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인간성을 자랑하게 되는 최근의 시대에도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대한 공포와 공포의 미신이 많이 남아 있어,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좀더 인간적인 시대의 긍지를 이룬다. 그래서 명백한 진리마저도 저 사납지만, 결국 죽어버린 동물을 도와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는 추측 때문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여러 세기 동안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있다. 나는 아마도 그러한 진리가 나에게서 살그머니 빠져나가게 하는 그러한 일을 감행하고자 한다 : 다른 사람들은 그 진리를 다시 잡아, 그것에 '경건한 사유방식이라는 우유'를 충분히 마시게 하고 마침내 조용히 잊혀진 채 그것이 전에 있었던 낡은 구석에 뉘여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예를 들어 비극에 관해 고금의 철학자들이 사육해왔던 그러한 뻔뻔하고 비대한 오류가 더 이상 고결한 듯 주제넘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침내 인내를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된 데 바탕을 둔 것이다. ㅡ 이것이 내 명제이다. '사나운 동물'은 전혀 죽지 않았으며 살아 있고 번성하며, 스스로를 단지 ㅡ 신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비극이라는 고통스러운 쾌락을 만드는 것은 잔인함이다. 이른바 비극적 동정에서 근본적으로는 심지어 가장 높고 가장 섬세한 형이상학의 전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숭고함 속에서 쾌감으로 작용하는 것은, 감미로움을 오직 거기에 혼합되어 있는 잔인함의 요소에서 얹은 것이다. 투기장에서의 로마인, 십자가의 황홀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교인, 화형이나 투우를 보고 있는 스페인, 비극으로 돌진하는 오늘날의 일본인,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파리 변두리의 노동자, 의지가 풀린 채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참으면서 보고 있는' 바그너광 여자들 ㅡ 이 모든 이가 즐기고 비밀스러운 욕정에 휩싸여 마시려고 노력하는 것은 '잔인함'이라는 위대한 마녀의 약초술이다. 이 경우 우리는 물론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어리석은 심리학을 추방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 ㅡ 그리고 페니키아인이나 금욕주의자에게서처럼, 오직 인간이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자기 부정이나 자기 훼손을 하도록, 또는 일반적으로 관능과 육체를 부정하고 참회하도록, 청교도적인 참회의 발작, 양심의 해부, 파스칼적인 지성을 희생하도록 설득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잔인함에 의해 자기 자신을 향한 저 위험한 잔인성의 전율에 은밀히 유혹되고 앞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인식하는 사람 자신도 정신의 성향에 반하여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ㅡ즉 스스로가 긍정하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싶어하는데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ㅡ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함으로써 잔인함의 예술가와 변용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렇게 깊이 철저하게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상과 표면적인 것을 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근본 의지에 대한 폭력이며 고통을 주고자 함이다.ㅡ이미 모든 인식의 의욕에는 한 방울의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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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오늘날까지도 지상에서 인간이나 민족의 생활 속에 장엄, 진지함, 비밀스러움, 음울한 색조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찍이 지상 모든 곳에서 약속하고 저당 잡히고 서약을 할 때 얼마간의 공포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 과거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깊이가 있으며 냉혹한 과거가, 우리가 '진지'해 질 때, 우리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 안에서 용솟음쳐 오른다.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도 여기에 속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예를 들면 거세),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 ㅡ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금욕주의 전체가 이에 속한다 : 몇 개의 관념들은 지워질 수 없고 눈앞에 있는 것, 잊을 수 없는 '고정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러한 '고정 관념들'을 통해 신경과 지성의 전 조직에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다. ㅡ 금욕주의적 절차와 생활 형식들은 이 관념들을 그 외의 모든 관념과의 경합에서 떼어내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인류가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류의 관습의 모습은 더욱 무섭게 된다. 특히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사회적 공동 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 이 독일인들은 자신의 천민적 근본 본능과 그에 뒤따르는 야수같이 거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무서운 수단을 사용하여 기억하게 만들었다 :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별(ㅡ이미 전설이 되어 있듯이 맷돌을 죄인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형벌의 영역에서 독일의 천재가 가장 독자적인 창의성과 특이성을 발휘한),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14세기나 15세기에도 행해졌다),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 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모습이나 전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 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된 것이다. ㅡ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ㅡ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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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

 

이러한 계약 관계를 눈앞에 생생히 그려본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승인했던 고대 인류에 대해 많은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하는 자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가 냉혹함, 잔인함, 고통을 찾아내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자신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혹은 특정한 종교적 전제가 있는 곳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축복이나 영혼의 구원까지도, 마침내는 무덤 속의 평안까지도 저당 잡히는 것이다 : 이렇듯 이집트에서는 채무자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도 채권자 앞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ㅡ 바로 이집트인에게서도 이러한 안식은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 ㅡ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로마의 12표법이 그러한 경우 채권자가 잘라낼 수 있는 분량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좀더 많이, 또는 좀더 적게 잘라낼지라도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나는 이것을 이미 좀더 자유롭고 좀 더 크게 계산하고 있는, 로마의 법률관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이 배상 형식 전체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본다면, 이는 충분히 기묘하다. 등가는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즉 금전이나 토지,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보상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ㅡ 이는 자신의 권력을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쾌감이기도 하며, "악을 저지르는 즐거움을 위해 악을 저지른다"는 육욕적 쾌락이기도 하고 폭행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즐김은 채권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할수록 더 높게 평가되며, 채권자는 그것을 좀더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맛보는 좋은 한 입의 음식, 아니 그 맛보기로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 또한 한 인간을 '아래에 있는 존재'로 경멸하고 학대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ㅡ아니면 최소한 실제의 형벌권, 형벌 집행권이 이미 '당국'에 넘어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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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영역, 즉 채무법이다. ㅡ 그 개념 세계의 발단은 지상에서의 모든 대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오랫동안 피로 물들었다. 저 세계는 근본적으로 피와 고문이라는 어떤 냄새를 단 한 번도 완전하게 씻어버린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도 그런 적이 없다 : 정언명법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죄와 고통'이라는 저 무섭고 아마도 풀어버릴 수 없게 된 관념의 결합이 처음으로 고정되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건대, 고통은 어느 정도까지 '부채'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최고로 만족을 주는 정도까지이며,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불쾌감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손해를 이상한 반대의 쾌감과 바꾸는 정도까지이다 :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진정한 축제였으며, 이미 말했듯이, 채권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위배되면 될수록 더 높은 값을 지닌 어떤 것이었다. 이것은 추측하여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지하에 파묻힌 일들을 밝히는 작업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복수'라는 개념을 그 와중에 서툴게 사용하는 사람은, 통찰을 좀더 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덮어버리고 모호하게 할 뿐이다. 어느 정도까지 잔인함이 고대인의 성대한 축제의 환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환락의 구성 요소로 뒤섞여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성을 향안 욕망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하게 나타났는지, 바로 '사심 없는 악의' (또는 스피노자의 말로 하자면, 악의 있는 동정)를 그들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겼고 ㅡ 따라서 양심을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 말하자면 우리)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그 위선에 거스르는 일이다. 좀더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마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러한 축제의 환락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229절에서(그 전에 《아침놀》18절, 77절, 113절에서) 나는 고급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심지어 역사를 형성하기까지 하는) 잔인함이 점점 더 정신화되고 '신성화'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어쨌든 사형, 고문, 이단자의 처형 없이는 가장 큰 규모의 제후의 결혼식이나 민족 축제를 생각할 수 없었고, 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악의나 잔인한 조롱을 쏟아낼 수 있었던 사람 없이는 귀족적 가정 생활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ㅡ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Don Quixote》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오늘날 《돈키호테》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혀에 쓰디쓴 맛을 느끼며 거의 고문 당하는 듯한 가책을 갖는데, 이는 저작자나 동시대인에게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며 이해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ㅡ 그들은 이것을 책 가운데 가장 명랑한 책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읽었으며, 이 책을 읽고 거의 죽도록 웃었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ㅡ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아마 이미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이다 : 왜냐하면 원숭이는 기이한 잔인함을 생각해냄으로써 인간을 이미 충분하게 예고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함 없는 축제란 없다 :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긴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ㅡ 그리고 실로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ㅡ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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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 역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

 

덧붙이자면, 나는 이러한 사상으로 삶의 권태라는 시끄럽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물방아에 우리의 염세주의자들이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데 도와줄 의도가 전혀 없다. 반대로 인류가 자신의 잔인함을 아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때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 지상에서의 삶이 더 명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야만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치가 커져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을 뒤덮고 있는 하늘의 어둠은 점점 더 확산되었다. 피로에 지친 염세주의적 눈길,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불신, 삶에 대한 구토에서 나오는 얼음같이 찬 부정 ㅡ 이러한 것들은 인류의 최악의 시대를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다 : 이러한 것들은 늪이 존재할 때, 그에 속하는 늪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히려 세상에 알려진다. ㅡ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덕분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모든 본능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병적인 유약화와 도덕화에 대한 것이다. '천사'(여기에서는 더 가혹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가 되는 도중에 인간은 저 상한 위와 설태가 낀 혓바닥을 양육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동물적인 즐거움이나 순진함을 역겨워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미건조해졌다. ㅡ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앞에서 때때로 코를 쥐고 서서, 교황 이노센트 3세와 함께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혐오하는 것의 목록을 만든다['불결한 생식(生殖), 모태에서의 구역질 나는 양육, 인간을 발육시키는 물질의 더러움, 지독한 악취, 침의 분비와 오줌과 대변의 배설']. 고통이 언제나 생존에 반대되는 논증 가운데 첫번째 논증으로, 생존의 최악의 의문부호로 활보해야만 하는 오늘날, 이와는 반대로 판단했던 시대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으며, 그 안에서 최고의 매력을, 삶에 이르는 진정한 유혹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ㅡ유약한 사람에게는 유혹의 말이 되겠지만ㅡ고통은 오늘날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 게다가 아마도 잔인함에 대한 쾌감 역시 사실은 사라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만 이 쾌감은 오늘날 고통이 더 심하다는 사정에 비추어 승화되고 섬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번역되어 드러나고, 그것들에게서는 가장 섬세하고 위선적인 양심에까지도 아무런 혐의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오직 안심할 만한 명칭으로만 장식된 채 드러나야 할 것이다('비극적 연민'이란 그러한 한 명칭이며, '십자가에 대한 향수'라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명칭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관자의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으며 목도되지 않은 고통을 세상에서 처리하고 이를 솔직히 부정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시의 인간들은 거의 신과 모든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는 중간 존재들을, 즉 숨겨진 곳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보며, 흥미 있는 고통스러운 광경을 쉽게 놓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발명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러한 발명 덕분에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시의 '재난'을 정당화하는 술책에 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보조적인 발명(예를 들어 수수께끼로서의 삶이라든다 인식 문제로서의 삶)이 필요할 것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재난은 모든 정당하다" : 선사적 감정의 논리는 이렇게 울려퍼진다. ㅡ 이것은 진정 선사적 논리였을 뿐인가?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친구로 생각된 신들ㅡ오, 이 태고의 관념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유럽의 인간화에도 파고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칼뱅이나 루터와 상의해보아도 좋다. 어쨌든 그리스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도대체 호메로스가 자신의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게 한 것은 어떤 눈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트로이전쟁과 그와 유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사건들은 어떤 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신들을 위한 축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속성이 있는 한, 시인들을 위한 축제극이기도 했다…… 후에 그리스의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논쟁이나 유덕자의 영웅주의나 자기 가책을 신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 '의무를 진 헤라클레스'는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격자 없는 덕행이란 이 배우의 민족에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의지', 즉 선악에서 인간이 절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명은 당시 유럽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 대담하고도 숙명적인 철학자의 발명이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덕행에 대한 신들의 관심이 결코 고갈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상의 무대에서 진실로 새로운 것, 진실로 전대미문의 긴장, 갈등, 파국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완전히 결정론적으로 생각된 세계란 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 세계이며, 결과적으로 곧 싫증이 나게 된다. ㅡ 이러한 신들의 친구인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그러한 결정론적인 세계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대 인간은 모두 연극과 축제 없이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근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명백한 세계로 '관중'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ㅡ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대단한 형벌에도 실로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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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 전집이 비싸서 낱권으로 사봐야 할 듯, 잘 읽고 가네요. 즐거운 밤 보내세요. *^

oren 2016-02-21 23: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책을 미리 사서 쌓아두고 읽는 성격이 아니라서 기분이 내킬 때마다 한 권씩 따로 사서 읽고 있답니다. 특히나 전집류의 책들은 괜히 한꺼번에 사 놓으면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까` 싶어서 지레 주눅도 들고, 쳐다볼 때마다 한숨만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ㅎㅎ

yamoo 2016-02-2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 니체 전집을 소장중이신거 같아요~ 전 너무 비싸서 구입을 못해고...결정적인 건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을 갖고 있는지라...왠지 구매하기가 거시기한 거 같아서요..청하본도 읽을만해서 걍 아직 구입안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니체 전집을 열독중이신가 봅니다~ 니체에 대한 페이퍼나 리뷰가 기대가 됩니다!

oren 2016-02-26 14:38   좋아요 0 | URL
니체가 쓴 작품들은 모두 `책세상 전집`으로만 선택해서 읽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전집을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 한 권씩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기에 가장 알맞는 책을 고르는 식이지요. 책세상 전집 가운데 여태껏 겨우 세 권만 읽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읽은 순서는 나름 괜찮은 듯싶습니다.(『차라투스트라』--->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順으로 읽고 있답니다. 앞쪽의 세 권은 읽었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예전에 한번 읽었지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