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에서 시작된 호모 파베르의 진화



 

 

손으로는 어찌 하지?

사랑하는 애인들끼리는 화를 내고, 서로 화해하고, 간청하고, 지적하는 모든 일을 눈으로 한다.

손으로는 어찌 하지? 우리는 요구하며, 약속하며, 부르며, 내보이며, 위협하며, 기원하며, 간청하며, 부인하며, 거절하며, 물어보며, 감탄하며, 헤아리며, 고백하며, 후회하며,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의심하며, 가르쳐주며, 명령하며, 교사하며, 맹세하며, 증거하며, 비난하며, 처단하며, 죄를 사하며, 욕설하며, 경멸하며, 도전하며, 분개하며, 아첨하며, 갈채하며, 축복하며, 굴욕을 보이며, 조롱하며, 화해하며, 권장하며, 고무하며, 축하하며, 즐기며, 동정하며, 슬퍼하며, 낙담시키며, 절망하며, 놀라게 하며, 소리치며, 침묵케 하며, 그리고 무엇은 못할 것인가? 혓바닥에 못지않게 잡다하고 복잡하게 무엇이든지 표현한다.



 * * *


 

 

인간의 손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무엇보다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정신의 능력이 엄청나게 증대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진화가 느리고 완만한 과정이라면 그런 커다란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윈의 답은 그 책의 4장에 있다. 그는 인간이 독특한 신체적 속성을 가졌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인 인간의 직립자세다. 다윈은 직립자세와 직립보행으로 인간의 손이 자유로워졌고, 그 결과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때문에 원숭이들 가운데 한 종류의 지능이 급속히 발달했으리라고 보았다.

직립의 관념은 다윈이 처음 도입했으나 처음에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인식되지 않았다. 1891∼1892년 외젠 뒤부아가 '자바인', 즉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지금은 '호모'를 붙여 부른다)를 발견한 뒤에야 그 이론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피테칸트로스의 대퇴골은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며, 두개골의 크기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었다. 그래도 직립의 중요성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921∼922쪽)


 

 * * *

 

 

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을 어느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최초의 무기, 최초의 연장이 제조된 시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부셰 드 페르트Boucher de Pertes가 물랭-키뇽Moulin-Quignon의 채석장에서 발견한 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기념할 만한 논쟁을 잊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가 발견한 것이 정말로 도끼인지 아니면 우연히 부서진 부싯돌 조각인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작은 도끼였을 경우에는 우리가 지성, 특히 인간의 지성과 마주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아무도 단 한순간이나마 의심하지 않았다.(212쪽)

인간 지성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기계적 발명이 처음에 그 본질적인 행보였다는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사회적 삶은 인공적 도구의 제작과 사용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보의 길에 표적을 세우는 발명들은 그 방향도 역시 그려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어려운 것은 인간성의 변형은 보통 도구의 변형들보다 뒤늦게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적이고 심지어 사회적인 습관들은 그것들이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황들보다 상당히 오랜 기간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한 발명의 심층적 영향은 우리가 이미 그것의 새로움을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주목된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 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지성을 그 본래적인 행보로 나타나는 것 안에서 고찰할 경우 그것은 인공적 대상들을 제작하고, 특히 도구를 만드는 도구들을 제작하며, 그 제작을 무한히 변형시키는 능력이다.(2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고양이를 희롱하고 있자면

자만심은 타고난 근본적인 병폐이다. 모든 생령들 중에서도 가장 재난당하기 쉽고 취약하며,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의 가장 나쁘고, 죽어 없이지며 비천한 부분에 못 박혀, 하늘의 끝없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 단계의 주거로, 여기 이 세상의 진흙과 분뇨통 속에서 세 가지 동물들(조류·포유류·어류) 중의 가장 나쁜 조건에 있는 동물들과 함께 자기를 보고 느끼고 한다. 그러고도 그는 상상력으로 달의 궤도 위에 올라서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바로 이 공상력으로 그는 자기를 하느님과 견주며, 하늘의 거룩한 조건을 자기가 차지하고 자기 자신을 따로 골라 다른 생령들과는 구별해 놓고, 자기 동료며 친구인 동물들에게는 그들의 몫을 갈라 주며, 그들에게 자기 멋대로 정한 소질과 힘을 부여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 지성의 힘으로 동물들의 내적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동물들에게 어리석은 성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짐승들과 우리 사이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함이 어째서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짐승이라고 보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크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자연은 보편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생령 중에서, 자연이 그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아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그들은 방자한 생각으로 때로는 자기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그 반대편 극단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속박당하고 잘 씌워져서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이며, 남이 내버린 물건으로밖에 자기를 싸감아 무장해 볼 거리도 없다.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이 그들을 조개껍데기·깍지·덧껍질·털·모사·가시·가죽·잔털·날개짓·거북·등껍질·양털 가죽, 돼지털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대로 옷을 입혀 주고, 그들을 발톱·이빨·뿔 등으로 무장시켜서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고, 자연이 헤엄치기·달음질치기·날기·노래하기 등 그들에게 맞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우는 것 외에는 배우지 않으면 길가기·말하기·밥먹기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접힌 부분 펼치기 ▼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디오케네스는 부모들이 자기를 노예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어버이들은 미쳤어. 나를 맡아 대접하고 먹여 살리는 자야말로 나의 노예요" 하고 말했다. 짐승을 먹이는 자들은 짐승이 그들을 섬긴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그뿐더러 짐승들에게는 더한층 품위 있는 면이 있다. 사자는 결코 다른 사자를 섬긴 일이 없고, 말이 다른 말을 섬긴 일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들을 사냥하러 가듯, 호랑이와 사자들은 사람을 사냥하러 간다. 서로간에 같은 사냥을 하고 있다. 개들이 토끼에게 꼬치 고기가 잉어에게, 제비가 매미에게 , 매가 콩새와 종달새에게 하는 식이다.




 

칸디아의 염소들

칸디아의 염소들을 보면, 그들이 화살을 맞았을 때에 수많은 잡초들 중에서도 백선(白鮮)을 골라서 치료하며, 거북은 독사를 잡아먹으면 즉시 화박하(花薄荷)를 구해서 속을 훑어 내고, 도마뱀은 회향(茴香)으로 눈을 닦아 밝히며, 고니는 스스로 바닷물로 관장하고, 코끼리는 자기 몸과 자기 동무의 몸에서뿐 아니라 주인의 몸에서도(그 증거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한 포로스 왕의 코끼리가 있다), 전쟁 때 적에게 얻어맞은 작은 창과 삼지창 등을 우리로서는 할 수 없을 만큼 아프지 않게 뽑아 낸다. 이런 것을 어째서 지식이며 예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동물들을 얕보기 위해서, 그들이 이런 일을 아는 것은 단지 본성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라고 핑계하는 수작은, 그들에게서 지식과 예지의 자격을 빼앗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도 확실한 여 선생님(本性을 가리킴)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보다도 더 그들에게 이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복습하는 코끼리

아리우스는 말한다. "나는 옛날에 한 꼬끼리가 양쪽 허벅다리에 꽹과리를 달고, 또 꽃대롱에도 하나 달고, 이것을 치는 소리에 맞춰서 다른 놈들은 모두 동그랗게 춤을 추며 악기의 지휘에 따라서 어느 박자에 가서는 머리를 올리고 숙이는 것을 보았는데, 이 화음은 듣기에도 유쾌하였다." 로마의 극단에서는 코끼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끊겨서 대단히 배우기가 힘든 많은 음계와 여러 박자에 맞춰 춤추며 움직이는 것을 예사로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공부한 것을 혼자서 외어 보며, 스승에게 꾸지람받고 매맞지 않으려고 힘써 조심해 가며 복습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는 범상치 않은 일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이렇게 긴 기록으로 능청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같이 사는 동물들에 관해서 여느 때 우리가 보는 것을 상세히 연구해 본다면,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것을 수집해 오는 것만큼 경탄할 만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진행은 모두가 동일한 본성에 의해서 굴러간다. 현재의 상태에 관해서 유능하게 판단한 자는, 확실히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사냥꾼들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여러 마리의 강아지 속에서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그 어미가 고르도록 하면 된다고 한다. 개 집에서 강아지들을 밖에 내놓으면 어미개가 맨 먼저 가져다 들여놓는 놈이 언제나 가장 나은 놈이며, 개 집을 사방으로 불로 둘러싸는 체하면, 살려내려고 가장 먼저 달려 드는 강아지가 가장 좋은 놈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짐승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예측하는 습관을 가졌거나 또는 새끼들을 판단하는 데에 우리와는 다른 더 생기있는 덕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짐승들이 출생하고, 새끼를 치고, 기르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살고, 죽고 하는 방식이 우리와 아주 닮은 이상, 우리가 짐승들보다 나은 조건을 우리에게 붙이고 짐승들에게서 그들의 원래 자질을 끊어내 버리는 것은,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정으로 말하면

우정으로 말하면, 그들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생기있고 견실하다. 리시마코스 왕의 개 히르카노스는 그 주인이 죽자, 그의 침대 밑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받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가, 시체를 태우는 날 달려가서 그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피로스라고 부루는 사람의 개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로 그의 침대 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실어갈 때에 함께 실려가서 마침내 그 주인을 불태우는 섶 속에 뛰어들었다.




 

충성심으로 말하면

충성심으로 말하면, 세상에 사람만한 배신자는 없다. 우리 역사에는 개들이 죽은 주인들의 원수를 맹렬히 추격해 간 이야기가 있다. 피로스 왕은 어떤 개가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개가 사흘 동안이나 이러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 시체를 매장하라고 명령하고, 개는 자기가 데리고 갔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군대의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러 갔을 때에, 이 개는 자기 주인을 살해한 범인을 알아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듯 그들을 향하여 맹렬히 짖으며 대들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지적으로 살인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는 수속이 진행되어 얼마 뒤에 재판의 한 방법이 되었다. 현자 헤시오도스의 개도 나우팍토스 인 카니스토르의 아들들이 자기 주인에 가한 살인을 입증하여 똑같이 복수를 하였다.

다른 개 하나는 아테네의 어느 사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신을 모독하는 도둑 하나가 가장 귀중한 보배를 훔쳐가는 것을 보고 힘 자라는 데까지 짖었다. 그래도 집사가 잠을 깨지 않자, 이 개는 도둑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날이 샌 다음에도 도둑을 눈에서 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러 감시하며, 그가 먹을 것을 갖다 주어도 받아 먹으려 하지 않았으나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겐 꼬리를 흔들며 주는 것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도둑이 자려고 멈추면 이 개도 같이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 개의 소식이 사원의 집사들에게까지 이르러 그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크로미온 시에서 개를 확인하고, 그 도둑을 잡아 아테네 시로 데려와 처벌하였다.

재판관들은 이 개의 착한 봉사에 대한 감사로,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국가의 비용으로 얼마간의 밀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수도사들에게 개를 보살펴 주도록 명령하였다. 플루타르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며 자기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사람의 손님이 된 사자와 사자의 의사가 된 사람

감사의 심정으로 말하면(우리는 이 말을 애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예 하나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것은 아피온 자신이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어느 날 로마에서 시민들이 보기 드문 여러 짐승들, 그것도 아주 큰 사자들의 싸움을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는 사나운 생김새와 억세고 굵직한 네 다리와 거창하고도 무섭게 포효하는 소리로 온 관중의 시선을 독차지하였다. 시민들에게 이 짐승과 싸우기로 소개된 여러 노예들 중에, 다키아 출신의 안드로두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집정관의 직위를 가진 한 로마 귀족의 노예였다. 사자는 멀리서 그를 알아보더니, 먼저 깜짝 놀란 듯 딱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마치 옛 친지와 상면하려는 것처럼 부드럽고 평화로운 태도로 아주 온순하게 접근해 왔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찾던 것을 확인해 보고는 개들이 주인에게 아첨하는 식으로 꼬리를 흔들며, 미리 공포에 눌려 정신을 잃은 이 가련한 노예의 손이며 엉덩이에 주둥이를 대고 핥기 시작하였다. 안드로두스는 이 사자가 순하게 구는 데 정신을 차려 눈을 똑바로 떴다. 마주 쳐다보고는 서로 알아보고, 그러고는 노예와 사자가 서로 쓰다듬으며 기뻐하여 마지않는 광경은 보기에도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이때 시민들은 기뻐하며 환호성을 울렸다. 황제는 그 노예를 불러 오게 하여 이 일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안드로두스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신기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제 주인이 아프리카의 총독으로 있을 때, 저를 잔인하고도 혹독하게 부리며 날마다 매질만 하였기 때문에 저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지방에서 권세가 있는 그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으려고, 가장 가까운 길을 찾아, 사람이 살 수 없는 외딴 사막으로 달아났습니다. 먹고 살 방법을 찾을 길이 없으면 자살할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점심때가 되자 햇볕은 극도로 강렬하고 더위는 참을 수 없이 심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찾아 낼 수 없는 어느 은밀한 동굴에 이르러 그 속에 쓰러지듯 들어갔습니다. 바로 뒤따라 갑자기 이 사자가 들어왔습니다. 사자는 한쪽 발을 다쳐서 피를 흘리고 몹시 아파 신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들어왔을 때에 저는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가 그의 집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제게로 가까이 오더니 다친 발을 내밀며 구원을 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곧 사자 발에 박혀 있는 나뭇조각을 뽑아 내고, 사자와 조금 더 낯을 익힌 후에, 상처의 고름을 짜내고,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닦고 씻어 주었습니다. 아픔이 다소 진정되었는지 사자는 발을 제 손에 맡긴 채 누워서 잠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자와 저는 3년 동안 같은 고기를 먹으며, 그 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냥을 나가 잡아오는 짐승의 가장 좋은 부분을 제게 갖다 주었습니다. 저는 불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햇볕에 말려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짐승과의 야만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하고, 사자가 사냥을 나간 틈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아프리카에서 이 도시로 끌려와서 제 주인에게 인도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주인은 즉시 저를 사형에 처하여 짐승들에게 던져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 사자도 바로 뒤에 잡혔고, 상처를 보살펴 준 은혜를 지금 이 시간에 갚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안드로두스가 황제에게 말한 이야기이다. 이 소문은 한 입 두 입을 거쳐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모두의 요구에 따라 그는 사면 판결을 받아 자유를 얻었고, 시민들의 명령에 따라 그 사자도 풀려 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안드로두스는 이 사자를 짤막한 줄로 매어 로마의 주막집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던져 주는 돈을 받아서 살아가고, 사자는 사람들이 던지는 꽃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저기 사람의 손님이 된 사자와, 사자의 의사가 된 사람이 온다"고 하더라고 아피온은 말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개, 코끼리, 호랑이

도량(度量)의 크기로 말하면, 인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보내 온 큰 개가 한 일보다도 더 분명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싸워 보라고 처음에는 사슴을 내놓고 다음에는 산돼지, 그리고 다음에는 곰을 내놓아도, 그는 상대를 않으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그러나 사자 한 마리를 보았을 때에는 즉시 벌떡 일어서며, 이놈이면 한번 싸워 볼 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일로 말하면, 어떤 코끼리 한 마리가 분에 복받쳐 자기를 부리던 사람을 죽이고는 너무 극심한 비탄에 빠져, 먹을 생각을 않고 그대로 죽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대성으로 말하면,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짐승인 어느 호랑이 한 마리가 그 앞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내 주어도 해치지 않고 이틀 동안을 굶고 지내다가, 사흘째에는 자기가 갇혀 있던 우리를 부수고 나가서 다른 먹을 거리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면서, 자기 손님인 새끼염소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시온 이야기

서로 사귀어서 이루어지는 친밀성과 합의의 권리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고양이·개·토기를 함께 살도록 길들여 볼 때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로, 특히 시칠리아의 바다로 여행하는 자들은 알시온의 생활 조건에서 인간 사고력의 한계를 넘는 일을 경험으로 배운다. 어떤 종류의 동물들의 잉태와 출생과 해산에, 자연이 그만한 영광을 부여한 일이 있던가?

과연 시인들이 말하는 바처럼, 델로스의 섬은 옛날에는 둥둥 떠다니다가 라토나의 해산을 위해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시온이라는 새가 물결 위에 새끼를 치는 동안은 바다 전체가 정지해서 잔잔해지고 물결도 바람도 없고 비도 오지 않게 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1년 중에 낮이 가장 짧은 동지 때의 일이며, 그의 특권 덕택에 우리는 한겨울에도 이레 밤 이레 낮을 위험 없이 항해할 수 있다. 그 암컷들은 자기 짝 이 외에는 다른 수컷을 모르며, 한평생 버리지 않고 그를 거둔다. 그리고 수놈이 노쇠하여 허약해지면 그를 자기 어깨에 메고 사방으로 다니며, 죽을 때까지 섬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알시온이 새끼를 기르려고 물결 위에 지어 놓은 보금자리의 놀라운 구조를 밝혀 보거나 그 재료를 짐작해 볼 총명성을 가져 본 일이 없다. 플루타르크는 그 새의 집을 열어 보고 만져도 보았다는데, 그 재료는 여느 물고기의 뼈를 서로 맞추고 잇고 엮고 다른 것은 가로지르고 한 것으로, 곡선과 둥근 면을 조절하여 물에 잘 뜨도록 동그란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는 집을 다 지어서는 그것을 물결 위에 갖다 놓는데, 바다의 물결은 그것을 살그머니 쳐서 아직 맺어지지 않은 곳을 더 여미고, 그 구조가 아직 확실치 못해서 늘어진 곳을 다진다. 또 잘 이어져 있는 것은 물결이 쳐 조이기 때문에, 돌이나 쇠로 두드려도 여간해서는 부서지지도 풀리지도, 손상되지도 않게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더욱 감탄할 일은 그 내부의 오목한 형상과 균형이다. 과연 그 집을 지은 새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게 꼭 닫혀져 있어서, 비단 바닷물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여며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구조에 관해 서적에서 인용한 극히 명백하게 설명된 묘사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그 구조를 꾸미기에 곤란한 면을 아직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허영되기에 우리가 모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우리 능력만 못한 것으로 보고, 경멸조로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펼친 부분 접기 ▲

 



털도 뼈도 없는 토끼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내부와 생명이 매인 부분들로 보면 돼지가 그렇다. 아주 벌거숭이로 해놓은 인간을, 그의 오점이나 타고난 굴종과 완전하지 못함을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우리가 몸을 감싸고 다니는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미로 우리를 장식하고, 그들에게서 벗셔 온 물건 밑에 우리를 가리려고, 털실·날개깃·털·명주실 등을 빌려 오는 것은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달라고 해야 할 만한 일이다.



* * *

 













 

 

다윈의 연구 방법

『인간의 유래』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 작품에 나타나는 다윈의 수많은 통찰력은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이 재발견해내고 있다)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윈의 연구 방법은 인간과 동물의 정신적 유사성을 찾고 이들의 정신이 더 높이 발달될 수도 있었을 진로를 제시하는 것이다. 『종의 기원』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제 심리학은 지적 능력과 용적이 단계적으로 획득된다는 새로운 원리 위에 놓일 것이다"라는 다윈의 자신만만한 어구가 『인간의 유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25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인간의 유래』와 다윈의 진화론>中에서
 



 

인간에게 효과가 있는 약물

인간은 여러 동물들과 공수병, 천연두, 비저병, 매독, 콜레라, 수포진 등과 같은 질병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인간과 동물의 조직 구조와 혈액 조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최상의 현미경이나 화학적 분석을 통해 비교한 것보다 훨씬 잘 보여준다. ······ 인간에게 효과가 있는 약물이 원숭이에게도 같은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많은 종류의 원숭이들이 홍차, 커피, 증류주에 예민한 미각을 갖고 있다. 원숭이들은 즐겁게 담배도 피울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직접 관찰한 것이다. 브렘은 북동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를 이용하여 야생 캐코원숭이를 포획한다고 주장했다. 즉 맥주를 그릇에 담아놓고 개코원숭이가 그것을 마시고 취하면 그때 개코원숭이를 잡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잡힌 개코원숭이 몇 마리를 우리에 가두고 본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들 개코원숭이의 행동과 이상한 얼굴 표정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다음날 아침 개코원숭이들은 매우 시무룩했으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무척이나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맥주나 포도주를 내밀자 그들은 역겨워하며 외면했지만 레몬 주스는 받아 맛있게 마셨다." 미국산 거미원숭이는 브랜디에 취해본 이후로 브랜디를 절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 원숭이는 많은 사람들보다 현명했다.(47∼48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그외의 다른 모든 척추동물들이 동일한 보편적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고, 왜 그들의 배발생 초기 단계가 모두 동일하며, 또 왜 그들이 특정한 흔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어떠한 견해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전체 동물 계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동물의 인척 관계와 분류, 그리고 지리적 분포와 지질학적 계통에서 얻은 증거들을 다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선천적인 편견이며 우리의 조상이 반신반인에서 유래되었다고 선언하는 오만불손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여러 포유동물의 비교해부학과 발생 과정에 박식했던 박물학자들이 각각의 생물을 독자적인 창조 활동의 작품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
(70∼71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개의 감정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다.

개는 자기가 받은 애정에 이자를 붙여 인간에게 되돌려준다. 말, 개, 양 등이 동료들과 헤여졌을 때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말과 개는 다시 만났을 때 서로 강한 애정을 보여준다. 개의 감정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다. 개는 주인이나 가족과 함께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방에서 몇 시간을 평화롭게 놀 수도 있지만 잠시라도 혼자 남게 되면 우울하게 짖거나 울부짖는다.
(171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4장 인간과 하등동물의 정신 능력 비교> 中에서
 



 

털이 있고 꼬리가 달린 네발동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발생 중인 인간의 배를 생각해보자. 또 인간이 하등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유사한 여러 구조와 흔적 기관, 그리고 종종 나타나는 복귀돌연변이를 행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의 먼 조상이 가졌을 모습을 일부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동물 계열의 적당한 위치에 그들을 대략 끼워넣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이 털이 있고 꼬리가 달린 네발동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 그들은 나무 위에서 생활했을 것이며 구세계에서 살았을 것이다. 만약 박물학자가 이들의 모든 구조를 조사해본다면 이 생물은 구세계 원숭이와 신세계 원숭이의 매우 먼 조상과 마찬가지로 사수목 동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사수목 동물과 모든 고등 포유류는 아마 먼 옛날의 유대류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대류는 양서류와 비슷한 생물에서 출발하여 오랜 시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생물을 거치며 형성되었고 다시 이 양서류는 어류와 비슷한 동물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과거의 모든 상황이 명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든 척추동물의 먼 조상이 아가미를 갖고 암수의 특징을 한 몸에 갖추었으며, 뇌와 심장처럼 매우 중요한 기관은 불완전했거나 전혀 발달되지 않은 수생동물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동물은 다른 생물보다는 오늘날 바다에 사는 멍게와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559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엄청난 연속 사건의 결과

이 책에서 얻은 결론은 상당히 비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을 비난하는 사람은 뚜렷한 하나의 종인 인간의 기원이 변이와 자연선택의 법칙을 통해 어떤 하등동물에게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본래의 생식 법칙에 따라 한 개인이 태어났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왜 더 비종교적인지 그 이유를 밝혀야만 한다. 종의 출현이나 한 개체의 출현은 모두 엄청난 연속 사건의 결과다. 우리의 마음은 이 엄청난 사건이 단지 무계획적인 우연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면 신체 구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변이, 결혼으로 맺어지는 한 쌍의 융합, 그외 비슷한 여러 사건이 모두 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고 믿을 수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 이러한 결론에 비위가 상할 것이다.(564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

이 작품에서 도달한 주요 결론, 즉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생의 황폐한 해안에서 처음으로 푸에고 제도 원주민 무리를 보고 느꼈던 그 경악스러움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고 온몸에는 얼룩덜룩 칠을 한 채였다. 그들의 긴 머리털은 헝클어진 채였고 흥분하여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그들의 표정은 거칠고 놀라움과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살았다. 정부도 없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자비했다. 토착지의 미개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관 속에 비천한 생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큰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적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엄청난 희생을 바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아를 살해하고 아내를 노예처럼 취급하며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미개인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ㅗ 무서운 적에게 당당히 맞섰던 영웅적인 작은 원숭이나 산에서 내려와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구해 의기향양하게 사라진 늙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란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571∼572쪽)

 -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 * *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인간의 근력에 비례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中에서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

현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물자체로서 의지는 하나다. 이것을 인식해야 비로소 자연의 모든 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탄할 만하고 지극히 명백한 유사성과, 동시에 주어지지는 않더라도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화성, 세계 모든 부분의 본질적인 연관, 방금 고찰한 그들 각 단계의 필연성, 이런 것들을 명백하게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유기적인 자연의 산물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합목적성'의 내적 본질과 의의를 올바르고 충분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된다. (67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 * *

 

이거, 저기서 따왔군!

철학은 너무나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고, 말해 놓은 것도 너무 많아서, 우리의 몽상이나 잠꼬대 따위도 모두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망상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그 속에 없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다.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졸렬하고 어리석은 말은 찾아볼 수 없다."(키케로)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생각을 더 자유롭게 사람 앞에 내놓는다. 이런 것은 어디서 본뜬 것이 아니고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옛 사람들의 심정과 닿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렇다고 누가 "이거, 저기서 따왔군!" 하고 말해서는 안 될 일이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from Value Investing 2016-06-24 01:31 
    (밑줄긋기) 집주인 되는 회색 말은 종인 갈색 말에게 시켜서는 그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놈을 풀어가지고는 마당으로 데리고 나오게 했다. 그러더니 그 짐승과 나를 나란히 세워놓고는 주인과 종이 다같이 우리의 모습을 번갈아가면서 비교해보고는 "야후"라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 그 역겨운 짐승이 인간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이나 공포심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짐승은 나와는 다르게 얼굴은 평평했고 코는 납작했
 
 
숲노래 2013-07-2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살피면,
사람이 어느 동물에서 진화를 했다기보다
모든 생명체가 한꺼번에 태어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oren 님이 옮겨 놓으신 글에서도 찬찬히 살필 수 있구나 싶은데,
풀이며 물이며 바람이며 흙이며 해며,
지구별 모든 목숨이 골고루 어우러지도록 이루어진
삶이로구나 싶어요.

oren 2013-07-26 20:43   좋아요 0 | URL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파악되고 또 전해져 오던 훌륭한 얘기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이 그런 것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써 '구별'하느라 여념이 없는 게 문제이겠지요.

* * *

"가장 작은 먼지 조각일지라도 우리 태양계 전체와 연대적이며 그것과 함께 물질성 자체를 이루는 불가분적 하강 운동 속으로 이끌려 가듯이, 모든 유기적 존재들은 [그와 반대로] 가장 미천한 것에서부터 가장 고급한 것까지, 생명의 최초의 기원들로부터 우리가 존재하는 시대까지 그리고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물질의 운동과 상반되는 그리고 그 자체로 불가분적인 단일한 충동을 가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0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中에서
 
몽테뉴에 대한 추억......


 














30년 만에 다시 읽는 《몽테뉴 수상록》이 너무 재미있다. 오래 전에는 그의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작품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 그 책을 읽었으나,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니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어느덧 그다지 낯설지 않게 되어 옛날에 그의 글을 읽을 때보다 여러 인물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등장하는 무수한 고대의 유명 인물들 가운데 '그들이 쓴 작품'을 내가 직접 읽어본 경우가 그리 드물지가 않다는 건 내가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몽테뉴의 글을 오래 전에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여러 인상들이 나에게 꽤나 강렬했던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몽테뉴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작품을 내가 직접 읽어본 걸로 따지자면 대략 호머,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카이사르,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단테 정도이고, 여태까지도 몽테뉴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쓴 원작을 직접 읽어보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느껴지는 인물들은 호라티우스, 플루타르크, 루크레티우스, 페트라르카 등이다.

그런데 1,33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절반쯤 읽으면서 마주친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재미나는 구절들 가운데 특히나 내게 웃음과 함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은 '몽테뉴가 키케로를 골리는' 부분이다. 사실 '수상록' 속에는 키케로가 한 말을 인용한 대목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점만 보더라도 몽테뉴가 키케로를 상당히 좋아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키케로를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해' 하며 틈만 나면 그를 자꾸만 쿡쿡 찌르고 꼬집어 주고 싶어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 같다. 나는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그 두 인물이 직접 한 번 만나서 대포라도 한잔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사실은 몽테뉴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이겠지만) 얽힌 얄궂은 감정을 좀 풀었으면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몽테뉴가 키케로에게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문장들을 읽으며 어딘지 모르게 '공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대리만족 비슷한 감정을 슬쩍 맛보게도 된다.

그렇지만 어쨌든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수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몽테스키외, 볼테르,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를 거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물들이 키케로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케로의 변론' 덕분에 유명세를 탄 인물 가운데 앙리 베르크손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베르크손이 고등사범학교에 '3위'로 입학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는 프랑스 사회주의를 이끈 장 조레스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도 있었다. 입학 당시 수석은 조레스의 차지였다. 조레스와 베르크손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는 베르크손의 면모를 눈앞에서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교수가 두 학생에게 한 명은 망실된 키케로의 변론을 재구성하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그것을 반박하게 했다. '조레스가 먼저 그의 유창한 언술로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와 이미지를 섞은 웅변을 토하며 키케로를 대신해 변론했을 때,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반론자가 일어나 아무런 웅변적 음율도 없이 차분히 상대방의 주장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는데, 그 타격점이 너무나 정확하고 그 표현의 선택이 너무나 섬세하며 폐부를 찌르는 것이어서 키케로의 대변자가 세운 대건축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으나, 내심으로는 모두 그 논리의 힘과 사유의 섬세함을 경탄했다'고 한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리뷰 중에서 인용)



몽테뉴의 얘기를 극히 일부만이라도 여기에 덧붙이지 않으면 이 글은 아무런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 * *

내가 빌려다 쓰는 것

나는 글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은 아주 약한 사람이다. ······ 그러니 내가 빌려다 쓰는 것을 가지고 내가 취급하는 문제를 빛내 볼 거리를 택할 줄 아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나는 어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내 지각이 빈약하여 자신이 잘 말하지 못할 것을 남을 통하여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빌려 온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저울질한다. 수량으로 가치를 올릴 생각이었던들 몇 갑절은 내놓았을 것이다. 내가 차용해 온 곳은 모두가 옛날의 너무나 유명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판단력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나는 고대의 우수한 시인들이 뽐내거나 따지고 파고드는 일을 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페트라르카식의 높은 음조의 광상적 노래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오는 모든 시적 작품의 장식을 이루는, 좀더 보드랍고 조심스런 익살까지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비평가로서 이 고대 시인들에게 흠을 잡는 이가 없고, 마르티알리스의 시구의 톡 쏘는 맛보다도 카툴루수의 풍자시에 연마되고 줄곧 상냥하고 화창하게 아름다운 맛을 비길 바 없이 감탄하지 않는 자 없다. 마르티알리스가 자신에 관해서 "그는 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품 재료는 재주가 있는 기질이 대신된 것이다 "라고 말하듯, 내가 금방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먼저 말한 작가들은 흥분하지도 분발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감명을 준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웃음을 찾아 낸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작가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주가 부족하기에 더욱 육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다리로 걸어갈 만큼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타야만 한다.



 

풋내기들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브루투스의 경우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키케로의 경우

키케로의 경우, 나는 그가 학문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탁월한 점이 적었다고 보는 일반의 판단을 따른다. 그는 성질이 호탕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처럼 생긴 뚱뚱한 농담꾼들은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허약하고 허영된 야심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뿐더러 나는 그가 어떻게 자기 시를 세상에 발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변명해 줄 것이 없다. 시구를 잘 못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의 이름의 영광과는 당치 않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판단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의 웅변은 전혀 비겨 볼 거리가 없다.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小) 키케로는 이름 하나밖에 그 부친을 닮은 점이 없었고, 아시아에서 군지휘관이었다. 어느 날 그가 베푼 연회석에 여러 손님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카에스티우스라는 자가 유력자들의 공적 연석에 잘 끼어드는 식으로 식탁의 말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키케로는 자기 부하 하나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이 딴 데 있어 대답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자가 그렇듯, 그는 다음에도 두서너 번 이것을 다시 물었다. 하인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 겸, 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터라, "이 자는 자기 웅변에 비해서 대감님 조상대에서의 웅변이 대단할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 말씀 드린 바로 그 카에스티우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여기에 분개해서 이 가련한 카에스티우스를 잡아들이게 명령하고, 자기 앞에서 실컷 매질하게 하고 "고약하게 공손한 손님이로군" 하였다.



 

esse videatur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중간 것들

······ 진실로 탁월한 역사가들은 알아 둘 만한 사실을 골라 낼 능력을 가지고, 두 가지 보도 중에서 더 진실한 것을 선별할 수 있으며, 군주들의 사정이나 그들의 기분에 관해서 의향을 결론 짓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시키고 있다. 그들이 생각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두 부류의 중간 것들은(이것이 가장 보통이지만) 모든 것을 벌여 놓는다. 그들은 우리가 씹을 것을 대신 씹어 준다.



 

풋내기들

전쟁에서 풋내기들이 위험한 지경이나 아무 잘못 없는 숫자에 몸을 던지며 큰 코를 다친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갈망과 첫 번째 승리의 희망에
유혹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의 말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단테의 시 개작)

철학이 주는 이 충고로 추억 속에다 지나간 행복만을 담아 두고, 우리가 겪은 불쾌한 일을 지워 버리라는 것은 마치 망자의 기술이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 같은 말이니, 다 똑같은 수작이다. 이것은 또 우리를 한층 더 못나게 만드는 충고이다.

지난날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키케로)

운명과 싸울 수 있게 내 손에 무기를 쥐어 주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역경을 발밑에 유린해 버리도록 내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어야 할 철학이 어째서 물러빠지게 이 비겁하고도 꼴사나운 계책으로 나에게 숨을 구멍만 찾아 다니게 하려는 것인가? 기억력은 우리가 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준다. 참으로 무엇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넣은 것이란 없다.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고 축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새겨서 잘 보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키케로)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 때에도 내 추억을 간직하고, 내가 원하여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키케로)는 말이 진실이다. 이 충고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홀로 자기를 감히 현자라고 표명한 자'의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3-07-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의 수상록, 읽다 말았어요.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가느라고...ㅋㅋ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다 읽었지요.
30년만에 다시 읽는 책은 새로운 느낌일 것 같아요.
저도 같은 책을 시간의 간격을 길게 두고 읽은 적이 있어서 알아요.
느낌만 새로운 게 아니라 문장의 해석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지요.

같은 책을 반복해 읽으면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책을 더 사고 싶지 않을 때, 갖고 있는 책을 다시 한 번 읽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oren 2013-07-26 18:04   좋아요 0 | URL
저 한 권의 책을 다시 읽으며 '엄청난 생각들의 원천들'을 다시, 혹은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무지 크네요.
그건 단지 나이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또다른 생각들이 많이 쌓여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듯해요.
자꾸만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게 '고전읽기의 매력'이지 싶어요.

30년 전에 읽으면서 기록해둔 '독서노트'를 뒤적거리며, 그 때 적어두었던 구절을 '다시' 마주치는 기쁨도 크고, 똑같은 번역자(손우성 님)의 글이지만 표현이 조금씩 바뀐 부분도 재미있구요.

독돌이 2015-06-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이랑은 거리가 먼 삶을 살고있었는데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더니...나이가들면서 책의 소중함을 알게되네요.

지금 몽테뉴 수상록을 읽기 시작하고있는데, 제가읽고있는건 압축본인지 훨씬얇고 쉬운표현을 쓰고있어서 저같은 사람도 흥미롭게 읽어가고있습니다.

키케로 라는 이름이 자주등장하여 궁금해 검색해보다가 들어왔어요.

블로그가 달라 댓글을 달아주셔도 못읽을것같아서요...시간되시면 제 블로그와주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hipey3089

좋은 글 잘읽었고, 도움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3부 감정과 행위에 관한 판단 및 책임감의 기초(209∼332)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 이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입니까?"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자마에서 나에게 패하지 않았습니까?"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세 번째인 것이오, 내가 그 전투에서 이겼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거요."


 

한니발과 스키피오에 관련된 일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 세계의 최고 명장은 누구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일 것이다.

플루타르크는『피로스 전기』에서 말하기를, "한니발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명장 중에서 전술과 무술에 있어서 제일 뛰어난 사람은 피로스이고, 그 다음이 스키피오이며 그 다음이 한니발 자신이라고 하였다." 피로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의 순서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 이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니발의 병법과 전술을 창조적으로 모방한 자마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 된 스키피오가, 그 전투가 있고 몇 년 후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한니발을 만나게 되었다. 지중해 세계의 최고 명장이고 한때 로마를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한니발도 자신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던지, 스키피오는 다소 도발적으로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군은 누구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스키피오의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았을 한니발이 스키피오의 입맛대로 대답을 해주었을리 만무하다.

한니발은 대답하기를, 가장 뛰어난 장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했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마치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이 솔론에게 질문한 것처럼,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도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한니발은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라고 했다. 그가 병법의 대가요,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계속해서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기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아닌 바로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다음은 한니발이라는 얘기였다. 스키피오는 이쯤 되면 한편으로 화가 나고 다른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세 번째라는 말에 미소를 머금고,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에게 이겼다면?" 이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자마에서 나에게 진 당신이 어떻게 세 번째인가 하는 뼈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니발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자신의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스키피오의 질문에 대해 한니발은, 고대 세계 최고의 명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 피로스 → 한니발의 순서라고 대답한 셈이다.

플루타르크가 전하는 순위가 맞는 것인지, 시오노 나나미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의 순위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하러 가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현명한 고문관 키네아스는 그의 야심이 얼마나 허영된 것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글쎄, 전하" 하고 물어 보았다. "전하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계획을 세우십니까?" "이탈리아의 영주가 되련다"고 그는 갑자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다음에는요" 하며 키네아스는 말을 이었다. "골과 스페인으로 가겠다"하고 왕은 말했다. "그 다음엔요?" "나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을 정복하여 내 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나는 만족하고 편안하게 살겠다." 키네아스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런 소원이시면 어째서 전하께서는 지금 그렇게 편히 살지 않으시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생활을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이 두 나라 사이에 그만한 수고와 위험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3-07-17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오노 나나미의 대답을 선택하겠습니다. 한니발의 전술이라는 아주 좋은 예가 있기 때문에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이길 수 있다는 말,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oren 2013-07-18 10:45   좋아요 0 | URL
훌륭한 역사가인 플루타르크의 얘기보다 시오노 나나미의 얘기가 훨씬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저 역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는 한니발 자신을 더 앞세우는 한니발 스스로의 평가에 대해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페크pek0501 2013-07-17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랜만입니다. 이 더운 여름날 잘 지내시나요?

글 잘 읽었어요. 잘 뽑으셨네요. 독서광만이 뽑을 수 있는 글인 듯...^^
최후의 삶의 목표는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것, 이군요.
거창한 게 아니네요. ^^

oren 2013-07-18 10:58   좋아요 0 | URL
여름이 몹시도 덥긴 덥지요?

그저께와 어제, 이틀에 걸쳐서 지방에 다녀왔어요. 가까운 친척분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다가 장지(葬地)까지 다녀왔었지요. 장지가 마침 제 고향 근처여서 고즈녁한 한여름의 시골 풍경들이 새삼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 눈에 다가왔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서울로 되돌아오는 동안에는 '다들 무엇 때문에 분투노력하고 사는가' 싶은 생각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되더라구요.

무더운 여름이지만 늘 상쾌한 바람 느끼며 시원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왜 트위터로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인생에는 트위터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트위터는 심각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럴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게 낫다." (알렉스 퍼거슨)

 * * *


플라톤은 한 아이가 도토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 아이가 "대단찮은 일로 책망하시네요"라고 대꾸하자 "습관은 대단찮은 일이 아니다"라고 플라톤이 대꾸하였다. 우리의 가장 큰 악덕은 연약한 소년 시절에 주름잡히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훈육은 유모의 손에 달렸다고 본다. 어린애가 암탉의 목을 비틀고 개나 고양이에게 상처를 주며 날뛰는 꼴을 보는 것이 어머니들의 소일거리가 되고, 어떤 아버지는 바보처럼 아들이 자기 몸을 방어할 줄 모르는 농민이나 하인을 정당하지 못하게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기사 정신을 가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배신과 속임수로 자기 동무를 농락하는 것을 보면 재롱을 피운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잔인과 폐악과 배반의 씨앗이며 뿌리이다. 그런 것이 싹이 트고 떳떳이 커가서 습관의 손에서 힘차게 득세한다.

이러한 비열한 경향을 아이의 나이가 어리고 경솔한 탓으로 돌리며 변명해 주는 일은 매우 위험한 교육 방법이다. 첫째 이것은 천성이 하는 말이니, 이때 그 천성은 더 약한 만큼 그 소리는 더 순수하고 강력하다. 둘째로 속임수의 더러움은 금화와 푼돈과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에 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푼돈을 다룰 때에만 그렇지, 금화를 다룰 때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식보다는, '푼돈으로 속일 바에야 어째서 금화로는 못 속여?'라고 결론짓는 편이 더 옳다고 본다. 어린애들에게는 조심해서 그 꾸밈 자체를 미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다. 또 그들이 단지 행동에서뿐 아니라, 특히 마음에서 이 악덕을 피하도록 본래의 나쁜 점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악덕이 어떤 가난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런 생각마저 징그럽게 보여 주어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크고 평탄한 길을 걷도록 지도받았고, 또 어린애 장난에라도 속임수나 야바위 따위를 섞을 때에는 분노를 느껴왔기 때문에(진실로 어린애들 장난은 장난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가장 신중한 행동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만큼), 아무리 가벼운 심심풀이라도 속이는 일에는 마음속에서부터 극도의 혐오를 느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7-09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성용은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걸맞게
다 돌려받으리라 생각합니다.

oren 2013-07-09 09:50   좋아요 0 | URL
서형욱 칼럼니스트의 '기성용 징계는 과유불급이다'라는 글을 읽고 나서 저도 갑자기 '과유불급'이라는 말의 뜻이 너무나 헷갈려 그 뜻을 다시 한번 살펴 봤더랬습니다. 나중엔 '과유불급'이라는 낱말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는 게 도리어 뉴스가 되기도 하더군요. 누구나 흔히 아는 고사성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엉뚱하게 쓰다보니 일어난 웃지 못할 헤프닝이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봐도 이번 일은 결코 대단찮은 일이 아닌 듯한데, "대단찮은 일로 책망하시네요"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글쓴이의 과욕이 너무 앞서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매우 위험한 교육 방법'을 욕심낸 자체가 오히려 '과유불급'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숲노래 2013-07-0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런데 기성용 선수는 '엄친아' 아닌 '아친아'로 큰 탓에
스스로 무얼 하는지조차 못 깨닫는 듯해요.

소속사나 아버지 아닌
기성용 스스로 '해명' 아닌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또 이렇게 날뛰니까요.

참 불쌍한 젊은이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쌍한 젊은이가 왜 불쌍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전문가(칼럼니스트와 기자)들도 불쌍해요...

..

따지고 보면 대단찮은 일은 아니지만,
이 젊은 아이들이 그렇게 바보스레 살아가도록 내팽개친
우리 어른들(바로 나 스스로)을 돌아보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로구나 싶기도 해요...

oren 2013-07-09 13:36   좋아요 0 | URL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온 국민들이 그토록 뜨겁게 성원을 보냈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한심스런 꼬락서니'를 바라보는 것도 당혹스럽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혹은 이 마당에 와서까지도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여러 어른들도 스스로 반성해 볼 여지가 참으로 많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