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인간은 본능처럼 무리를 짓고 집단을 형성한다. 최소 단위로서 가족이 있고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 국가 등 규모와 형태 면에서 다양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는 '내 편'이 아닌 '그들'을 적대시하며 편가르기를 시작한다. 전세계적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갖가지 논쟁과 정치적 규합, 더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는 전쟁과 테러가 모두 이와 같은 '편 가르기'의 산물이다.
이 책은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무리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한 부류로 규정되지 않고 처한 상황과 마음에 따라 수시로 쉽게 합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또한 개인이 '우리'라고 동일시하는 것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으며 단지 그가 속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는 다양한 심리학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집단 정체성'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 나간다. 인류학에서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을 제시하며 '부족적' 감각이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표현되는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부족적 감각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건강에 영향을 주며, 외부 요인에 의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부족적 감각을 어떻게 하면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이 책의 결론이다.
1.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로군요”
2. 이보다 기이한 문제는 없다
3. 계산과 측정
4. 깃털이 같은 새들
5. 마음을 보는 눈, 부류를 보는 눈
6. 코드를 찾아서
7.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는가
8. 오클라호마의 전통 창조, 혹은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
9. 그들을 화형시켜라
10. 공통의 인간성이 우리를 울린다
11. 거기에 인간은 없다
12. 이방인이 되지 말라
13. 신고식과 전환
14. 효수된 머리
15. 다윈주의라는 종
* * * * *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로군요”
개인과 전체 사이에 위치하는 인간 부류들은 호모사피엔스라는 한 가지 부류의 세상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세상을 표현한다. 인간 부류는 예컨대 성미 고약한 노인이나 배관공 같은 유형(type)일 수도 있고, 바스크족이나 타이족처럼 문화일 수도 있다. 일본인이나 자이나교도처럼 오래되고 잘 알려진 부류가 있는가 하면 ‘스티븐 핑커(현재 하버드대학에서 인간 본성을 주제로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언어본능』을 비롯해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how the mind works』『빈 서판 blank slate』등의 저자이다)의 대학원 제자였던 사람들’처럼 근래에 생긴 소규모 부류도 있다.
어떤 인간 부류는 인간이 아닌 것까지도 포함한다. 예컨대 당신의 가족이라는 부류에는 머나먼 타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개나 고양이가 포함될 수도 있다. 인간 부류는 무한히 쪼개질 수 있다. 한 가지 부류만 놓고 봐도 그 속에서 하위 범주를 찾을 수 있고 그 하위범주들 속에서 더 많은 하위범주들을 찾을 수 있다.
인간 부류들은 어떻게 이처럼 다양할 수 있을까? 인간 부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을 살펴본들 그에 답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부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인간 부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즉 타밀족이나 재림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구분되느냐’가 아니라 ‘왜 그들을 구분하려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스스로를 그런 부류로 나누지 않고서도 잘 살아간다.
부족적 사고의 어두운 이면도 있다. 인간은 단지 ‘부적절한’ 부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인다. 9.11 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누가 ‘우리 편’인가 하는 곤란한 질문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분쟁과 갈등 속에서 누가 우리 편인가는 ‘타고난’ 것도 아니고 불가피한 구분도 아니며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부류, 즉 우리가 아침 산책(“저 사람들은 왜 터번을 둘렀지?”)에서부터 역사적인 일(“전쟁이 불가피한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규모의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범주들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에 달려 있음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부족과 동물들이 지키는 경계가 다른 점이다.
신경과학자 테렌스 디컨이 말했듯이 인간이 ‘상징의 동물’이라면, 그러한 인간만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인간 부류이다. 그러나 상징에 의거한 어떤 행동도 그 상징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부류 그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잘못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대계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들보다 대학 시험점수가 더 높은가? 결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들보다 성관계를 더 자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이 교회에 더 열심히 나가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데이터에서 출발하지 않고 세상을 유대인, 흑인, 히스패닉으로 나눈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런 인간 부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런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 부류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마음에 관한 사실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인간 부류를 ‘사고’의 기준, 즉 지각한 것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인간 부류에 대한 두 가지 관점 - 인간 부류를 범주로 보는 관점과 사람들로 구성된 실체로 보는 관점 - 도 결국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시대에 따라 변할지 몰라도, 모든 인간 부류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닌다. 무수한 인간 부류들도 근본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이 점은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 표현 방식 속에 나타난다.
서로 다른 목적과 역사를 지닌 서로 다른 인간 부류들이 대체 어떻게 동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그것들이 동일한 정신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하는 능력은 ‘무엇이든’ 분류하는 인간의 보편적 능력에 일부 의존한다. 사람들을 분류하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든 분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신 과정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것이다. 갖가지 분류들은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다음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인간 부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역시 원인과 패턴을 찾아내는 보편적 능력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인간 부류를 만들어내는 마음의 특화한 영역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논리 법칙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작동하며, 사람들이 과학이라 일컫는 엄격한 인과적 학문과도 거리가 멀다. 결국 사람들이 인간 부류에 관해 말하는 많은 것들은 예측 가능한 사실 및 논리 면에서 무의미하다.
인간 부류가 논리적 혹은 제도적 법칙과 무관한 그 자체의 법칙을 지닌다면, 또 그런 법칙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인간 부류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다소 기이한 내용들을 함축하게 될 것이다. 우선, 하찮고 무의미하고 한시적인 인간 부류라 해도 감춰진 원리만 충족시킨다면 종교, 국민, 민족처럼 중요시되는 인간 부류와 맞먹는 위력으로 인간의 삶을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부류는 개념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일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난처한 문제다. 인간 부류를 아무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부류들에 속해 있으므로, 인간 부류를 주제로 하는 대화는 언제나 사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 부류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수가 인식하는 듯하다. 세계화는 ‘우리 편’을 결정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 신념임을 보여준다. 부족적 폭력이 어느 한 종교나 민족, 인종, 문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전유물이 아님은 이제 분명해졌다. 집에서는 ‘선한 사람’이 일터에서는 고문을 자행하는 사람일 수 있고, 해묵은 증오도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 있으며, 아무리 평화로운 사회라도 대량살육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졌다. 이 모든 것이 인간 부류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갈망하게 만든다.
마음을 보는 눈, 부류를 보는 눈
일부 사회학자들이 ‘개인 해석’이라 일컫는 것, 즉 누군가를 보고, 그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근거해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하는 이런 과정만큼 간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수준으로 이런 개인 해석을 한다. 개인 해석은 낯선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인간 부류에 속하므로, 상황이 변함에 따라 우리가 아는 사람과 우리 자신까지도 분류하고 재분류한다.
개인 해석과 그 밖의 사회적 인지 형태에 관한 과학 회의에서 내가 곧 알게 된 것처럼, 사람들을 분류하는 이런 일에는 의식적 사고가 필요치 않다. 이는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엄청난 노력으로 미적분학, 재즈 피아노, 헬리콥터 조종 같은 까다로운 정신 활동의 전문가가 된다. 하지만 개인 해석은 그런 정신 활동들보다도 정신적·감정적으로 더 복잡하다. 그런데도 인간 부류를 분류하는 일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 공부하거나 의식하지 않고도 우리 인간은 능숙하게 사람들을 부류로 나누며, 능숙하게 부류에 관해 이야기한다.
코드는 하나의 정신 영역(보고 듣기와 같은 지각)과 다른 정신 영역(인간 부류에 관한 지식)을 연결해준다. 우리가 신호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은 바로 코드화 덕분이다. 코드는 얼마 안 되는 단서에서 수정되고 구체화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당신은 코드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선 해독을 위한 일련의 규칙이 필요하다 (메시지의 x를 해독하면 어떻게 y가 되는지 설명해놓은 코드북이라고 해도 좋다). 다음으로는 코드북을 사용할, 즉 규칙을 적용할 줄 아는 해독자가 필요하다.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내부에 코드북과 해독자를 지니고 있다. 인간 및 대부분의 동물은 광범위한 경험을 조절할 수 있는 뇌를 지녔다. 우리는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해야 하므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코드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우리가 찾아낸 코드대로 세상에 반응한다. 즉 코드는 학습되는 것이 분명하다.
1000억 개의 뉴런들 사이에 놓인 1조 개의 시냅스들을 가로지르는 신호 체계는 동시에 수많은 코드를 처리할 만큼 빠르고 방대하다. 예컨대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숨을 쉬고, 육체적·정신적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모든 코드가 동시에 작용한다. 뉴런들이 당신의 눈 뒤쪽에서 뇌에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겠지만, 대부분의 뉴런은 각기 무수한 이웃 뉴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호와 속할 수 있는 패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바로 이런 식으로 전기화학적 신호는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생각, 감정, 인식이 될 수 있다. 다만 각각의 신호가 해독되고 다시 코드화하는 과정이 몇 번이고 거듭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방금 만난 사람이 믿을 만한 점잖은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코드화보다는 테이블 모서리가 어딘지 알려주는 코드화가 덜 복잡하다. 이런 복잡함과 단순함의 대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코드가 다른 쪽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짜고 달고 밝고 어두운 것 같은 기본적인 정보가 복잡 미묘한 지도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이다. 한편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우리가 더 많은 연결을 요하는 코드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는 사람들 간의 기질적 차이일 수도 있다.
복통에 약을 복용하는 간단한 일을 예로 들어보자. 알약을 삼키면 약효가 나타나고, 당신의 몸을 감시하던 신경은 통증이 감소했다고 보고할 것이다. 이것은 하급의 위장으로부터 고매한 의식에 이르는 상향적 과정이다. 그러나 자기가 약을 복용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때때로 상태가 좋아지는데, 이것은 의식이 하급의 위장에 고통이 사라졌다는 신호를 보내는 하향적 효과이다. 이런 경우에 당신이 느끼는 편안함은 결코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의사와 약국과 처방약에 대한 지식 - 장의 통증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진압하는 매우 복잡하고 전문화한 다중 코드의 정보 - 으로부터 온다.
우리에게 인간 부류가 그토록 중요한 것은 이 하향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하향적 과정은 인간 부류의 지도를 개인의 건강 및 안녕에 관한 감각과 연결한다. 우리는 인간 부류에 대한 소식에 아무런 육체적 원인 없이 즐거워지기도 하고(“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승리했다!”) 2000년 전에 죽은 순교자 때문에 침울해지기도 한다.
우리 뇌의 어떤 코드는 ‘실제’에 관한 것이고 또 어떤 코드는 그저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옳지 않다. 정신적 코드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방금 구더기가 들끓는 썩은 음식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군가의 윤리적 과실에 남보다 더 엄격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한 종류의 혐오감은 다른 종류의 혐오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사람의 말을 좀 더 잘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실험에서는 미하엘 슈마이허의 이름을 들은 피험자들이 글을 더 빨리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명 카레이서의 스피드가 그들의 글쓰기로 전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 뇌에서 진행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 미묘한 전기화학적 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과학적 사실이 밝혀질수록 그 믿음은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00년 동안의 과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당신이 믿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다.”
공통의 인간성이 우리를 울린다
의식적인 마음은 적을 늘 적으로 대하겠다고 결정하고 맹세한다. 그러나 의식이란 부단히 변한다. 그런 변화는 인간 부류의 코드에 담긴 메시지가 그 해독자에 도달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당신, 즉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거기 개입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가 어떤 부류에서 다른 부류로 옮겨가는 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복합적인 감정과 불확실성을 느낀다. 뉴욕의 부자 동네에 사는 부유한 백인 주부가 아이 없는 이웃보다는 가난한 유색인종일지라도 자기와 같은 엄마들에게 더 유대감을 느끼는 순간도 그렇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한 한 군인이 친구들보다 처음 보는 같은 해병대원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다.
우리 마음에 별개의 인간 부류 기능이 존재한다면, 그런 변화는 쉽게 설명된다. 당신의 부류적 감각이 인간 부류의 코드가 보내는 신호에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반응한다면, 그 결과는 의식적인 선택과 무관할 것이다. 즉 당신이 어떤 부류를 믿고 싶어하든 직감적으로는 그와 다른 부류를 택하게 된다.
몇몇 실험 결과, 사람들은 자기편에게 최대한의 보상이 돌아가게 하기보다 자기편과 상대편 간에 최대한의 차이가 나게끔 결정했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돌아오는 돈이 더 적더라도 자기편이 상대편보다 앞서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나중의 실험들은 좀 더 자의적으로 무의미 집단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동전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온 집단과 ‘뒷면’이 나온 집단으로 분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피험자들은 여전히 무의미한 자신의 집단에 편애를 나타냈다.
인간 부류의 ‘실체적’ 측면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인간 부류가 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인간 부류 - 국가, 민족, 종교 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의무를 갖는 조직체 - 가 실험실의 ‘범주’가 아니라 ‘실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종족성 연구를 주도하는 듀크 대학교의 도널드 호로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종족집단들의 경쟁은 겨우 하나의 과제나 게임 속에 드러나지 않고 평생에 걸친 게임 속에서 절박함과 중요성을 가지므로, 실험으로는 이를 포착할 수 없다.”
한 부류에 대한 애정에는 다른 부류에 대한 미움이 따른다는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더 큰 오해는 우리 각자가 언제나 단일한 내집단에 속한다는 가정이다. 우리 각자는 동시에 여러 인간 부류에 속할 뿐 아니라 새로운 부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예컨대 당신은 남자이자 일본계 미국인이자 부모이자 공화당원이자 감리교 신자일 수 있다. 그리고 내일은 어쩌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 혹은 당신처럼 구식 자동차에 관심이 있거나 나비수집이 취미인 사람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로런스 허시펠드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인간 사회에 속한 어떤 인간이라도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수많은 제휴와 충성의 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적절하다고 느끼는 인간 부류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따라서 인간 부류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끊임없는 정신적 변화가 어떻게 부족, 인종, 종교, 민족처럼 영속적으로 느껴지는 인간 부류들을 낳는지 이해하는 문제다. 인간 부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로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우리 부류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감동적일 수도 있으며, 진부할 수도 있고,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엄청난 수고를 감수하며 이 감정을 유지하고 산다. 이 감정 덕분에 길을 건널 때는 운전자가 당신을 덮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친구나 배우자와 싸울 때는 그들이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엘리베이터나 버스, 기차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탈 때는 당신이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그들에게 얻어맞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낯선 사람들이 내 편지를 배달하고 우리 집에 계속 전기를 공급하며 내가 아플 때 치료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그러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우리’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지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우리’의 감정을 신뢰한다.
늘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는 사회에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공유하는 인간 부류의 상징을 다루는 일이다. 같은 출신 대학, 같은 영화 취향, 당신이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사실 등 어떤 공통점이라도 좋다. 당신을 배제하는 어떤 선 긋기(“서부 영화를 좋아하세요? 나는 못 보겠던데”)도 고난을 예견하는 작은 먹구름이다. ‘우리’를 느끼는 인간의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에 속한다는 감정적 안정은 쉽게 얻어지는 만큼 쉽게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여행자라면 알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의 감정은 경종을 울린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오늘은 싸우고 다음 달에는 거래를 하고 내년에는 결혼할지도 모르는 존중받는 적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속에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우리’ 중에 있을 때는 ‘이렇게 하면 감정이 상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해도 그만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당신의 건강에 좋다. 심장 박동의 속도를 늦춰주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여주며, 잠도 더 잘 자게 만들고, 더 명료한 사고를 하게 만든다. 반면 ‘그들’이라는 느낌은 좋지 못하다. 인간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당신의 심신을 혼란스런 생각, 노여움과 슬픔, 수명 단축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우리가 나쁜 인간 부류의 감정보다 좋은 인간 부류의 감정을, ‘그들’이라는 느낌보다 ‘우리’라는 느낌을 선호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주된 문제다.
신고식과 전환
인간 부류의 지도를 지우고 새로 그려 넣는 의도적인 계획이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 부류에서 다른 부류로, 확실히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옮겨갈 때 ‘통과의례’를 거치는 것은 거의 누구나 겪는 일이다. 통과의례는 새로운 집단이 진짜라는 확신을 심어주도록 조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내용은 도널드 캠벨이 말한 것과 비슷하다. 우선 통과의례의 참여자들은 유사성이 더욱 돋보이도록 서로 비슷한 차림새를 한다(승려나 신병들이 머리를 깎는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회와 따로 떨어져 함께 생활하고 일함으로써 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주목하게 되고,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도 강화된다. 새로운 구성원들은 하나의 단위로서 생활하고 일하고 때로는 고통도 감수한다.
한 사람의 실수로 신병 부대원 전체가 벌을 받을 때면, 캠벨이 공동운명이라 일컬은 것을 공유한다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행진, 춤, 구호, 기타 동작들은 캠벨이 ‘좋은 형태’라고 한 행동의 조화를 나타내며, 이 역시 그들을 단일체로 보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마지막으로 신병들은 - 군인, 수녀, 죄수, 사교집단, 병원 레지던트들도 마찬가지로 - 특수한 언어들을 학습한다. 특수 언어는 그 사용자나 모든 외부인들에게, 부류 밖에서보다 안에서 정보가 더 빨리 전달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새로운 종족을 만들기 위해 재조정되어야 하는 것은 인식만이 아니다. 감정 역시 변해야 한다. 새로운 집단은 당신의 충성심까지 원한다. 새로운 집단은 당신이 이미 속한 부류들을 대체하거나 적어도 그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감정은 이성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일상적인 경험에 반응한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들에게 약간의 사회적 죽음을 가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어린아이나 외국인처럼 토박이들과 같은 게임을 하는 법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절한 감정을 학습해야 한다. 당신이 의지하던 충성심들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 부류의 코드를 학습해야 하는 스트레스뿐만이 아니다. 순전히 육체적인 피로까지 가중된다. 신입자들은 고되게 일하고 잠도 충분히 잘 수 없다.
낙인찍힌 사람들은 그들이 밑바닥을 차지한 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즉 ‘그들’이라는 감정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감정으로 치유될 수 있다.
우선, 낙인은 끊임없이 부여되고 또 부여된다. 낙인찍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재빨리 낙인을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아무리 법과 관습에 따라 철저하게 낙인이 가해져도 버텨내는 방법이 있다. 누구나 스스로를 수많은 인간 부류들에 속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하필 자신이 낙인찍힌 부류에 속한다고 여길 이유가 있겠는가? 동기도 있다. 인간의 몸과 뇌는 건강하기를 원하고 정신은 불필요한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지위 사다리를 이용한 낸시 애들러의 연구는 낙인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객관적으로 동일한 지위의 여성들 사이에서도 지위 사다리 상의 차이는 상당했다. 더 높은 단계에 표시한 여성들은 스스로의 인간 부류 기능을 이용해 자신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켰다. 직업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자신의 지위를 정한 피험자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그보다 지위가 더 높은 다른 부류로 여긴 피험자도 있었다. 예컨대 청소부보다는 교회 집사, 대학 중퇴자보다는 정치운동가로 여겼던 것이다.
낙인 행위의 목적은 사람들의 인식 폭을 좁히고 서로에 대한 경험의 종류를 제한하는 것이다. 인간 부류적 상상력은 언제라도 상황을 다른 코드로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즉 방금 기차에 오른 여자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종교를 믿고 시계나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았어도, 그녀를 나와 같은 어머니로 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낙인은 바로 그런 전환의 순간을 가로막는다. 낙인의 규칙은 부류적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낙인찍힌 사람은 나쁜 부류 말고는 어떤 부류로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 천민, 수도회의 입회자, 새로 들어온 죄수, 기초 훈련을 받는 신병들에 대한 규칙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물론 방관자나 낙인찍힌 자들은 여전히 다양한 부류를 볼 수 있다. 낙인의 규칙은 대부분 위반됨으로써 권력자들이 다시 낙인을 부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낙인찍힌 사람들 스스로도 그런 유연성을 지닐 수 있다. 그들은 다양한 부류를 볼 수 있는 뿌리 깊은 자유를 이용해 스스로 처지를 고쳐나간다. 이것이 바로 낙인에 대한 저항의 핵심이다.
다윈주의라는 종
다윈주의는 일찌감치 인간 부류의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르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만이 자손을 갖고 그들의 특성을 전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다윈에게는 생물들이 때때로 남을 위해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였다. 꿀벌이 적에게 침을 쏘면, 벌집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침을 쏜 자신은 죽는다. 다가오는 고양이를 조심하라고 경계음을 내는 새는 다른 새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정작 자신은 고양이의 주의를 끌게 된다. 남을 돕는 방식으로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이런 행동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타주의다. 실제로 도덕적 코드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윈의 표현대로, 적응도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의 억제와 관련된다. 도덕적 행동은 공정성, 친절, 타인의 권리를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법칙이 개체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작용한다고 추론했다.
조지 윌리엄스는 집단이라는 것이 모호하고 덧없는 실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보다 훨씬 명확히 정의되는 개인조차도 선택의 단위로는 부적합했다. 결국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것은 조나 제인 같은 개인이 아니라 푸른 눈이나 단맛을 좋아하는 성향 같은 특성이다. 선택의 대상으로 충분히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유일한 실체는 DNA 속의 정보라는 것이다.
몇 년 뒤, 리처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오직 자기 복제만을 동인으로 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생물학적 혹은 도덕적으로 이타주의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유전적인 이기주의다. 결국 인식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인간 부류의 코드이며, 우리가 곳곳에서 이타주의를 보는 것은 실제로 이타주의가 존재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그것을 보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부류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을 인정하면, 인종 실재론자들과 결별할 길은 없다. 어떤 인간 부류가 행동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극단론자들이 말하는 부류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 문화적·심리학적, 심지어 신경학적 정보까지 동원해, 모든 인간 부류는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으며, 역사에 따라 변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신이 다윈주의자라면 주관성과 역사라는 요소가 배제된 사고방식을 택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은 많은 신경과학자, 심리학자들이 다윈주의 이론에 회의적인 이유이다. 그들은 마음을 무시한 채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긴다. 인간 부류 문제에서, 유전자 때문에 뇌가 무시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마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인 부류이지 유전적인 친족이 아니다. 인간 부류 코드의 메시지가 유전자와 모순될 경우에는 유전자가 패한다.
인간 부류적 사고의 긍정적 측면 역시 근거가 된다. 친족이 아닌 전우들을 위해 죽는 군인,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키우는 양부모 그리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가까운 친족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가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상 행동과 실험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가정보다 훨씬 더 공정하고 협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타주의는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타적인 조상들은 어떻게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많은 다윈주의자들이 그 답을 갖고 있다. 이 막강한 이론은 그들을 친족 선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1970년대에 러트거스 대학교의 인류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당신이 나를 위해 애쓸 때, 내가 보답할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그 대가는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타주의자들이 이기주의자들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거의 모든 게임 참가자들이 호혜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기주의자들의 부정행위가 너무 많으면 이타주의는 자멸의 전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호혜적 이타주의의 코드가 있다면, 사람들이 어떤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유나 직접 대면했을 때 서로 친절한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피도 안 섞인 전우를 위해 군인이 자식을 남겨두고 죽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지적 곡예를 벌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음은 희생에 보답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게끔 만들어졌다. 인간 부류의 코드가 그토록 강력한 것은 이런 거래에서는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할지, 다시 말해 당신의 유전자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 부류의 코드가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사고하고 분류하고 상징을 사용할 줄 아는 우리 인간의 코드 작성 기능은 동물들이 자기 과시와 무리짓기에 사용하는 것과 구분된다. 인간의 경우가 더 융통성이 있다. 어떤 인간도 ‘우리’가 될 수 있고 ‘그들’이 될 수 있으며, ‘우리’와 ‘그들’을 오가는 연속체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던 베레비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영어를 모국어로 자랐다. 아이비리그인 예일 대학교를 나왔지만 자유분방한 캘리포니아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삶을 뉴욕에서 보냈다. 현재도 뉴욕 부르클린에 살고 있으며, 「뉴욕타임스」「뉴 리퍼블릭」「슬레이트(Slate)」「링구아프랑카(Lingua Franca)」「더 사이언시스(The Sciences)」「디스커버(Discover)」 등에 과학과 문화 분야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겉모습이나 행동만으로 자신을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처해 살아온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www.davidberreby.com
역자 정준형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광고 카피라이터와 출판편집자를 거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비즈니스 생태학』『기억의 메타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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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① http://blog.naver.com/genk1231/3001685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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