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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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
그래서 더 나는 설명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ㅡ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이 자주 일어나거나 아니면 드물게라도 일어나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일련의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이런 경우에는 전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청각적 착각이 인다 ······ 이것이 결국 내 평균적인 경험이며, 원한다면 내 경험의 독창적인 면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 대해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가 했던 일은, 나에게서 자기의 상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ㅡ 나와는 반대되는 것을, 이를테면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내게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는 내가 도대체 고려할 만한 대상이라는 점을 부정해버렸다. ㅡ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ㅡ 도덕의 파괴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주 숙고할 만한 말이 된다. 그런데 거의 모든 곳에서 그 말의 가치가 차라투스트라의 형상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순진하게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반은 '성자'고 반은 '천재'인, 좀더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인 유형으로서 말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