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창밖의 폭설







    2011년.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에 마음을 뒀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혹은 잘 모르는 채 글이라는 걸 쓴 건 그보다 더 옛날의 일이지만. 책을 읽었으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할까. 기억은 흐리다. 꿈과 비슷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우주의 탄생과 같다고 하면, 아니, 그건 너무 거창하여 나에게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뭐라도 기억을 해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그냥 읽기 시작했어요.” 이런 대답을 하더라도, 성의 없다고 느껴지진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글을 모아봤다. A4 300여 장씩 묶어서 세 권이 나왔다. 조만간 보르헤스의 한 단편으로 올릴 글이 있는데, 그걸 쓰고 나면 제 4권으로 넘어갈 참이다. 미술도 그렇고, 나에게는 세상에 내지 못할 책들이 있다. 제목은 <서해(書海)>라고 지었다. 어딘가에서 밝힌 것처럼, 보르헤스 이후 도무지 나는 ‘바다’라는 단어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술 글로 모아놓은 책도 <서해>처럼 편집하면 다섯 권에서 약간 넘친다. 그 중 어느 한 권의 (아무도 읽지 못할) 서문에 “나는 미술이라는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끼워 넣었다. 보르헤스 이후의 일이었으리라. 그 단어가 아니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나는 수영을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껏 헤엄을 치고 있는 건, 순전히 대가들의 덕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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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수록 나는 “모르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곤 하지만, 예전의 글들을 읽어보니 어디서 배우지도 않은 수술 실력으로, 그 가짜 기술로 책을 이리저리 찌르고 다닌 흔적들이 태반이었다. 니체가 경멸했던 그 예의 외과적 글들로. 하지만 그런 글들을 잊거나 버리진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가들의 틈에서 어깨를 움츠리며 본능적으로 겸손을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은 참으로 교활하므로 어느 날 갑자기 옛날로 돌아가는 관성을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한, 그래도 점점 추억할 거리들이 늘어나는 내 삶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 성질머리가 죽지 않는다면 노년의 내 모습은 뻔하다. 젊음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경멸할 테다. 나는 최후를 내다본다.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그동안 그려온 길을 보고, 이 세상의 정신과 가족과, 그리고 대가들에게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런 감사의 마음에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 한 톨도 하나도 없어야 한다. 금욕주의라 불러도 괜찮다.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적어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독서와 정신과 글에 있어 꽤나 보수적인 청년이라 불러도 반박할 뜻은 없다.


    <서해> 3권의 한글 파일을 쭉 편집하다가, 서재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의자를 한 바퀴 천천히 돌려봤다. 비집고 나온 책들, 비스듬한 책들, 고꾸라진 책들, 구겨진 책들. 저마다 제목의 모습으로 나를 향한 채 그 속에 무궁한 세상을 품고 있었다. 이따금 아우성치는 환청을 듣기도 한다. 나도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사물과 정신의 이상한 혼합을, 마치 광인의 환상으로 경험할 때가 있다. 그 날은 책을 전혀 못 읽는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읽는다. 자전거 타는 게 가장 속 편하다. 어쨌든 수행자가 되기에는 급하고 변덕스런 성격이라, 도무지 책과 종일 붙어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루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없다. 정 못 읽겠으면 제목이라도 돌려 읽는다. 머리가 좋지 않아 제목과 저자명도 까먹기 일쑤고, 그래서 책 읽을 때마다 이면지와 모○○ 펜을 옆에 끼고 있어야 하지만.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백 번 맞다. 가시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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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커다란 목표는 ‘보통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거듭 찾아오는 막연함과, 사막의 자유와, 그리하여 새벽의 모습으로 내리는 무시무시한 감정들은 ‘독(讀)’이라는 단어와 ‘독(獨)’이라는 단어와, 차라리 그보다는 ‘독(毒)’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책 안 읽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이런 질문을 한다. “읽어서 뭐하게?” 이 질문을 하는 나는 무수한 나 중에서도 유독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녀석이므로, 조용히 앉아 펜을 물며 책 읽는 나 같은 서생의 용기로는 되받아칠 수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들이란 다 시원찮았다. 결국은 조금 뜨거운 마음을 가진 나를 골라 이렇게 답한다. 저 질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상태에서 허언을 하는 것이다.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읽는 거야.” 명쾌하진 않지만, 아직 이 답변을 방패삼아 지루한 삶의 공방에서 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이상한 독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책들은 있었다. 까먹고 잊고 귀찮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도 글을 쓰다보면, 특히 뱉어내고 곧장 휴지통으로 끌고 가는 수십 여 장의 장문을 쓰다보면 그 책들이 문단 문단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분명 나를 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정신의 혈관을 돌아 정신의 장기들을 꿈틀거리게 하고, 정신의 신진대사를 통해 정신의 말과 글을 생산해내는, 명백한 나의 구성체다. 생물이란 워낙 복잡하기에 (그리하여 정신은 또한 어떠한가) 그 경로를 내가 알 방도는 전혀 없다. 그런 건 대가와 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내가 과연 그녀/그들의 실험체가 될 자격은 있을까. 소심하여 부탁도 못 한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복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졸문의 벼랑에 매달려 기억을 떠올려보곤 한다.


    하지만 이런 글은 처음이라, 어떤 책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했었고 그러다가 탈이 난 적은 또 몇 번이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되돌아보다가, 실수로 약간의 위선과 허황(虛荒)과 오만을 내 얼굴에 묻혀버리는 결례를 이 글의 독자들에게 범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어쩌면 이건 전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도 바구니가 있고 나누고 싶은 바가, 돌아보니 있었다. 또한 이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가급적이면 이 졸문을 ‘독자’라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독자란 홀로 된 자이지만 저 추상의 단어로 서로 연결되며, 그렇게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특이한 집단이므로. 이건 그 집단에게 보여주는 나의 바구니다. 짚으로 엮어 초라하며, 풀냄새가 나더라도 이해해주기를.











    <서해>의 1권과 2권이다. (이렇게 보니 어느 게 1권인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얼굴 붉어지고,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뜯어고치고 싶은 기록이다. 결국 언젠가 나는 저 기록 속의 책들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와 보르헤스를 빼면 도무지 ‘제 2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므로, 이런 나태함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1권과 2권의 수정 작업은 그저 요원하기만 하다. 책이 되지 않는다는 다행스러움이 나의 유예를 끌고 끌어 저 먼 내일로 계속 잡아당기는 중이다.


   그래도 남겨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글은 사진이 아니기에,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지금의 내 거울에 반사된다. 그 반사된 풍경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나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만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안다. 잊는 것이 얼마나 아찔한 일인지.














    예술을 공부하며 나는 천재를 부러워했었다. 후대가 기억해야 할 예술의 대가들, 그녀/그들이 지닌 천재성을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봐야 했다. 시샘하던 어린 마음은, 지금은 없다. 나는 범인(凡人)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 김연수가 그런 말을 했다.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건 ‘천재성’이라는 벽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벽을 앞에 두고 견디는 일. 벽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건, 어쩌면 독서가 준 교훈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나에게 독서는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지 않은 나는 저렇게 이면지와 펜을 곁에 두고 씨름할 수밖에 없다. 여러 종이봉투에 이면지들이 나눠 담겨 있다. 기분 좋은 날에는 가지런하게 쓰다가도, 도무지 읽고 싶은 기분이 아니면 엉망으로 낙서한다. 마침표보다는 화살표와 선이 많다. 대가들은 보통 서로 이어지는 문단을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놓는, 나 같은 독자들을 곤란케 하는 훌륭한 기술을 우아하게 구사하므로.


    인용할 만한 구절을 적기보단 파란색 펜으로 내 생각을 적는다. 대학 시절 낙서 습관이 이제 와서는 좋은 동료가 된 셈이다. 다른 책과 닿아 있는 부분이라 별도로 빼놔야 하는 구절이나 내용은 빨간색 펜으로 적는다. 종교 관련 서적들, 그것이 비교종교학이 됐든 경전이 됐든 도킨스 류의 비판이 됐든 간에 그 분야의 책을 읽으면 유독 빨간색 문장들을 많이 적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적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모자람 때문에,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소설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에서 가장 많은 걸 얻는다. 내게 소설은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에 묘사된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와 같다. 내가 기대한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들쑥날쑥한 모습으로 언제나 나를 실망시켜 서재 밖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진리가 인공적인 형태로 나타날 거라고, 나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이 흐리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귀찮아 다시 찍지 않았으니, 그 괘씸한 마음을 용서받으려면 이 글의 꼬리에 책 목록을 붙여 넣어야겠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사진을 한 눈에 알아보리라.) 트림은 우리가 무엇을 먹었는지 속이지 못하도록, 아주 노골적인 냄새로 과거를 고발한다. 지금은 (올해 2월 초순부터) 한창 보르헤스에 빠져 있기 때문에 뭔가를 뱉어내듯 써내려 가면 어쩔 수 없이 ‘보르헤스적 글쓰기’라는 괴상한 걸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방식과 문체가 스며들어 그 중 아주 조금이나마 어떤 문학의 분자들을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한다. 이 작은 사진 속에는 그런 식으로 내게 들어와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책이 있다.


    이탈로 칼비노, 보리슬라프 페키치, 루쉰, 쿳시, 보후밀 흐라발, 파트리크 쥐스킨트, 나이폴, 조지 오웰, 솔제니친, 포, 보르헤스, 카프카, 골딩, 카뮈, 도리스 레싱, 다자이 오사무, 위화 … 이들의 이름은 이렇게 글로 쓰고 읽기만 해도 가슴 뛰게 한다. 정신의 맥동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고유명사다.


   이따금 나는 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논객들, 심지어는 아주 저명한 문학 인사들의 글을 들여다본다. 그 중 진지한 글들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읽어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독자에게는 말이다. 굳이 의견을 밝히라면, 나는 문학의 혁명과 문학의 ‘문학[닫힘]’ 사이에 서있다고 해야겠다. 즉, 나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도무지 뭘 얻어낸 것도 없는데 잘 읽었다며 텅 빈 독후감을 쓰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 비해 (이런 모습이 훨씬 바람직한데) 도무지 쓰지 못하겠다며 짤막하게 자신의 독서 실패를 밝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문학 중에서도 우리가 여러 세대에 걸쳐 회자해야 하는 명작들에 한해 생각해보자면, 그 작품들에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다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시해버린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냥 읽으며 즐기면 되는 대부분의 하류들은 논외다. 그건 어쩌면 단어나 문장, 혹은 감동에 목이 마르거나 어떤 보상심리 탓에 독자들이 훑고 넘겨버리는 작품으로, (인기를 끌더라도 종국에는) 별로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불가능한 도형의 형태로 세상의 다면을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작품들은 현명의 영토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작가도 그걸 고스란히 “여기 길이 있소.”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문학의 특수성은 이 난해함 속에 있다. 시대의 독자들은 그걸 해석해야 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필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빈약한 삶을 충족시킬 용기를 얻거나 현생의 비극을 타개할 수 있는 무기, 혹은 도구를 얻는다. 저마다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가능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헤럴드 블룸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지 않으면 도대체 독자들이 어느 작가에게서 지혜를 얻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상징적인 역설이다. 평생 문학에 빠져 살아온 노학자의 노망에서 나온 말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간단하고도 쉬워져서, 그것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최고의 매력일 수밖에 없으므로, 문학을 곡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에서 뭔가를 보려는 이들의 글과 논리를 상대로 비교해보면, 그 반대의 것은 그다지 호소력도 없고, 이따금 개개인의 툴툴거림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저 책들은 그냥 문학일 뿐인 문학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보건대, 분명 내게 무슨 짓을 해버린 책들이다. 독자들의 이런 신고를 통계로 내보면, 우리는 우리의 딸과 아들이 무슨 책을 건네받게 될 것인지 알게 된다.














    예술을 공부했기에, 서재에 이런 책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전공은 국문이지만 가장 많이 들여다본 건 미술이라, 시각예술에서 문학에 걸쳐 있는 이론들에서 ‘내 눈으로 보는 예술’을 도출하려는 욕심이 인 건,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분야의 추천 도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여러 권을 골라줄 수 있겠으나, 전공으로 다룰 이들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통사의 책들을 접해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세부 내용이 대단히 어렵다. ‘대단히’라는 부사로도 부족하다.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 자체가 어렵고, 이 분야에서 다루는 작품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세부 비평을 접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시간 낭비다.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때때로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통사라 해도 저자가 예술이론 진영의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이왕 접할 거면 두 세 권 정도를 빗겨 읽는 걸 추천한다.


    사실 국내에 발간되는 예술 분야 책 중에는 읽지 않아도 될 책들이 많다.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사전 찾아보거나 인터넷을 뒤지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짜깁기해서 뽑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 중에 베스트셀러도 있다. 명저여서가 아니라, 교양분야의 특성을 잘 노린 저자들의 전략이 보기 좋게 먹힌 것이다. 게다가 미술 관련 책들만 보더라도, 그 값은 컬러 도판의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학’이라는 분야에도 조금 쉽게 풀어주겠다고 서로 겹치는 책들이 많으니, 평점이나 ‘좋아요’ 등 널리고 널린 평판에 휘둘리면 골치 아파지는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쉽게 나오는 예술책들은, 한 번 맛볼 통사 형식의 책이 아니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가 없다. 아쉬운 술회이지만, 영양가 있는 예술 책들은 통사를 몇 번 읽고 나서 접할 수 있는, 난이도로 굳이 표현하자면 몇 계단 더 어려운 책들이다. 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련의 예술과 독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들여다보려면 얼마든지 깊어지는 세계다. 관심에 따라 읽으면 되는 것이다. 교양이라 멋지다거나 하는 인상은 정보 수준에서만 통한다.













    거듭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목성 보는 걸 좋아한다. 화성과 함께 1시에서 2시 방향의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는 때에는 한참 멍하니 두 점을 바라보곤 한다. 망원경을 사면 아주 본격적인 마니아가 될까봐 섣불리 접근하진 않지만, 우주의 무궁한 궁륭은 언제나 내게 과학적이고, 그와 동시에 종교적이며,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이다. 과학은 주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알게 됐다. 가족에게 보여주려고 번역한 다큐멘터리들도 꽤 있고, 얼마간은 칼 세이건과 미치오 카쿠에 푹 빠져 인문학 책을 몇 달 동안이나 전혀 읽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결정타는 아무래도 리처드 도킨스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대학 생활 말미에는 그의 뜨거운 정신에 온몸을 데였었다. 정신 못 차린 적도 있다. 성향으로 치자면 나는 이제 온화한 카렌 암스트롱 쪽으로 돌아섰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리처드와 <엣지> 필진들의 종교 비판은 유효하다. 여기저기 보면 데인 상처들이 있다. 언젠가 다시 그녀/그들에게 빠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우리에게 아주 못된 일을 자행하는 날에는.


    이렇듯 어쩔 수 없이 과학과 종교를 빗겨 읽게 되지만, 과학자들이 모두 날카로운 비난조의 필자들과 같은 건 당연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성향 탓인지 이상하게도 과학이 인간을 비판하는 책들을 쏙쏙 골라 읽었고, 그런 것들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사진에 넣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서재에 없었던 (아직도 의문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든지, 제인 구달, 혹은 우리에게 가까운 최재천 같은 저자들의 책은 객관의 옷을 입은 과학 외에 독자들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담고 있다. (레이첼은 시인이니 '과학자'라고 할 순 없어도, 예리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과학 정보들의 수준은 굉장히 높다.)


    어쩌면 나는 과학이 뭔가를 제시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서 빨리 SETI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거나, 유로파에서 (지적 생명체가 아닌) 갑각류 외계생명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공식 발표했으면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과학적 관심 말고, 과학의 손톱으로 인간 세계의 병폐를, 그 부스럼을 긁어 떼어버리는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 사진 속의 책들은 나를 힘들게 했었다. 읽기 힘든 건 둘째 치겠다. 어쨌든 시간과 낙서는 독자를 그다지 배신하진 않으므로. 이 책들의 문제는,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뭐라고 표현할 문장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능력 밖이다. 대단히 오래 됐거나,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함부로 읽을 내용이 아니라거나, 더 많은 삶을 겪고 다시 돌아와 읽으며 숙고하고 속을 긁어야만 한다거나, 이런 한계의 표지판을 면전에 대단히 노골적으로 들이댄 책들이다. 나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아는데, 그래도 들어갈 수 없는 텍스트 앞에서 뭔가 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이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어쩌면 위의 책들에 대해 이 공간에서든 아니면 휴지통 버린 글에서든 너무 많은 말을 ‘지껄였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성경>과 <꾸란>과 <우파니샤드>와 (이 사진에는 없지만 여타 경전들과), 그리고 니체는 나의 과제다. “왜 그걸 과제로 삼았느냐?”고 묻는 성질 급한 나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 침묵으로 일단의 실천을 감행하고 본다. 자전거가 정직한 건,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심장과 근육이 버텨주는 한, 자전거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몸의 그런 습관으로, 정신도 그렇게 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심산에,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교와 니체를 선택했다. 그것들이 나에게 왔고, 나는 어쩔 수 없는 과제를 받아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답을 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안 한다. 중등 교육과정에서였든 대학 과정에서였든, 난이도나 진도 따윈 전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시험이라고는 좀처럼 극복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자의 삶으로, 그런 나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시 물어봐도 딱히 대답하진 않겠지만, 왜 나는 그걸 읽기로 했을까.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재밌는 건, 나는 종교와 니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도무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 권의 시집은 참 초라하다. 그 왜소한 모습으로, 하지만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시집 앞에서는 그보다 훨씬 얇은 종이 한 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참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불량한 독자로 살고 있으나, 놀랍게도 시집의 복기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여기서 ‘읽는다’는 동사는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제한한 것인데,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누군가를 읽고 문장의 습관으로 익히거나, 혹은 기억하려고 읽는다는 뜻의 동사다. 그런 뜻으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지금 읽는 시는 이미지의 잔영으로 남는다. 시를 안 읽는다고? 졸업 이후 더 이상 쓰지는 않지만 시를 한 번도 안 읽어본 날이 없었다. 눈으로 콕 찌르면 압축된 공기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고, 시인마다 서로 다른 향기를 퍼뜨린다. 나는 꿀벌이고. 그런데 안 읽는다는 건, ‘나’라는 독자의 성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문학, 과학, 종교, 예술, 신화, 소설, 그리고 온도 높은 철학은 아무리 읽어도 울어본 적이 없다. 시만이 내가 눈물을 흘리는 독자라는 걸 알려줬다. 시는 내게 가자미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입으시는 꽃무늬 팬티이기도 했으며, 내가 언젠가 도착할 해변의 보물이기도 했고, 소리 내면서 우는 나무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문장을 만들고, 고이 접어 휴지통에 버릴 수 있다.


    대학 다닐 때는 옆으로 빗겨 메는 가방 안에 한 권의 시집을 번갈아가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생각나면 읽고, 아니면 말았다. 로욜라의 이름을 딴 대학 도서관에서, 내가 뭐 그 이름의 聖人처럼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영신 수련을 할 만한 정신 상태의 위인은 아니지만, 얇은 시집 한 권에 매달려 거미줄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린 적이 많았다. 나는 거미줄이었기에 많은 걸 놓쳤고, 의미는 저 언덕 아래로 흐름 따라 그렇게 흘러가곤 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잔영이다. 덕분에 나는 문장과 단어로 승부하려는 초보적인, 졸렬한 시인들을 걸러낼 수 있다. 나의 거미줄에 남은 시인들은 누구누구일까, 손가락으로 셈해보려다가, 귀찮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두 움큼 잡아든 시집만 사진으로 찍어봤다. 옆에 피사의 사탑처럼 버티고 있는 황현산 선생의 책은 도무지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기에, 시집이 아닌데도 염치없이 세워 놨다. 내게는 큰 나무 같은 비평이다.












    톨킨을 모르는 독자에게 위의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환상이 아닌 것들과 환상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보르헤스가 어떤 의미일지를 말하는 건 입만 아픈 일이 될 테다.) 맨 위에 있는 『The Lord of the Rings - The Fellowship of the Ring』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은인의 선물이고, 나머지는 조금씩 저축한 돈을 부숴가며 주문 후 3~4주를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하는 고역 속에 모은 원서들이다.


    우리말로 읽을 이들에게는 ‘씨앗판’ 소설을 권한다. 그 이유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을 복기한 글에서 충분히 밝혔기에 이 자리에 거듭 싣진 않겠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원서로 읽는 걸 권하진 않는다. 스스로를 톨킨 ‘덕후’라 부르는 걸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톨킨은 정말 옛날 사람이다. 지금 쓰지 않는 말들도 많고, 만들어낸 말들도 많다. 또한 소설보다는 사실 피터 잭슨의 영화가 훨씬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소설 이외에 톨킨의 세계를 풀이한,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엮은 시리즈들은 소설 원서를 읽지 않았다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비싸기도 하고, 그 시리즈는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하면서 읽을 역서들을 구할 수도 없다. 수집이 취미인 경우를 뺀다면, '비추'다.


    언젠가 톨킨을 이야기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익히 알려진 소설에 대한, 예컨대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실마릴리온』과 『후린의 아이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크리스토퍼는 물론이고 톨킨을 연구한 여러 저자들의 글을 언급하면서 끊임없는 애정을 글에다 덧바르는 실수를 범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대단히 지루하고 이 글보다 훨씬 긴 글이 될 것이다. 이러다 바보 같이 책을 써버리는 건 아닐까? 또한 톨킨은 내가 장편의 번역을 실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므로, 번역 이야기 하는 걸 빼놓지도 않을 테다.


    너무 길어질 것이 당연해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 이 마음을 저 사진에서 느껴줬다면, 나는 여기까지 동행의 걸음을 이끈 인내심 많고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꼬이지 않은 발음으로 어찌어찌 잘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니 책을 너무 험하게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구비하지 못한 다섯 권의 소장본은 부디 잘 다룰 수 있기를. 앞서 독서의 실천으로 종교와 니체를 과제로 삼은 가역(苛役)을 말했었는데, 번역의 실천은 톨킨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능수능란하게 ‘우리말 톨킨’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도 그 글을 읽을 순 없다.












    이 긴 글도 이제 막바지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사진이다. 네 권 밖에 없다. 내가 머리맡에 두고 자는 책은 딱 네 권이다. ‘머리맡’이라 함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을 말한다. 머리맡과는 전혀 관련없는 공간이지만 (나는 고등학생 이후 한 번도 책상에서 자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그곳을 ‘머리맡’이라 부르기로 했다. 글을 쓰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저 네 권의 책과 <성경>이 있다. (다른 경전을 꽂지 않은 건 순전히 책의 크기 때문이다.) 머리맡에는 저 네 권이 아니면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다. 막다른 길에 있을 때, 그것이 삶의 순간이든 독서든 작(作)이든 그건 아무 상관없는데, 그런 궁지에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한 장 한 장 다시 넘겨보는 책은 저 네 권이 전부다.


    어쩌다 저 책들을 읽게 되었는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며, 그저 질문의 질문만 될 뿐인, 돌고 도는 메타 질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래도 그런 질문을 한다. 따져보자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어쩌다 접한 이탈로의 소설 중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 것이고, 『침묵의 세계』는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리고 덧붙이자면 릴케의 추천 문구에 완전히 홀렸으므로) 읽은 것이며, 언젠가 말했지만『중력과 은총』은 이상하리만치 ‘지름신’이 강림한 겨울의 어느 날 일고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한꺼번에 사버리는 통에 두꺼운 책들 사이에 껴서 온 책이고, 『공부하는 삶』은 (순전히 말장난 같으나) 한창 대학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을 때 쥐어본 책이었다. 그러나 분명 그 시작에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운명을 믿지 않는 나는 대체 무슨 문장으로 그런 현상을 내 식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따금 다시 운명을 믿기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귀 기울인다면, 그런 세심한 배려를 기꺼이 베풀어준다면, 나는 저 네 권 말고는 그녀/그에게 아무 것도 건네줄 수가 없다. 이 책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눈을 감게 된다. 몸이 반응하는 책이다. 감히 어딘가에 네 권의 복기를 적어 내려갔었으나, 그건 전혀 나의 글이 아니다. 수많은 나 중 한 명이 괘씸하게도 글을 뱉어버렸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내가 그걸 공간에 올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아무 것도 쓰지 말라고 항상 말했다. 그 나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 읽었으니 써야한다는 초라한 강박증으로는 아무래도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 실패에 앞선 네 차례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 여러 번 다시 읽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한동안 손에 쥐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같은 공간에 있다.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 내가 ‘머리맡’이라 부르는 곳에.


    모니터를 오른쪽으로 살짝 밀어 책 한 권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날이, 내가 “다섯 권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건, 모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심을 구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너덧 권이 넘는 책을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확고부동한 비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 손에는 보통 다섯 개의 손가락만이 있으니. 부디 나는 그 손가락 모두를 한 번 쯤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독자’가 되기를. 그 무엇보다도 바란다.





*   *   *



    내가 부지런하다면 5년 뒤에는 이런 글 하나를 더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10년의 실패'를 술회하게 될 것이다. 딱히 5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의미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엉성한 나의 독서를 회상하기에는 그 정도가 알맞을 것도 같고, 1~4년이면 맛 좋은 음식 하나를 먹어도 먹다가 남길 것 같은 짧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다. 그렇게 별 의미 없는 5년이 두 번 쌓이면, 의미 있는 10년이 된다. 내일도 모르겠는데 5년 뒤를 내다 보진 못한다. 지금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여전히 답보일지도 알지 못한다. 책의 다음 문장이 뭐가 될지 전혀 모르겠는 답답함과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발휘하게 되는 인내는, 삶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다르지 않다.


    책 안 읽어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솔직히, 읽어도 훌륭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훌륭해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내 정신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테니. 그리하여 나는 그저 길가의 돌멩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독서를 통해 보석이 되려는 마음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 마음이 나를 책으로 이끈다. 역설인 것도 같고, 누가 들으면 거짓말처럼 들리긴 하겠지만 사실이다. 서두에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까지 써내려온 글에는 단 하나의 위선도 없었다. 그리고 끝까지 솔직할 수밖에 없다. 책에게 다가가 그 암호들 앞에서, 나는 부디 돌멩이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저 옆에서 비바람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의 바삭바삭 구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다. 돌멩이, 그것은 나의 저항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힘 좋게 날아가 이 세상 어딘가를 부수는, 나는 하나의 무기이자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껏 그런 글들을 읽었고, 그런 대가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불가역의 독서가 앞으로 5년은 더 실패하며 굴러갔으면 한다. 결국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별첨 : 책 링크를 아래에 덧붙여놨다.





① 소설


































































































② 예술과 문학






















































































































③ 과학
















































































④ 고역의 책












































































⑤ 머리맡에 두는 책























우울과몽상, 에드거앨런포, 이탈로칼비노, 반쪼가리자작, 존재하지않는기사, 나무위의남작, 보이지않는도시들, 우주만화, 파리대왕, 윌리엄골딩, 다섯째아이, 도리스레싱, 이방인, 카뮈,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이반데니소비치, 솔제니친, 동물농장, 조지오웰, 인간실격, 다자이오사무, 미겔스트리트, 나이폴, 알렙, 보르헤스, 좀머씨이야기, 파트리크쥐스킨트, 허삼관매혈기, 살아간다는것, 위화, 영국왕을모셨지, 보후밀흐라발, 마이클K, 존쿳시, 기적의시대, 보리슬라프페키치, 루쉰,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진중권, 조이한, 발터벤야민, 춤추는죽음, 카라바조, 임영방, 르네상스, 도상해석학, 파노프스키, 문학과예술의사회사, 아르놀트하우저, 백낙청, 루카치, 신이내린광기, 여성미술사회, 추의역사, 움베르토에코, 그림과눈물, 현대미술,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유종호, 마가레테브룬스, 미학오디세이, 예술철학, 박이문, 오타베다네히사, 부르크하르트, 허버트리트, 톨킨, 반지의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후린의아이들, 크리스토퍼톨킨, 인간없는세상, 이기적유전자, 이타적유전자, 매트리들리, 리처드도킨스, 샘해리스, 게놈, 광대한여행, 제인구달, 빌브라이슨, 재레드다이아몬드, 총균쇠, 미치오카쿠, 핀치의부리, 최재천, 레이첼카슨, 침묵의봄, 칼세이건, 악마의사도, 만들어진신, 카렌암스트롱, 신을위한변론, 불안의서, 영혼의산, 우파니샤트, 코란, 미셸푸코, 광기의역사, 니체, 쇼펜하우어, 사사키아타루, 야전과영원, 성경, 르네지라르, 폭력과성스러움, 블랑쇼, 켄윌버, 무경계, 체르노빌의목소리, 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 라마나마하르쉬, 함석한, 간디, 리처드파인만, 미메시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탄생, 이희재, 황현산, 시몬베유, 중력과은총, 침묵의세계, 피카르트, 공부하는삶, 세르티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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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from Value Investing 2016-02-29 15:47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