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의 독서 : 읽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를 먼저 입증시켜야만 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란 표현을, 하필이면 어제 오후에 펼쳐진 그 화려했던 '창밖의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찾아 읽지 못했더라면 말이지요...)

 

아무튼 기나긴 글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5년 후, 10년 후에 좀 더 높은 곳에서 뒤돌아 보게 될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작은 이정표' 하나쯤 미리 세워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싶습니다. 주제넘은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지만, 어쨌든 지치지 않는 '성실성'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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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이며 어린아이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급한 인간류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으며, '준비 완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않는다. ㅡ 30세라는 나이는 고급 문화라는 의미에서는 초보자이며 어린아이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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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 세 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 문화이다.보는 법을 배우는 것 ㅡ 이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다가오게-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다 :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비철학적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ㅡ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ㅡ 비철학적인 조잡함이 '악덕'이라고 칭하는 것은 거의 전부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일 뿐이다. 보는-법을-배웠다가 응용되는 경우 : 배우는 자로서 사람들은 대체로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 어린 평정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ㅡ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온갖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들어가고, 그-안에-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요약하자면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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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직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독일 책들을 읽어보라 : 그 책들은 생각하는 데에는 기술과 교과 계획과 뛰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ㅡ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춤의 일종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희미하게라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ㅡ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ㅡ 이것이 독일적이다. 외국인들이 대체적인 독일적 본성이라고 혼동할 정도로 독일적이다. 독일인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독일인들이 그들의 철학자들을, 그리고 특히 위대한 칸트라고 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에서 가장 기형적인 개념의 불구자를 참아왔다는 사실이 독일적 온화함에 대해 알게 해준다. ㅡ 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 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ㅡ 사람들이 이런 글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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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과 칼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사슬' 안에서, 우리의 '칼'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또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 아래 이를 갈며 우리 운명의 모든 비밀스러운 가혹함에 견디기 어려워 하는 것도 대단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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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성실함, 만일 이것이 우리 자유정신이 벗어날 수 없는 덕목이라고 한다면 ㅡ 그러면 우리는 모든 악의와 사랑으로 이것을 위한 작업을 해보고자 하며, 단지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의 덕 안에서 지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완성'해보고자 한다 : 그 덕의 광채가 언젠가 금빛으로 빛나는 푸르면서 조소하는 듯한 저녁 노을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문화와 그 희미하고 침울한 진지함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실함이 어느 날 피로에 지쳐 한숨을 내쉬고 손발을 내뻗으며 우리 자신을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고, 마치 기분 좋은 악덕처럼 더 낫고 더 편하고 더 부드러운 것을 지니고 싶어해도, 우리는 엄격한 태도로 남아 있자, 마지막 스토아주의자들인 우리는! 그리고 이 덕을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오직 악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만을 보내도록 하자 ㅡ 졸렬하고 우연한 것에 대한 우리의 구토도, 우리의 '금지된 것을 향한 갈망'도, 우리 모험가의 용기도, 우리의 교활하고 까다로운 호기심도, 탐욕스럽게 미래의 모든 나라를 찾아 배회하며 열광하는 우리의 가장 섬세하게 위장된 정신적인 힘에의 의지와 세계 극복을 향한 의지도 보내도록 하자 ㅡ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악마를 데리고 우리의 '신'을 도우러 가자! 아마 우리는 이것 때문에 오해받고 혼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성실함'ㅡ이것은 그들의 악마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그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신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신성화(神聖化)되어 개명된 악마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를 인도하는 정신은 어떻게 불리길 원할까? (이것은 이름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신을 숨기고 있는가? 우리의 성실함, 우리 자유정신은, ㅡ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허영, 우리의 화려한 장식, 우리의 한계, 우리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든 미덕은 어리석음이 되고, 모든 어리석음은 미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다' 고 러시아 사람들은 말하는데, ㅡ 우리는 성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자나 권태로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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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2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정말 따뜻한 댓글입니다. Oren님과 댓글을 나누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을 채워주셨지요. 저는 달아주신 인용구를 이면지에 적고, 펜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며칠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오만일 수 있겠지만, 좀 거칠게 포괄해보자면, 절반 정도 이해하면 ˝이런 인용구를 적어주신 의도를 알겠다. 대단한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보다 이해가 점점 깊어지면 그때는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밭을 갈러` 갑니다. ^^

니체는 너무 진합니다. 너무 진해서, 다른 글들과 같은 날에 읽기 힘들어요. 저는 두어권의 책을 나란히 읽곤 해서, 니체를 인용구로든 아니면 서재에 꽂힌 제목으로든 읽기라도 하면 도대체 다른 책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행이도 `새벽`이라는 시간이 따로 있으니, 니체를 영접할(?) 기회는 매일 있는 셈이긴 하지만요. 저는 첫 번째 인용구에서 `니체적 따뜻함`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의 나이가 딱 초보자이자 아이의 수준이라고 거의 늘 (오만할 때를 제외하면)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저는 매번 실패하면서도 니체가 `고급 문화`라고 부르는 어떤 특이한, Oren님께서 문학의 특수성을 말씀하실 적에 사용하셨던 그 `특수`라는 영역으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런 제게 니체는 성실함으로 그걸 `완성`해보자고 격려하고, 스토아적인 엄격함을 주문하는군요. 살이 떨리는 말입니다... 언제가 되야 저는 이 나태함과 정신적 병약함과 게으름과 객기와 분노와, 이런 것들을 물릴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편지 삼아 이 글의 먼댓글로 오늘 하루 동안의 생각을 적으려고 했지만, 제게는 짧은 글은 알라딘 서재에 올리지 않은 정언명령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절거리는 글을 훌륭한 인용구 밑에 감히 끼워넣어봤습니다. 계속 니체의 인용구를 복기하겠습니다. Oren님의 공감과 조언, 가르침에는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앞으로도 저의 졸문(?)들에 거울을 비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1 12:40   좋아요 0 | URL
탕기 님께서 남겨놓으신 긴 댓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군요. 그런데 어떤 부분은 제겐 너무 과분하게만 느껴져 읽기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탕기 님의 예민한 감수성과 특유의 진솔함과 단단한 결심들이 동시에 느껴져 다시금 저를 편안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해주기도 하네요.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니체는 정말 심연처럼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철학자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사실, 그의 내면은 너무나도 깊어서 어떨 땐 정말 `이 사람이 과연 인간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조차 있으니까 말이지요. 저는 니체를 만나기 전까지는 `쇼펜하우어`를 `인류의 천재 중의 천재 철학자`로 여겨 마음 깊이 존숭해 마지 않았는데, 니체를 읽으면서부터 적잖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스스로 `우리의 스승!, 우리의 성자!`라는 극존칭을 써가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도, 금세 태도를 돌변하여 `스승의 결함`을 마구 들춰내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펼치는데 엄청난 열을 올리니까 말이지요. 하기야, 그가 저돌적인 힘으로 밀어붙여 쓰러뜨리지 못할 `인물이나 사상`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기나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저 그런 일도 `당연지사`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할 일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어쨌든 니체라는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전 준비`가 따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마치 `젊은 처녀와 청년들만` 골라 잡아 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지어 놓은 미궁을 향해 바다 건너 크레타 섬으로 찾아가는 테세우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시커먼 동굴의 입구를 주저없이 들어설 엄청난 용기뿐만 아니라, 마침내 괴물과 싸우고 난 뒤에 무사히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기 위하여 `아리아드네 공주`의 실타레마저도 미리 준비하는 세심함마저 필요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안도와 기쁨으로, 괴물 퀴클롭스의 동굴 속에 갇힌 오뒷세우스가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마침내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와 `아무도 아니`였던 자가 바로 `나`였다고 큰 소리로 다시 외칠 수 있을 테니까요.(`퀴클롭스`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그림들도 많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7136954)

어쨌든 저는 용케도 니체를 마침내 지금에서야 마주치게 된 걸 여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젊을 때` 읽기에는 가슴을 너무 격동시킬 만큼 문장이 벅찬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수많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마구 쏟아낼 때마다 거기에 거침없이 함께 딸려나오는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음악가들조차도, 독자가 그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그의 깊디깊은 생각을 올바로 부여잡지 못하고 금세 격랑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어쩄든 니체는 숱한 철학자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온갖 분야의 대가들을 끊임없이 우리 앞에 불러낸 뒤에, 열변을 토하면서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독자들을 다그치는 데 조금도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니체의 책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낯선 인물들을 자주 만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낯익은 인물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사실이 제겐 얼마나 위안과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과 그들이 지어낸 작품들(가령, 베토벤,모차르트,멘델스존,슈만,쇼팽,리스트, 그리고 특히 바그너와 그의 여러 작품들), 고대의 시인과 역사가들(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등 3대 비극시인과 특히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등), 여러 문학 작가들(단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볼테르, 빅토르 위고, 스탕달, 괴테, 심지어 에머슨까지도!), 그리고 심지어 생물학자 다윈 까지도 이제는 마음 편히 만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제 댓글이 너무나도 길어졌군요. 댓글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끝으로,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던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댓글을 마무리해야 겠다 싶습니다. 오뒷세우스도 나우시카아 공주에 연연했더라면 결코 페넬로페를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 니체, 『선악의 저편』)

* * *

독립성에 대한 시험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놀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그리고 결국 다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니라, 증인인 우리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시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 모든 사람은 감옥이며 또한 후미진 구석의 모퉁이다. 조국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대단히 위기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 물론 승리에 찬 조국에서 자신의 마음을 떼어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우연히 보아왔던 보다 높은 인간의 기이한 고통과 고립무원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학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이 겉으로는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귀중한 발굴물로 한 사람을 유혹할지라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해방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더욱더 많은 것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기 위해 언제나 더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탐욕적으로 멀고 낯선 세계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은 비상하는 자의 위험이다. 우리 자신의 유덕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의 `손님을 후대하는 친절`처럼 어떤 개별적인 덕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과 풍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소모적이고 거의 무관심하게 자기 자신을 대하며 편견 없는 덕을 악덕에 이를 때까지 밀고 나가는데, 이는 위험 중의 위험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가장 강한 독립성에 대한 시험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1절

단발머리 2016-03-0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이해하는 건 제 수준에는 많이 어렵지만, 감상은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니체는 어려워 미뤄두고만 있는데, oren님 글을 통해 한 줄, 두 줄이라도 읽게되니 참 좋습니다. ㅎㅎ

oren 2016-03-01 12: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반갑습니다. 저도 가끔씩 단발머리 님과 같은 경험을 하며 즐거울 때가 있답니다. 제가 한 번도 읽을 생각을 못해봤거나, 혹은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작품들 속의 문장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 말이지요. 그런 스치듯 만나는 인연들이 쌓여서 결국엔 나도 모르게 그 작가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때조차도 있게 마련이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