원전의 맛을 그대로 살린 정민 교수의 현대적인 풀어 읽기로 새롭게 만난다


역사의식의 부재로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자존감마저 희박해진 듯한 시대, 진정 우리의 가능성은 무엇이며 갈등의 질곡을 넘어 사회를 통합해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이념과 계급을 초월한 통합사회를 꿈꾼 민세 안재홍

국학 연구와 신민족주의를 주창하며 핍박받는 민족에게 자랑스런 역사를 일깨우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한 독립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홉 번의 투옥에도 일제와의 타협을 끝내 거부했고, 신문사 8년 재직 중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을 집필하며 이념과 계급을 초월한 통합사회를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지성, 안재홍 선생을 되새겨보자는 흐름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때, 문장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그의 역사의식과 민족애 등을 다각적으로 엿볼 수 있는 책 <백두산 등척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뜻깊은 저서이다. 작품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30년대 문투 때문에 독자들이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많았기에 새로이 한문학자 정민 교수가 풀어 읽고 자료사진을 함께 수록한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로 세상에 내놓는다.

16일간의 백두산 여행을 담은‘한국의 명산서’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장소라는 점에서 백두산에 오른다는 것은 일제에 맞서 민족혼을 고취한다는 의도가 담긴 행위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지식인 계층에서 백두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민세 안재홍 선생은 변영로, 김상용 및 식물학자, 곤충학자 등과 함께 16일 동안 여행했는데, 1930년 7월 23일 경성에서 출발하여 백두산을 등정하고 8월 7일 북청으로 내려온 뒤 바로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저자 스스로도 “『백두산 등척기』의 저술은 기타 일반적인 기행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보기를 망설임없이 권하는 바이다”고 했다. 이 작품은 연재한 이듬해인 1931년에 유성사서점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고, 2006년에는 한국산서회 선정 ‘한국의 명산서 베스트 20’에 올랐다.

이 책은 백두산의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에 대한 섬세한 묘사뿐 아니라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통찰을 바탕으로 백두산 정계비에 얽힌 국경문제, 간도를 둘러싼 분쟁의 역사적 이력, 변경 곳곳에 서린 각종 전설과 풍문, 동식물의 생태 등을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 안에 균형감 있게 담아내 기행문으로서의 감동뿐 아니라 사료적인 가치도 큰 작품이다. 특히 백두산 정계비는 이듬해(1931년) 만주사변으로 소실됨으로써 저자가 남긴 당시의 위치 실측과 비석의 모습 등이 마지막 현장 고증 자료가 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자료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 돋보이는 책


<백두산 등척기>뿐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쓰여진 작품들 중 한문투가 지극히 많아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은 것에 대해 풀어 읽은 정민 교수는 “근대 시기의 글이 오늘의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번역의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한자어를 풀이하거나 주석을 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문장의 결까지 바꿔 그 알맹이를 알차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그는 1940년에 발간된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현대어로 풀어 2005년『꽃밭 속의 생각』으로 펴낸 바 있다. 이번 『백두산 등척기』를 풀어 읽기 위해 “내용은 빼거나 보태지 않는다. 한자말은 풀어쓴다. 긴 글은 짧게 끊는다. 구문은 현대어법에 맞게 바꾼다. 한 문장도 남김없이 다 바꾸고 하나도 빠뜨림 없이 그대로 실었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80년 시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장의 제목인 “定界碑邊山海悲”는 “정계비 곁 산해의 슬픔”으로, 본문 중에 있는 “갓모峯 雪嶺等 諸山에까지 雄大壯麗하게 擁立된 한 中間에 無盡藏으로 展開된 蒼蒼한 大樹海가 一碧萬頃 純一히 쭉 늘어서서 森森肅肅渺渺茫茫하고 蕩蕩悠悠玄玄寂寂하야”는 “갓모봉과 설령(雪嶺) 등 여러 산에까지 웅대하고 장려하게 둘러선 한 중간에 무진장으로 펼쳐진 창창한 대수해가 온통 푸르게 만경(萬頃)이나 한결같이 쭈욱 늘어섰다. 빼곡하고 엄숙하고 아스라하고 아마득하며 거침없고 유유하고 신비하고 고요하다”로 풀어 성인 독자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어로 읽어냈다.

민족의 정신적 동력이었던 백두산이 중국의 부당한 영유권 주장으로 그 이름을 지키는 일마저 위태로워진 지금, 민족 지성으로 불려온 민세 안재홍 선생의 <백두산 등척기>의 새로운 출간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백두산의 의미를 환기하고 무뎌진 우리의 역사의식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 * * * *

오늘 알라딘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를 통해서 이름만 들어봤던 안재홍의 '백두산 등척기'라는 책이 정민 교수님의 번역으로 이미 두 달 전쯤 나왔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2007년 여름에 백두산을 다녀왔는데,  백두산을 너무 가보고 싶어서 (남한에 있는 백두대간을 다 마치고 마지막 코스로 백두산을 오른 게 아니라) 백두대간 산행을 전문으로 하는 산악회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 당시 급하게 DSLR 카메라를 처음으로 장만해서 갔는데,  사진 솜씨는 영 볼품없지만 '민족의 영산'을 대략 살펴볼 수는 있을 것 같아 그 당시 올려둔 사진을 링크해 봅니다. (백두산, 일송정, 해란강, 용정시내 대성중학교, 윤동주 시비 등 포함)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① 
http://cafe.daum.net/freeMT/Nwh/66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② http://cafe.daum.net/freeMT/Nwh/67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③ http://cafe.daum.net/freeMT/Nwh/68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④ http://cafe.daum.net/freeMT/Nwh/69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⑤ http://cafe.daum.net/freeMT/Nwh/70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⑥ http://cafe.daum.net/freeMT/Nwh/71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⑦ http://cafe.daum.net/freeMT/Nwh/72
백두산 종주산행 사진 ⑧ http://cafe.daum.net/freeMT/Nwh/73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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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른디와의 이별.. 그리고 오두막과 함께 할 나날들에 대한 기대....
    from Value Investing 2011-02-16 13:22 
    DSLR에 처음 입문하면서 만났던 서른디(Canon EOS 30D)와는 이제 오늘밤이 마지막이다. 얼마 전에 갑자기 오두막(Canon 5D Mark II)으로 용감하게(?)갈아타기로 작정하면서 30D는 처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서른디는 2007년 7월에 구입했는데, 최근 몇 년간 가까이 지내왔던 지인분께 그 당시 구입원가의 약 1/3 가격에 뚝~~ 잘라서팔게 되었다.30D와는 그동안 얼마만큼 정도 들었고, 웬만하면 'two body'도 나쁘지 않겠다 싶
 
 
양철나무꾼 2010-12-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두산 등척기,찜해놨어요.
전 '신들의 봉우리' 후유증이라고 자위하지만 말예요.

DSLR카메라 처음이시라는 엄살과는 달리 사진이 예술인걸요~
낯선 카메라여도 들이대는 곳마다 에술이며 작품인 풍경들이어서 인가요~?^^

oren 2010-12-08 11:04   좋아요 0 | URL
'신들의 봉우리'를 오르는 건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되는 일이 아닐텐데, 백두산 만큼은 그래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이니만큼 많은 분들이 직접 가보셨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생각 같아서는 '백두산 탐방 지원 프로젝트' 같은 거라도 누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싶더군요. 그 이전에《백두산 등척기》라도 제발 두루 널리 좀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고 은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지금 만인의 입 하나하나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캄캄한 슬픔으로 울먹이는데
마음 한쪽 가다듬어
이 따위 넋두리 쓸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만인이 선생님이라 선생이라 고개 숙이는데
당신께 형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이제 막 이 이승의 끝과
저승의 처음이 있어야겠기에
황진 몰려오는 날
돌아봅니다
당신의 단호한 각성의 영상
당신의 치열한 형상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 * * * *

30년쯤 전 꼭 이맘때,
학력고사 시험도 다 끝나고,
졸업과 대학 진학을 앞둔 어정쩡한 까까머리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학생들한테
그 당시 '역사(세계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꼭' 읽어보라고 일러주시던 책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강만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최인훈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 · · · · ·

30년 전 그 당시에도 총각이셨던  그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총각으로 남아 계시고,
평생의 소원이셨던 대학 강단에 서 보는 꿈도 이뤄보지 못한 채,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한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高 三子'로 불렸던 존경할 만한 세 분의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 분은 안타깝게도 3년 전에 소천하셨고, 다른 한 분은 금년 여름 정년퇴임식때 뵜는데,
 그 때 고교졸업후 처음으로 역사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대략 '한 세대' 전에 만들었던 리스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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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0-12-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이 리스트에서 읽어본 것이 몇권있습니다.
추억이 점점 일어나네요.
깔끔한 글씨에 빼곡히 쓰여진 리스트..
대부분이 서양과 동양의 고전인데 그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영희선생님의 책
오늘 더 크게 그 자리가 느껴집니다.

oren 2010-12-08 10:48   좋아요 0 | URL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우상과 이성>(1977)은 출판되자 말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저작으로 알려졌었는데, 21세기로 접어든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명저로서의 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이영의 선생님의 혜안이 놀랍기만 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2-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은 님의 시는 읽지말 걸 그랬어요.
다시 가슴이 서늘한 것이 눈물을 흩뿌리게 만들어요.

전 위의 여섯권은 다 읽었는데,
한세대 전 리스트는 X박스여서 볼 수가 없네요.
아쉽습니다.

oren 2010-12-08 10:55   좋아요 0 | URL
고은님의 시는 그냥 읽기 힘들어 그냥 편하게 훌쩍훌쩍 울어가며 읽어야 속이라도 개운할 것 같아요.
X박스는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날텐데, 한 세대 전의 리스트라고 해봐야 별 것은 없답니다. ㅎㅎ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인간은 본능처럼 무리를 짓고 집단을 형성한다.  최소 단위로서 가족이 있고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 국가 등 규모와 형태 면에서 다양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는 '내 편'이 아닌 '그들'을 적대시하며 편가르기를 시작한다. 전세계적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갖가지 논쟁과 정치적 규합, 더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는 전쟁과 테러가 모두 이와 같은 '편 가르기'의 산물이다.

이 책은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무리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한 부류로 규정되지 않고 처한 상황과 마음에 따라 수시로 쉽게 합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또한 개인이 '우리'라고 동일시하는 것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으며 단지 그가 속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는 다양한 심리학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집단 정체성'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 나간다. 인류학에서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을 제시하며 '부족적' 감각이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표현되는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부족적 감각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건강에 영향을 주며, 외부 요인에 의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부족적 감각을 어떻게 하면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이 책의 결론이다.



1.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로군요”
2. 이보다 기이한 문제는 없다
3. 계산과 측정
4. 깃털이 같은 새들
5. 마음을 보는 눈, 부류를 보는 눈
6. 코드를 찾아서
7.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는가
8. 오클라호마의 전통 창조, 혹은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
9. 그들을 화형시켜라
10. 공통의 인간성이 우리를 울린다
11. 거기에 인간은 없다
12. 이방인이 되지 말라
13. 신고식과 전환
14. 효수된 머리
15. 다윈주의라는 종


 * * * * *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로군요”

개인과 전체 사이에 위치하는 인간 부류들은 호모사피엔스라는 한 가지 부류의 세상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세상을 표현한다. 인간 부류는 예컨대 성미 고약한 노인이나 배관공 같은 유형(type)일 수도 있고,  바스크족이나 타이족처럼 문화일 수도 있다. 일본인이나 자이나교도처럼 오래되고 잘 알려진 부류가 있는가 하면 ‘스티븐 핑커(현재 하버드대학에서 인간 본성을 주제로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언어본능』을 비롯해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how the mind works』『빈 서판 blank slate』등의 저자이다)의 대학원 제자였던 사람들’처럼 근래에 생긴 소규모 부류도 있다.

어떤 인간 부류는 인간이 아닌 것까지도 포함한다. 예컨대 당신의 가족이라는 부류에는 머나먼 타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개나 고양이가 포함될 수도 있다. 인간 부류는 무한히 쪼개질 수 있다. 한 가지 부류만 놓고 봐도 그 속에서 하위 범주를 찾을 수 있고 그 하위범주들 속에서 더 많은 하위범주들을 찾을 수 있다.

인간 부류들은 어떻게 이처럼 다양할 수 있을까? 인간 부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을 살펴본들 그에 답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부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인간 부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즉 타밀족이나 재림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구분되느냐’가 아니라 ‘왜 그들을 구분하려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스스로를 그런 부류로 나누지 않고서도 잘 살아간다.

부족적 사고의 어두운 이면도 있다. 인간은 단지 ‘부적절한’ 부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인다.  9.11 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누가 ‘우리 편’인가 하는 곤란한 질문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분쟁과 갈등 속에서 누가 우리 편인가는 ‘타고난’ 것도 아니고 불가피한 구분도 아니며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부류, 즉 우리가 아침 산책(“저 사람들은 왜 터번을 둘렀지?”)에서부터 역사적인 일(“전쟁이 불가피한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규모의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범주들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에 달려 있음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부족과 동물들이 지키는 경계가 다른 점이다.

신경과학자 테렌스 디컨이 말했듯이 인간이 ‘상징의 동물’이라면, 그러한 인간만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인간 부류이다. 그러나 상징에 의거한 어떤 행동도 그 상징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부류 그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잘못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대계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들보다 대학 시험점수가 더 높은가? 결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들보다 성관계를 더 자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이 교회에 더 열심히 나가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데이터에서 출발하지 않고 세상을 유대인, 흑인, 히스패닉으로 나눈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런 인간 부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런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 부류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마음에 관한 사실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인간 부류를 ‘사고’의 기준, 즉 지각한 것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인간 부류에 대한 두 가지 관점 - 인간 부류를 범주로 보는 관점과 사람들로 구성된 실체로 보는 관점 - 도 결국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시대에 따라 변할지 몰라도, 모든 인간 부류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닌다. 무수한 인간 부류들도 근본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이 점은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 표현 방식 속에 나타난다.

서로 다른 목적과 역사를 지닌 서로 다른 인간 부류들이 대체 어떻게 동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그것들이 동일한 정신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하는 능력은 ‘무엇이든’ 분류하는 인간의 보편적 능력에 일부 의존한다. 사람들을 분류하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든 분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신 과정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것이다. 갖가지 분류들은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다음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인간 부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역시 원인과 패턴을 찾아내는 보편적 능력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인간 부류를 만들어내는 마음의 특화한 영역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논리 법칙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작동하며, 사람들이 과학이라 일컫는 엄격한 인과적 학문과도 거리가 멀다. 결국 사람들이 인간 부류에 관해 말하는 많은 것들은 예측 가능한 사실 및 논리 면에서 무의미하다.

인간 부류가 논리적 혹은 제도적 법칙과 무관한 그 자체의 법칙을 지닌다면, 또 그런 법칙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인간 부류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다소 기이한 내용들을 함축하게 될 것이다. 우선, 하찮고 무의미하고 한시적인 인간 부류라 해도 감춰진 원리만 충족시킨다면 종교, 국민, 민족처럼 중요시되는 인간 부류와 맞먹는 위력으로 인간의 삶을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부류는 개념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일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난처한 문제다. 인간 부류를 아무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부류들에 속해 있으므로, 인간 부류를 주제로 하는 대화는 언제나 사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 부류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수가 인식하는 듯하다. 세계화는 ‘우리 편’을 결정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 신념임을 보여준다. 부족적 폭력이 어느 한 종교나 민족, 인종, 문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전유물이 아님은 이제 분명해졌다. 집에서는 ‘선한 사람’이 일터에서는 고문을 자행하는 사람일 수 있고, 해묵은 증오도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 있으며, 아무리 평화로운 사회라도 대량살육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졌다. 이 모든 것이 인간 부류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갈망하게 만든다.


마음을 보는 눈, 부류를 보는 눈

일부 사회학자들이 ‘개인 해석’이라 일컫는 것, 즉 누군가를 보고, 그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근거해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하는 이런 과정만큼 간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수준으로 이런 개인 해석을 한다. 개인 해석은 낯선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인간 부류에 속하므로, 상황이 변함에 따라 우리가 아는 사람과 우리 자신까지도 분류하고 재분류한다.

개인 해석과 그 밖의 사회적 인지 형태에 관한 과학 회의에서 내가 곧 알게 된 것처럼, 사람들을 분류하는 이런 일에는 의식적 사고가 필요치 않다. 이는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엄청난 노력으로 미적분학, 재즈 피아노, 헬리콥터 조종 같은 까다로운 정신 활동의 전문가가 된다. 하지만 개인 해석은 그런 정신 활동들보다도 정신적·감정적으로 더 복잡하다. 그런데도 인간 부류를 분류하는 일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 공부하거나 의식하지 않고도 우리 인간은 능숙하게 사람들을 부류로 나누며, 능숙하게 부류에 관해 이야기한다.

코드는 하나의 정신 영역(보고 듣기와 같은 지각)과 다른 정신 영역(인간 부류에 관한 지식)을 연결해준다. 우리가 신호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은 바로 코드화 덕분이다. 코드는 얼마 안 되는 단서에서 수정되고 구체화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당신은 코드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선 해독을 위한 일련의 규칙이 필요하다 (메시지의 x를 해독하면 어떻게 y가 되는지 설명해놓은 코드북이라고 해도 좋다). 다음으로는 코드북을 사용할, 즉 규칙을 적용할 줄 아는 해독자가 필요하다.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내부에 코드북과 해독자를 지니고 있다. 인간 및 대부분의 동물은 광범위한 경험을 조절할 수 있는 뇌를 지녔다.
우리는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해야 하므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코드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우리가 찾아낸 코드대로 세상에 반응한다. 즉 코드는 학습되는 것이 분명하다.

1000억 개의 뉴런들 사이에 놓인 1조 개의 시냅스들을 가로지르는 신호 체계는 동시에 수많은 코드를 처리할 만큼 빠르고 방대하다. 예컨대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숨을 쉬고, 육체적·정신적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모든 코드가 동시에 작용한다. 뉴런들이 당신의 눈 뒤쪽에서 뇌에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겠지만, 대부분의 뉴런은 각기 무수한 이웃 뉴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호와 속할 수 있는 패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바로 이런 식으로 전기화학적 신호는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생각, 감정, 인식이 될 수 있다. 다만 각각의 신호가 해독되고 다시 코드화하는 과정이 몇 번이고 거듭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방금 만난 사람이 믿을 만한 점잖은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코드화보다는 테이블 모서리가 어딘지 알려주는 코드화가 덜 복잡하다. 이런 복잡함과 단순함의 대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코드가 다른 쪽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짜고 달고 밝고 어두운 것 같은 기본적인 정보가 복잡 미묘한 지도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이다. 한편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우리가 더 많은 연결을 요하는 코드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는 사람들 간의 기질적 차이일 수도 있다.

복통에 약을 복용하는 간단한 일을 예로 들어보자. 알약을 삼키면 약효가 나타나고, 당신의 몸을 감시하던 신경은 통증이 감소했다고 보고할 것이다. 이것은 하급의 위장으로부터 고매한 의식에 이르는 상향적 과정이다. 그러나 자기가 약을 복용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때때로 상태가 좋아지는데, 이것은 의식이 하급의 위장에 고통이 사라졌다는 신호를 보내는 하향적 효과이다. 이런 경우에 당신이 느끼는 편안함은 결코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의사와 약국과 처방약에 대한 지식 - 장의 통증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진압하는 매우 복잡하고 전문화한 다중 코드의 정보 - 으로부터 온다.
우리에게 인간 부류가 그토록 중요한 것은 이 하향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하향적 과정은 인간 부류의 지도를 개인의 건강 및 안녕에 관한 감각과 연결한다. 우리는 인간 부류에 대한 소식에 아무런 육체적 원인 없이 즐거워지기도 하고(“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승리했다!”) 2000년 전에 죽은 순교자 때문에 침울해지기도 한다.

우리 뇌의 어떤 코드는 ‘실제’에 관한 것이고 또 어떤 코드는 그저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옳지 않다. 정신적 코드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방금 구더기가 들끓는 썩은 음식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군가의 윤리적 과실에 남보다 더 엄격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한 종류의 혐오감은 다른 종류의 혐오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사람의 말을 좀 더 잘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실험에서는 미하엘 슈마이허의 이름을 들은 피험자들이 글을 더 빨리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명 카레이서의 스피드가 그들의 글쓰기로 전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 뇌에서 진행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 미묘한 전기화학적 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과학적 사실이 밝혀질수록 그 믿음은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00년 동안의 과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당신이 믿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다.”


공통의 인간성이 우리를 울린다


의식적인 마음은 적을 늘 적으로 대하겠다고 결정하고 맹세한다. 그러나 의식이란 부단히 변한다. 그런 변화는 인간 부류의 코드에 담긴 메시지가 그 해독자에 도달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당신, 즉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거기 개입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가 어떤 부류에서 다른 부류로 옮겨가는 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복합적인 감정과 불확실성을 느낀다. 뉴욕의 부자 동네에 사는 부유한 백인 주부가 아이 없는 이웃보다는 가난한 유색인종일지라도 자기와 같은 엄마들에게 더 유대감을 느끼는 순간도 그렇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한 한 군인이 친구들보다 처음 보는 같은 해병대원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다.

우리 마음에 별개의 인간 부류 기능이 존재한다면, 그런 변화는 쉽게 설명된다. 당신의 부류적 감각이 인간 부류의 코드가 보내는 신호에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반응한다면, 그 결과는 의식적인 선택과 무관할 것이다. 즉 당신이 어떤 부류를 믿고 싶어하든 직감적으로는 그와 다른 부류를 택하게 된다.

몇몇 실험 결과, 사람들은 자기편에게 최대한의 보상이 돌아가게 하기보다 자기편과 상대편 간에 최대한의 차이가 나게끔 결정했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돌아오는 돈이 더 적더라도 자기편이 상대편보다 앞서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나중의 실험들은 좀 더 자의적으로 무의미 집단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동전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온 집단과 ‘뒷면’이 나온 집단으로 분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피험자들은 여전히 무의미한 자신의 집단에 편애를 나타냈다.
인간 부류의 ‘실체적’ 측면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인간 부류가 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인간 부류 - 국가, 민족, 종교 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의무를 갖는 조직체 - 가 실험실의 ‘범주’가 아니라 ‘실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종족성 연구를 주도하는 듀크 대학교의 도널드 호로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종족집단들의 경쟁은 겨우 하나의 과제나 게임 속에 드러나지 않고 평생에 걸친 게임 속에서 절박함과 중요성을 가지므로, 실험으로는 이를 포착할 수 없다.”

한 부류에 대한 애정에는 다른 부류에 대한 미움이 따른다는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더 큰 오해는 우리 각자가 언제나 단일한 내집단에 속한다는 가정이다. 우리 각자는 동시에 여러 인간 부류에 속할 뿐 아니라 새로운 부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예컨대 당신은 남자이자 일본계 미국인이자 부모이자 공화당원이자 감리교 신자일 수 있다. 그리고 내일은 어쩌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 혹은 당신처럼 구식 자동차에 관심이 있거나 나비수집이 취미인 사람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로런스 허시펠드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인간 사회에 속한 어떤 인간이라도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수많은 제휴와 충성의 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적절하다고 느끼는 인간 부류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따라서 인간 부류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끊임없는 정신적 변화가 어떻게 부족, 인종, 종교, 민족처럼 영속적으로 느껴지는 인간 부류들을 낳는지 이해하는 문제다. 인간 부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로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우리 부류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감동적일 수도 있으며, 진부할 수도 있고,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엄청난 수고를 감수하며 이 감정을 유지하고 산다. 이 감정 덕분에 길을 건널 때는 운전자가 당신을 덮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친구나 배우자와 싸울 때는 그들이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엘리베이터나 버스, 기차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탈 때는 당신이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그들에게 얻어맞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낯선 사람들이 내 편지를 배달하고 우리 집에 계속 전기를 공급하며 내가 아플 때 치료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그러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우리’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지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우리’의 감정을 신뢰한다.

늘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는 사회에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공유하는 인간 부류의 상징을 다루는 일이다. 같은 출신 대학, 같은 영화 취향, 당신이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사실 등 어떤 공통점이라도 좋다. 당신을 배제하는 어떤 선 긋기(“서부 영화를 좋아하세요? 나는 못 보겠던데”)도 고난을 예견하는 작은 먹구름이다. ‘우리’를 느끼는 인간의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에 속한다는 감정적 안정은 쉽게 얻어지는 만큼 쉽게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여행자라면 알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의 감정은 경종을 울린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오늘은 싸우고 다음 달에는 거래를 하고 내년에는 결혼할지도 모르는 존중받는 적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속에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우리’ 중에 있을 때는 ‘이렇게 하면 감정이 상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해도 그만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당신의 건강에 좋다. 심장 박동의 속도를 늦춰주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여주며, 잠도 더 잘 자게 만들고, 더 명료한 사고를 하게 만든다. 반면 ‘그들’이라는 느낌은 좋지 못하다. 인간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당신의 심신을 혼란스런 생각, 노여움과 슬픔, 수명 단축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우리가 나쁜 인간 부류의 감정보다 좋은 인간 부류의 감정을, ‘그들’이라는 느낌보다 ‘우리’라는 느낌을 선호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주된 문제다.


신고식과 전환

인간 부류의 지도를 지우고 새로 그려 넣는 의도적인 계획이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 부류에서 다른 부류로, 확실히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옮겨갈 때 ‘통과의례’를 거치는 것은 거의 누구나 겪는 일이다. 통과의례는 새로운 집단이 진짜라는 확신을 심어주도록 조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내용은 도널드 캠벨이 말한 것과 비슷하다. 우선 통과의례의 참여자들은 유사성이 더욱 돋보이도록 서로 비슷한 차림새를 한다(승려나 신병들이 머리를 깎는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회와 따로 떨어져 함께 생활하고 일함으로써 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주목하게 되고,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도 강화된다. 새로운 구성원들은 하나의 단위로서 생활하고 일하고 때로는 고통도 감수한다.

한 사람의 실수로 신병 부대원 전체가 벌을 받을 때면, 캠벨이 공동운명이라 일컬은 것을 공유한다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행진, 춤, 구호, 기타 동작들은 캠벨이 ‘좋은 형태’라고 한 행동의 조화를 나타내며, 이 역시 그들을 단일체로 보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마지막으로 신병들은 - 군인, 수녀, 죄수, 사교집단, 병원 레지던트들도 마찬가지로 - 특수한 언어들을 학습한다. 특수 언어는 그 사용자나 모든 외부인들에게, 부류 밖에서보다 안에서 정보가 더 빨리 전달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새로운 종족을 만들기 위해 재조정되어야 하는 것은 인식만이 아니다. 감정 역시 변해야 한다. 새로운 집단은 당신의 충성심까지 원한다. 새로운 집단은 당신이 이미 속한 부류들을 대체하거나 적어도 그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감정은 이성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일상적인 경험에 반응한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들에게 약간의 사회적 죽음을 가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어린아이나 외국인처럼 토박이들과 같은 게임을 하는 법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절한 감정을 학습해야 한다. 당신이 의지하던 충성심들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 부류의 코드를 학습해야 하는 스트레스뿐만이 아니다. 순전히 육체적인 피로까지 가중된다. 신입자들은 고되게 일하고 잠도 충분히 잘 수 없다.

낙인찍힌 사람들은 그들이 밑바닥을 차지한 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즉 ‘그들’이라는 감정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감정으로 치유될 수 있다.

우선, 낙인은 끊임없이 부여되고 또 부여된다. 낙인찍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재빨리 낙인을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아무리 법과 관습에 따라 철저하게 낙인이 가해져도 버텨내는 방법이 있다. 누구나 스스로를 수많은 인간 부류들에 속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하필 자신이 낙인찍힌 부류에 속한다고 여길 이유가 있겠는가? 동기도 있다. 인간의 몸과 뇌는 건강하기를 원하고 정신은 불필요한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지위 사다리를 이용한 낸시 애들러의 연구는 낙인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객관적으로 동일한 지위의 여성들 사이에서도 지위 사다리 상의 차이는 상당했다. 더 높은 단계에 표시한 여성들은 스스로의 인간 부류 기능을 이용해 자신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켰다. 직업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자신의 지위를 정한 피험자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그보다 지위가 더 높은 다른 부류로 여긴 피험자도 있었다. 예컨대 청소부보다는 교회 집사, 대학 중퇴자보다는 정치운동가로 여겼던 것이다.

낙인 행위의 목적은 사람들의 인식 폭을 좁히고 서로에 대한 경험의 종류를 제한하는 것이다. 인간 부류적 상상력은 언제라도 상황을 다른 코드로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즉 방금 기차에 오른 여자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종교를 믿고 시계나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았어도, 그녀를 나와 같은 어머니로 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낙인은 바로 그런 전환의 순간을 가로막는다. 낙인의 규칙은 부류적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낙인찍힌 사람은 나쁜 부류 말고는 어떤 부류로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 천민, 수도회의 입회자, 새로 들어온 죄수, 기초 훈련을 받는 신병들에 대한 규칙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물론 방관자나 낙인찍힌 자들은 여전히 다양한 부류를 볼 수 있다. 낙인의 규칙은 대부분 위반됨으로써 권력자들이 다시 낙인을 부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낙인찍힌 사람들 스스로도 그런 유연성을 지닐 수 있다. 그들은 다양한 부류를 볼 수 있는 뿌리 깊은 자유를 이용해 스스로 처지를 고쳐나간다. 이것이 바로 낙인에 대한 저항의 핵심이다.


다윈주의라는 종

다윈주의는 일찌감치 인간 부류의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르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만이 자손을 갖고 그들의 특성을 전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다윈에게는 생물들이 때때로 남을 위해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였다. 꿀벌이 적에게 침을 쏘면, 벌집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침을 쏜 자신은 죽는다. 다가오는 고양이를 조심하라고 경계음을 내는 새는 다른 새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정작 자신은 고양이의 주의를 끌게 된다. 남을 돕는 방식으로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이런 행동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타주의다. 실제로 도덕적 코드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윈의 표현대로, 적응도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의 억제와 관련된다. 도덕적 행동은 공정성, 친절, 타인의 권리를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법칙이 개체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작용한다고 추론했다.

조지 윌리엄스는 집단이라는 것이 모호하고 덧없는 실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보다 훨씬 명확히 정의되는 개인조차도 선택의 단위로는 부적합했다. 결국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것은 조나 제인 같은 개인이 아니라 푸른 눈이나 단맛을 좋아하는 성향 같은 특성이다. 선택의 대상으로 충분히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유일한 실체는 DNA 속의 정보라는 것이다.

몇 년 뒤, 리처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오직 자기 복제만을 동인으로 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생물학적 혹은 도덕적으로 이타주의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유전적인 이기주의다. 결국 인식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인간 부류의 코드이며, 우리가 곳곳에서 이타주의를 보는 것은 실제로 이타주의가 존재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그것을 보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부류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을 인정하면, 인종 실재론자들과 결별할 길은 없다. 어떤 인간 부류가 행동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극단론자들이 말하는 부류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 문화적·심리학적, 심지어 신경학적 정보까지 동원해, 모든 인간 부류는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으며, 역사에 따라 변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신이 다윈주의자라면 주관성과 역사라는 요소가 배제된 사고방식을 택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은 많은 신경과학자, 심리학자들이 다윈주의 이론에 회의적인 이유이다. 그들은 마음을 무시한 채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긴다. 인간 부류 문제에서, 유전자 때문에 뇌가 무시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마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인 부류이지 유전적인 친족이 아니다. 인간 부류 코드의 메시지가 유전자와 모순될 경우에는 유전자가 패한다.

인간 부류적 사고의 긍정적 측면 역시 근거가 된다. 친족이 아닌 전우들을 위해 죽는 군인,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키우는 양부모 그리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가까운 친족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가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상 행동과 실험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가정보다 훨씬 더 공정하고 협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타주의는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타적인 조상들은 어떻게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많은 다윈주의자들이 그 답을 갖고 있다. 이 막강한 이론은 그들을 친족 선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1970년대에 러트거스 대학교의 인류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당신이 나를 위해 애쓸 때, 내가 보답할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그 대가는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타주의자들이 이기주의자들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거의 모든 게임 참가자들이 호혜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기주의자들의 부정행위가 너무 많으면 이타주의는 자멸의 전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호혜적 이타주의의 코드가 있다면, 사람들이 어떤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유나 직접 대면했을 때 서로 친절한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피도 안 섞인 전우를 위해 군인이 자식을 남겨두고 죽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지적 곡예를 벌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음은 희생에 보답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게끔 만들어졌다. 인간 부류의 코드가 그토록 강력한 것은 이런 거래에서는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할지, 다시 말해 당신의 유전자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 부류의 코드가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사고하고 분류하고 상징을 사용할 줄 아는 우리 인간의 코드 작성 기능은 동물들이 자기 과시와 무리짓기에 사용하는 것과 구분된다. 인간의 경우가 더 융통성이 있다. 어떤 인간도 ‘우리’가 될 수 있고 ‘그들’이 될 수 있으며, ‘우리’와 ‘그들’을 오가는 연속체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던 베레비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영어를 모국어로 자랐다. 아이비리그인 예일 대학교를 나왔지만 자유분방한 캘리포니아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삶을 뉴욕에서 보냈다. 현재도 뉴욕 부르클린에 살고 있으며, 「뉴욕타임스」「뉴 리퍼블릭」「슬레이트(Slate)」「링구아프랑카(Lingua Franca)」「더 사이언시스(The Sciences)」「디스커버(Discover)」 등에 과학과 문화 분야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겉모습이나 행동만으로 자신을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처해 살아온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www.davidberreby.com


역자 정준형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광고 카피라이터와 출판편집자를 거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비즈니스 생태학』『기억의 메타포』 등이 있다.


(끝)


출처 ①  
http://blog.naver.com/genk1231/30016858116
출처 ②   http://blog.naver.com/pakira772/120045986949
관련리뷰 무리짓기의 본능을 잘 조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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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뒤늦게 저자로부터 날라온 반가운 답신
    from Value Investing 2011-12-20 11:01 
    비록 석달씩이나 걸렸지만 '저자'로부터 직접 답신을 받고 보니 몹시 반갑군요.영어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e-mail이나 facebook 등을 통해 외국의 유명 저자들과도 가끔씩 대화를 나눠볼 수 있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 속 상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이럴 때마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분들이나 영어에 능통한 분들이 몹시도 부럽다는 생각 밖에 안 드네요... * 한심한 영어실력으로 실로 오랜만에 써
 
 
마녀고양이 2010-12-0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만, 좋은 글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마음’에 존재하는 인간 부류가 무엇이냐 라는 문구에 깊이 공감합니다.
항상 회사라는 소속이 있다가, 가족이라는 소속만 남으니 한동안 허전했습니다.
사이버 대학은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운 집단이구요. 뉴스에서 사무실을 없애고
회사에서 제공한 가까운 공간에서 업무 보고만 하도록 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에 대해 찬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 씁쓸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렇게 '개인'으로만 남게 되는 우리는 결국 어느 길로 나아가게 될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말이죠. 진화론적으로 틀림없이 인간이란 부류는 살을 부비대며 살도록 만들어졌는데요..

조금 더 곱씹어 보려합니다, 기말 고사마저 끝내구요.. ^^
좋은 주말되셔여~

oren 2010-12-04 23:21   좋아요 0 | URL
인류의 진화사 중 대단히 길었던 수렵채집 기간을 떠올려 본다면 '무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우리 인류의 뇌 속에 뿌리깊이 새겨져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 * * *
부족적 감각은 태생적으로 수백만 년 전부터 진화해 온 ‘투쟁-도피 반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이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빠지면 맞서 싸우거나 도망가는 판단을 내리는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는데, 시상하부의 명령에 의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스트레스성 호르몬 코티졸이 마구 요동치면서 몸 속의 세포들은 공급경보를 받게 된다. 그런데 아드레날린과 코티졸을 마구 분비시키는 인생 최대 위기가 바로 안락함과 안전을 제공하는 자신의 무리에서 추방당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존은 은행에 넣어둔 돈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내 편이 되어 줄 사회적 유대관계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추방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되는 것이 때론 억울하기도 하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지만, ‘집단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위험을 느낄 때 스트레스를 받지만, 인간은 위험을 생각할 때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성 위궤양’이 인간의 질병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무리 짓기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한지는 이미 50년이 넘었지만, 어리석은 무리 짓기로 서로 싸우고 투쟁했던 어리석은 역사는 아직 끝날 줄 모르고 있다. 평소 박학다식과 난삽한 인용으로 유명한 베레비가 이 책에서 내놓은 대답은 우리와 그들을 구별짓는 코드에 지배받지 말고 무리짓기 본능을 지배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나와 그들을 나누는 집단 코드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범주일 뿐이니까.
- 정재승의 리뷰글(무리짓기의 본능을 잘 조절하라) 中에서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헤로도토스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특히 양자(兩者)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事情)-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다.
-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중에서


 * * * * *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쓴 책 역사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영웅은 단연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였다. 역사적 영웅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그에 대한 칭송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의 용맹성을 극명하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몇 년 전에 개봉된 『300』이라는 영화였다.

연평도 앞바다는 오늘 하루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겠지만 다행히 충돌은 없었다.

겉으로는 고요하기만 한 일요일 저녁인데 밖을 보니 갑자기 눈발이 휘날린다. 그리스군이 페르시아의 대군과 교전하기 전의 일화가 떠오른다. '페르시아군이 화살을 쏠 때는 그 수가 하도 많아서 태양이 가려질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스파르타인 디에네케스는 단지 다음과 같은 말만 했다고 한다.

"트라키스에서 온 객이여, 그대는 우리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해 주었소. 메디아군이 태양을 가려 준다면 우리는 그늘에서 싸울 수 있지 않겠소."

역사와 영화를 통해 전해지는 레오니다스 왕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BC 480년, 그 당시 온 세상을 휩쓸 것처럼 용맹을 떨치던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이끄는 수백만 군대를 맞아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의 왕. 그는 의회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불길한 신탁과 제례(카르네이아 祭, 9일 동안 행해졌다고 함) 때문에 출병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만 친히 선발한 30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협곡을 향해 전쟁터로 떠났다. 레오니다스왕은 대체 누구를 위해 그토록 용맹하게 싸웠을까?



Leonidas at Thermopylae(1814, Musée du Louvre, Paris)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고.

(스파르타 전사자를 위해 세운 시모니데스의 비문)
 



〓 〓 〓 〓 〓 〓 〓 〓



관련기사(2010.11.26) 보기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86] 스파르타

영화평론(2009.05.06) 보기 ☞ [영화평론] 300: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는 왜 싸웠나

영화평론(2007.03.16) 보기 ☞ 스파르타 300, 테르모필레 협곡과 레오니다스 실제모습

관련리뷰(2007.01.11) 보기 ☞ 인류 최초의 동서간 대전쟁을 다룬 역사의 원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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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3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엄두가 안났었는데,영화 300이랑 연관시키시니...좀 친근하게 느껴지는걸요.
레오니다스는 역사 속에서 끄집어낼 수 없으니 차치하고라도,우리의 또다른 레오니다스들은 누굴 위해서 싸우는걸까요?ㅠ.ㅠ

oren 2011-02-1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말 할 필요조차 없이 '또다른 레오니다스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 싶어하는 것들'을 위해서 싸워야 되겠지요.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가 사랑하고 지켜내고 싶은 이 나라를 위해 싸워야 겠지요.

우리가 적대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북한정권에 대해서 저 역시 잘은 모릅니다만, 굳이 역사 속의 레오니다스가 아니라 상식이 있는 이 나라의 국민들이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굳이 묻고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요? (통일이 되고나면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또다른 외세에 맞서 싸워야 되겠지요)

현대사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오로지 권력자의 체제 유지와 원할한 권력승계를 위해 자기 나라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굶어죽든 말든 이웃 나라의 동포들에게조차 거침없이 포탄을 퍼부어대는 그런 부당한 권력과 힘에 맞서, 우리의 삶과 평화와 더 나아가 '정의'를 위해 싸워야 겠지요.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비극적인 분단국가로 나뉘어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겐, 누가 분명한 '우리'이고 누가 분명한 '남'인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인 듯싶습니다. 비록 일부 사람들만의 문제 쯤이라고 여기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을 보고서도 일의 앞뒤 구분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의 아들들, 우리의 아들의 친구들, 우리의 이웃들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당하고 있는 현실조차 아직도 그저 먼 발치에 떨어져 있는 '남의 일인양 여기는' 천진난만한 안일함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의하면, 한·미·중 3국이 공통으로 '북한의 붕괴는 시간문제'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한데 2006년의 핵실험과 2010년의 연평도 도발이 어쩌면 김정일 정권의 고립과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결정적 촉매제로 작용할 것 같은 생각도 드네요.)

자목련 2013-02-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철의 책에도 <역사>가 언급되는데 저는 읽지 않은 책이라서(영화 300도 보지 않았으니.... 그리스 로마, 신화며 역사까지 광범위하게 다룬 책이라 어렵기만 했어요. ㅎ


oren 2013-02-06 21:56   좋아요 0 | URL
저는 내년봄쯤 그리스와 터키를 좀 '길게' 다녀올 계획을 궁리중에 있어요. 이런 저런 조건이 맞아야 갈 수 있을텐데 그런 여행을 떠난다면 그에 앞서 박경철님의 책을 읽어보면 여러모로 유익할 것 같네요.

저랑 아주 친했던 고교동기 녀석이 아테네에서만 3년 이상을 살았었는데, 그 때 '그리스'를 못가본 게 너무 아쉬워요. 그런데 그 친구는 지금 이란의 테헤란에서 3년째 살고 있답니다. 그 친구가 옮겨 다니는 곳으로만 여행을 다녀와도 벅찰 듯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