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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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작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번역을 해야 한다. 좋은 작가는 우리의 문장을 바다 건너의 수많은 문장들과 비교하여 정신을 살찌운다.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우리말에 능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번역이다. 사려 깊은 번역을 하는 이들은 외국의 문장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바꿀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한다. 그 고민이 우리의 말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언어를 수호하는 자여야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일본의 문학이 항상 정상의 고도에서 회자되는 까닭은 그 세계의 작가들이 번역으로 거대한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열매가 아무리 저항해본들 비옥한 토양은 늘 풍작일 수밖에 없다. 충실한 보통독자가 되라는 어려운 과제를 내준 한 교수는 우리 문학의 한계가 번역의 부족에서 왔다고 했다. 번역하는 자와 문학하는 자의 분리, 직업화, 저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교수의 신랄함을 빌리자면) 보잘 것 없는 문학상들, 권위와 인기에의 천착, 어쨌든 극한 신자유주의인 우리의 빈약해진 풍토, 외면하는 독자들…… 그 외에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인용할 책들은 서재에 많고도 겹겹이 쌓여 있다. 하지만 우선은 문학의 무궁한 영감이자 정신의 자궁인 번역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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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나는 어떤가? 발을 빼는 모양새이긴 하나, 다행이도 나는 작가가 아니다. 독자다. 그런 경지를 탐내는 건, 필사와 되새김질의 실천으로 내게 큰 공명을 일으켜주신 한 충실한 독자의 표현처럼 “북한산 인수봉도 올라가 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히말라야의 눈 덮인 고봉들을 쳐다보는” 것일 뿐이다. (이 표현은 원래 Oren 님의 것으로, 이 공간에 버무려놓은 것에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독자이고자 노력하는 나에게도 번역은 하나의 보람된 실천일 수밖에 없으며, 함량미달인 작가들을 골라 문학의 숲에서 베어내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독자의 단련도 쉬운 일은 못 된다.


    미술과 철학 공부를 위한 단순한 번역이 내게 장편의 실천이 된 건 순전히 톨킨 때문이다. 나에게 그는 ‘절대적인’ 작가다. (내가 absolute, アブソリュート란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만의 번역으로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수년째 원서에 빌붙어 살고 있다. 톨킨을 둘러싼 여러 작가와 추종자들의 2차 창작물도 ‘번역 바구니’에 들어 있다. 그동안 매진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더욱 채찍질하는 것은 나의 일상이다. 언젠가 톨킨을 이 자리에 복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 번역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원서와 2차 창작물 번역 덕분에 영문을 우리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고민이 몸에 뱄다.


    한창 번역하던 무렵 알게 된 책이지만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은 지금도 수시로 펼쳐본다. 물론 번역에 통달한 이들에게 별로 새로울 내용은 없고, 독자들 중에는 원서를 능히 소화할 수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번역의 내공은 충분하지 않은, 그래도 좋아하는 원서를 꼭 한 번 날것으로 읽고자 하는 나 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 본인의 실전 감각과 내공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책’이라는 심심한 문장만으로는 이 책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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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번역의 탄생』에서 타원의 궤도를 보여준다. 직역에서 출발하여 그 맞은편에 있는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을 거친다. 두 지점을 돌고 돌면서 번역은 성장한다.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희재는 책의 말미에 이를수록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을 옹호하지만 직역이 한국어를 살찌운 비료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지나치진 않는다. 영화와 시, 소설 번역 경험이 있는 이들, 그리고 외국어에 능한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런 신선한 표현은 직역해서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각주를 달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하지만 직역을 자주하면 할수록 원문을 지나치게 우러러보는 버릇에 복종할 수도 있다.


    국영의 방송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내가 몇 가지 실망스럽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문화였다. 차음어의 권위가 굉장히 높았다. 바꾸려고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 말하는 습관인데, 그녀/그들은 선배들이 무분별하게 들여와 여과 없이 사용했던 용어들을 자랑스럽게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현장이 워낙 빨리 돌아가는 분야이고 그만큼 소통이 중요한 곳이라, 한편으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말을 다루는 사람들인 만큼, 나는 그녀/그들에게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그녀/그들만의 은어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요즘은 그 용어들이 개그의 콘셉트로 주요 방송에 여과 없이 나온다. 문제는 그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항간에 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정적인 공간에서는 번역의 대가들이 우리말을 수호하고 시대정신을 ‘낫우어’준다. (‘고치다’의 잘못된 표현으로 ‘낫우다’가 있다. 내가 이 말을 굳이 쓰는 건, 순전히 이윤기 선생 때문이다. 발음이 따뜻하여 혀에도 익었다.) 원문을 우리에게 친숙한 말, 혹은 우리가 기억하면 좋은 우리말로 풀이하는 번역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 산행의 가역(苛役)이리라. 번역에 신경 쓰는 나에게 ‘전설의 레전드’로 기억되는 두 번역 사례가 있다. 하나는 톨킨의 방대한 『The Lord of the Rings』를 번역한 김번, 김보원, 이미애의 번역이며, 다른 하나는 거듭 읽어도 원래 우리말로 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드는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다.


    전자의 사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국내의 톨킨 팬들은 지금까지도 고유명사 번역을 놓고 싸운다. 예컨대 주인공의 가문인 Baggins를 ‘배긴스’라 음역할 건지, 아니면 세 역자의 선례대로 ‘골목쟁이’라 받아들일 건지 하는 논란이 있다. 나는 후자의 편인데, 이 경우도 한계는 있다. 우리말로 도무지 풀이하지 못하는 The Water는 어떤가?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건 강 이름이다. 호빗들의 고향인 샤이어를 동서방향으로 흐른다. 저걸 그냥 ‘물’이라 번역하는 역자는 평생 독자들의 비난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말로 풀자니 마땅한 단어가 없다. ‘물 강’이라고 하는 것은 ‘강물’이라는 단어를 배신하는 일이며, 그런 식의 번역은 쓸모없다. 그 때문에 세 역자는 ‘워터 강’이라 음역했다. 이것이 우리말 풀이의 어려움이다. 대체 어디까지는 우리말로 풀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한 사려 깊은 역자들의 도움으로 우리말 풀이는 점점 그 경계를 넓힌다. 그렇게 보면 이윤기 선생의 훌륭한 번역들은 우리말 풀이의 확장에서 더 나아가 외국 소설을 우리네 정서에 녹인 경지에 이르렀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나는 선생께서 번역하셨던 예의 소설들을 두 번 이상 읽어야만 했다. 번역에 감탄하며 읽다보니 나중에 가서는 그 작품을 도무지 회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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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희재가 제시하는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은 무엇일까? 번역을 하며 바라봐야 할 사각지대들이 400여 쪽에 걸쳐 소개되어 있으니, ‘번역’이라는 운전을 하는 사람이 사고 한 번 내지 않을 방법이란 애당초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운전 안내서’가 아니다. 언어와 문화를 향한 깊은 혜안이 들어 있어 “번역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의 책들과는 경중을 달리 한다. 그렇지만 실용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족할 수 있다. 수많은 예시들이 나와 있으며, 사전에는 없는 저자만의 단어풀이들도 나중의 번역에 쏠쏠한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원문을 너무 우러러보지 말라는 충고로 시작하는 『번역의 탄생』은 한국어를 가운데에 둔 ‘우리말 중심’의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세계 각지의 언어들이 한국어와 병치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어는 이러저러하나 다른 말은 이렇고 저렇다는 비교가 계속 이어지고 사례들이 덧붙여져 있지만, 그 사이 한국어는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렇게 움직이면서 논지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번역은 바로 그런 행위이다. ‘외국어→한국어’의 방향이 아닌, ‘한국어→외국어’의 방향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반쪽짜리 번역에만 매달리던 나 같은 부족한 독자에게 다른 눈의 근육을 길러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한국어와 영어가 엇갈린다. 저자는 ‘영어→한국어’ 번역인 경우, 목적어 자리에 있는 행동을 품은 명사는 동사로 풀어주고, 형용사는 부사로 풀어주는 번역 전략을 활용한다. 주어 자리에 “삼라만상이 다 올 수”(이희재의 책, 72쪽) 있는 영어를 우리말로 풀 때는 능동적 표현을 고려해야 하며, 과잉수동문도 지양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부사의 활용 부분에서는 고유어 공부를 부단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준다. 예컨대 completely를 ‘완전히’라고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감쪽같이’, ‘새카맣게’, ‘홀딱’, ‘쫄딱’, ‘흠뻑’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는 번역이 아닌 보통의 글쓰기에서도 실천으로 단련해야 한다.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은 명사에 접미사 ‘-적’이 많이 붙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합니다.”(이희재의 책, 137쪽) 하지만 그가 권하는 건 지양이다. 的.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글쓰기에서 고집하는 번역투다. 최후의 보루라고 본다. 남발하는지만 경계할 뿐이다. 인문학의 손길에 이렇게 저렇게 접힌 색종이 같은 삶을 내가 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알면서도 일부러 나는 的을 붙이기도 하고 그 반대로 떼어버리기도 한다. 제 8장에 이르면 나처럼 가슴 뜨끔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희재는 제 9~11장에 걸쳐 ‘간결한 번역’이라는 걸 제시한다. 물론 그도 지적했듯이 문체의 형식을 고집하는 일부 파격적 작가들의 글이 있긴 하나, 대부분은 내용 중심인 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자는 간결하게 번역할수록 좋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영어 원문에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뻔히 아는 내용인데도 일일이 밝힌다는 것이 일종의 논리 강박증처럼 느껴져서 답답해집니다.”(이희재의 책, 186쪽) 번역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더부룩함을 안다. 이희재는 문장의 군살을 빼기 위해 the와 a/an을 번역하지 않는 방법을 여러 사례에 걸쳐 알려준다. 기지의 정보든 미지의 정보든, ‘그’, ‘어떤’, 혹은 ‘한’이라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우리말만의 장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섬세한 의미 표현을 살리는 번역이다. 친족어 번역은 물론이고 감정 표현의 결을 살리는 번역에까지, 역자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대단히 많다. 특히 전자의 경우 uncle, cousin, aunt 앞에서 족보 따지다가 눈물 흘린 경험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물어보면 우리 부모님 세대도 잘 모르는 친족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의미 표현은 명사에도 적용된다. 고유명사는 암호와도 같다. 따라서 역자의 역량에 따라 설명의 문장을 뒤에 충분히 넣어 원문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한 예로, “journey to Canossa.”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겠다.”라는 문장으로 번역된 걸 보고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국어에 정통하여 속담들을 다수 알고 있는 역자들은 이런 의미 표현의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이희재는 토박이말의 활용을 강조한다. 사전편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제 18장에 가까워질수록 글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저자의 어조가 가장 열정적인 제 18장은 사용빈도를 고려한, 그리하여 언어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사전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백과사전형의 미국식 웹스터 영어사전보다는 언어의 변천을 담은 영국의 옥스퍼드식 영어사전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사전이 미국 현실에 기반을 두려는 의식에서 비롯됐다면서 긍정적인 평가도 한다.) 그런 저자가 영한사전 편찬에 바라는 바는 많다.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이리라. 그는 일곱 가지로 나눴지만 실은 들여다보면 아홉 가지로 늘어나는데, 사전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의 번역가들이 어떤 번역을 꿈꾸고 있는지 우리 독자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전편찬과 번역은 다르다. 그의 말마따나 번역가는 우리말 대응어를 만들어내기라도 해서 번역해야 한다. 개념을 찔러 사전의 틀을 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우리말 대응어는 말 그대로 ‘풀이말’다. 후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말이 원어의 진입 장벽을 낮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풀이말 사전 편찬의 수준이 높다. 저자도 그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지금은 재야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신) 한 방언학 교수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보면 낯설고 촌스러우며 인위적인 것 같아도, 이런 작업을 실험적으로나마 시도해볼 가치는 다분하다. 사실 이는 번역의 과제만은 아니다.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장벽 낮추는 일, 흔히 말하는 ‘대중과 소통하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언어적으로 말이다.


    제 20장에 이르러, 드디어 시 번역이 나온다. 번역의 정수. 형식의 개량까지도 가능한 분야이며, 이를 잘 번역한 작가들은 흔히 대단한 정신의 경지에 오른 몇 안 되는 이들로 우리 독자들의 항간에 회자된다. 역량이 한참 모자란 나는 공부를 위해서는 논픽션을, 취미로는 픽션을 번역해봤지만,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휘력은 둘째 치고, 영시의 경우 압운(rhyme)만 해도 골이 아프다. 톨킨 번역으로 수백 여 장을 써왔지만 그 사이 빈 칸들이 있으니, 그건 모두 시와 노래다. 하물며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는 대가들의 시를 번역한다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해낼 수 있는 것일까. 머리로는 짐작이 되지 않고, 마음으로는 그저 끝없이 좇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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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은 기계의 일이 아니다. 원문의 논리를 도입하는 일이다. 함부로 번역하는 건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즉물적’이고 ‘맹목적’이라고 표현한 무비판적인 수용이 이제는 번역 문화에서 자취를 감춰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 현실을 분석하는 방정식”(이희재의 책 402쪽)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시대정신을 높이 쌓는 방법이므로. 번역이야말로 정신의 요람이요, 정신의 거울이다.


    노 교수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움직이는 생물이다. 입에서 기어 나와 귀로 들어가니, 말에 따라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대학시절 노트 모퉁이에 적힌 이 구절에서, 나는 들여다볼 것이 무수한 들판의 향기를 맡는다. 어찌됐든 우리는 독자, 읽는 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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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from Value Investing 2016-02-24 22:06 
    탕기 님께서는 '번역 공부'까지도 일부러 따로 하시는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다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주치게 된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대목을 읽고 나서야 마침내(?)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제게도 약간이나마 '덧붙일 말들'이 몇몇 떠오르는 걸 느낍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정도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시는 '번역'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에 '창작' 부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