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고 은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지금 만인의 입 하나하나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캄캄한 슬픔으로 울먹이는데
마음 한쪽 가다듬어
이 따위 넋두리 쓸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만인이 선생님이라 선생이라 고개 숙이는데
당신께 형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이제 막 이 이승의 끝과
저승의 처음이 있어야겠기에
황진 몰려오는 날
돌아봅니다
당신의 단호한 각성의 영상
당신의 치열한 형상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 * * * *

30년쯤 전 꼭 이맘때,
학력고사 시험도 다 끝나고,
졸업과 대학 진학을 앞둔 어정쩡한 까까머리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학생들한테
그 당시 '역사(세계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꼭' 읽어보라고 일러주시던 책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강만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최인훈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 · · · · ·

30년 전 그 당시에도 총각이셨던  그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총각으로 남아 계시고,
평생의 소원이셨던 대학 강단에 서 보는 꿈도 이뤄보지 못한 채,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한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高 三子'로 불렸던 존경할 만한 세 분의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 분은 안타깝게도 3년 전에 소천하셨고, 다른 한 분은 금년 여름 정년퇴임식때 뵜는데,
 그 때 고교졸업후 처음으로 역사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대략 '한 세대' 전에 만들었던 리스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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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0-12-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이 리스트에서 읽어본 것이 몇권있습니다.
추억이 점점 일어나네요.
깔끔한 글씨에 빼곡히 쓰여진 리스트..
대부분이 서양과 동양의 고전인데 그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영희선생님의 책
오늘 더 크게 그 자리가 느껴집니다.

oren 2010-12-08 10:48   좋아요 0 | URL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우상과 이성>(1977)은 출판되자 말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저작으로 알려졌었는데, 21세기로 접어든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명저로서의 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이영의 선생님의 혜안이 놀랍기만 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2-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은 님의 시는 읽지말 걸 그랬어요.
다시 가슴이 서늘한 것이 눈물을 흩뿌리게 만들어요.

전 위의 여섯권은 다 읽었는데,
한세대 전 리스트는 X박스여서 볼 수가 없네요.
아쉽습니다.

oren 2010-12-08 10:55   좋아요 0 | URL
고은님의 시는 그냥 읽기 힘들어 그냥 편하게 훌쩍훌쩍 울어가며 읽어야 속이라도 개운할 것 같아요.
X박스는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날텐데, 한 세대 전의 리스트라고 해봐야 별 것은 없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