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유일한 이유 212

여하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걱정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약 우리가 사회를 떠나서 홀로 산다면 우리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것이다.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214-215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을 만한 것, 즉 사랑을 받을 만하고 보답을 받을 만한 것은 미덕의 큰 특징이다. 또 가증스럽고 처벌을 받을 만한 것은 악덕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미덕은, 그 행위자 자신의 사랑이나 감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는 것이다. 자신은 이처럼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인식은 그것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내심의 평온과 자기만족의 원천이 되는데, 이는 마치 자신은 이와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악덕으로 인한 고통의 원천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미움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미움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


경쟁심의 기초 217

경쟁심(emulation),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은 본래 다른 사람들의 탁월함에 대한 우리의 칭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받는 것과 같은 이유로 칭찬받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받을 만한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도 칭찬을 받을 만하게 되었음을 스스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공평무사한 방관자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과 행동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듯이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이 우리가 희망한 대로 보인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219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을 자신들에 대한 박수소리 221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이미 즐길 수 없는 명성을 사후에 획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생명을 버려 왔다. 그때 그들은 상상력에 의해 미래에 그들에게 부여될 명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을 자신들에 대한 박수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울린다. 죽으면 결코 그들이 그 효과를 직접 느낄 수없을 사람들의 감탄에 댛나 상념이 그들의 마음속으로부터 모든 자연의 공포 중의 최대의 강력한 공포(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고 자신들을 고무시킴으로썩 거의 인간성이 도달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행위들을 자신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을 때까지 부여되지 않는 시인, 다시 말하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부여되는 시인과, 실제로 결코 부여되지는 않지만 만약 세상 사람들이 우리 행동의 진실한 사정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반드시 부여될 그러한 시인 사이에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전자가 종종 그러한 강렬한 효과를 낳는다면, 후자가 왜 언제나 이처럼 높이 평가되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못 된다.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222

인간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천박한 자들만이 자신들이 전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칭찬에 의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약한 사람은 때때로 그러한 칭찬을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그것을 거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칭찬을 받는 경우 그러한 칭찬으로부터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자신이 행했을 때에는, 비록 그것에 대하여 결코 칭찬이 부여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흔히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시인을 받을 만하지 못한 경우 인류의 시인을 얻는 것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정말로 시인을 받을 만한 경우 사람들의 시인을 얻는 것은 때로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언제나 최고로 중요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224-225

세상 사람들에게 유쾌한 감정을 줄 수 있는 행위의 모든 준칙들을 깨뜨려버린 사람은, 자신이 행한 것이 비록 영원히 모든 인간의 눈으로부터 숨겨지리라고 완전히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소용없는 일이다. 그가 자신이 행한 것을 회상할 때, 그리고 공정한 방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 어떤 동기와도 공감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방황하게 되며, 만약 자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그가 받지 않을 수 없는 대단히 큰 치욕감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 경우에도 그의 상상력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지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구하지 못하는, 그러한 경멸과 조소를 예상한다. 그는 계속 자신이 (사람들의) 경멸과 조소의 자연스러운 대상이라는 것을 느끼고, 만약 이것들이 그에 대하여 실제로 행사된다면 그가 겪을 것을 생각하고 전율한다. 그러나 그가 범한 죄가 단순히 부인의 대상이라는 도덕적 부적정성의 하나에 불과하지 않고 혐오와 분개를 일으키는 엄청난 범죄의 하나라고 한다면, 감수성이 그에게 남아 있는 한,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 공포와 회한의 모든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도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확신할 수 있어도, 더구나 그것에 대하여 복수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계속 그의 전 생애를 비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공포와 회한의 두 가지 감정을 느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 자기 자신이 동류들의 증오와 분개의 자연스러운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마음이 습관화된 범죄 때문에 무감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 가공할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경우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게 될 태도를, 그리고 그들의 얼굴 및 그들의 눈에 나타나는 것들을, 그는 공포와 경악 없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공포에 떠는 양심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이러한 고통이 바로 악마(deamons)이자 복수의 여신(furies)들이다. 이 악마와 복수의 여신은 죄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출몰하여 그들에게 마음의 평정과 안식을 허용하지 않고 흔히 그들을 절망과 혼란으로 이끌어 가는데, 자신의 죄에 대한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는 어떤 확신도 그들을 그 악마와 복수의 여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고, 어떤 무신론의 교리도 이들로부터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정신 상태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상태, 즉 명예도 불명예도 악덕도 미덕도 완전히 느낄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이 악마와 복수의 여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


가장 무가치하고 부당한 비판 234

시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섬세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신인들은 자신의 시가 그와 같은 아름다운 수준에 이미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거의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 및 세상 사람들의 호의적인 판단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고, 그 반대의 것만큼 그를 심하게 낙담시키는 것도 없다. 전자는 그가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받고자 열망하는 호평(好評)을 확인해 주고, 후자는 그것을 흔들어 놓는다. 경험과 성공의 축적이 결국 자신의 판단에 대한 좀 더 많은 확신을 그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악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우 심하게 실망하기 쉽다.

라신(Racine)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비극 『패드라(Phaedra)』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의 이 작품은 그의 생명의 활기가 충만할 때, 그의 능력이 절정기에 있을 때 쓴 것으로 아마 현존하는 비극들 중에서는, 어떤 언어로 된 것이건 간에, 가장 뛰어난 비극일 것이다. 이 위대한 시인은 종종 그의 자식에게, 가장 무가치하고 부당한 비판이 언제나 가장 훌륭하고 정당한 찬사가 그에게 주는 쾌락의 정도보다 훨씬 더 큰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볼테르(Voltaire)가 같은 종류의 가장 경미한 비난에 대해 극도로 민감했던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바보열전(The Dunciad)』은 모든 영시(英詩)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음악적일 뿐만 아니라 운율이 가장 정확한 영원한 기념비적인 시(詩)지만, 이러한 시조차 가장 저질적이고 가장 경멸할 만한 저자들의 악평을 받고 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칭찬과 비난 238

칭찬과 비난은 우리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고, 칭찬받을 만하다거나 비난받을 만하다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자연스런 감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낸다.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호의적인 감정을 얻고자 갈망하는 감정이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감정의 정당한 대상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이 점에서 두 가지 원리는 서로 비슷하고 피차 동류(同類)이다. 피차 동류라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비난받을 만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현세와 내세 244

많은 경우 현세에서의 우리의 행복은 내새(來世)의 삶에 대한 소박한 희망과 기대에 의탁되어 있다. 이 희망과 기대는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서, 이 희망과 기대만이 인성의 존엄에 대한 고상한 이상을 지탱해 줄 수 있으며, 이들만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음울한 예감에 밝은 빛을 비춰 줄 수 있고, 이 세상의 혼란 때문에 때때로 인성이 직면할지도 모를 가장 엄중한 재난의 중압 하에서도 그 쾌활함을 유지시켜 줄 수 있다.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투기업자라면, 그는 이 재난이 유럽의 상업에, 그리고 전 세계의 무역과 상업에 미칠지도 모를 효과들에 대한 많은 추측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재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욱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오늘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도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에 대한 이 사소한 비운을 방지하기 위하여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의 생명을, 만약 그가 그것을 결코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생각에 공포를 느끼며,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결코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우리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관대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애(自愛: self-love)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애(humaity), 즉 인도주의의 온화한 힘이 아니며, 조물주가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자애(benevolence)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조물주의 가장 현명한 목적 261-262

조물주는 그 가장 현명한 목적(즉, 종족의 보존과 번식이란 목적)을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심(孝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정이 되게 만들었다. 종족(種族)의 보존 및 번식(繁殖)은 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전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경우 자식의 생존 및 보호는 전적으로 그 부모의 배려에 의존한다. 그러나 부모의 생존 및 보호가 자식의 배려에 의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조물주는 전자에게는 이처럼 강렬한 감정을 부여해 놓았으므로 일반적으로 그것은 자극(刺戟)되어야 할 필요는 없고 반대로 절제(節制)되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도덕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자식 사랑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과도한 애정, 우리가 남의 자식보다도 자신의 자식에게 훨씬 더 많이 쏟는 경향이 있는 편애(偏愛)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와는 반대로, 도덕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경심(孝敬心)을 가지라고 훈계하고, 부모들이 연로할 때 그들이 받아 마땅한 보답을 함으로써 우리가 아기일 때, 어린아이일 때 부모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으라고 타이르고 있다.

십계명(十戒命:Decalogue)에서는 우리에게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이 후자의 의무 수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를 해놓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을 실제보다 더 좋아하는 척 가장한다고 해서 비난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심을 표현할 때에는 거기에는 너무 많은 가식(假飾)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미망인(未亡人)의 가식적인 비애(悲哀)에 대해서도 그 진정성을 의심한다. 우리가 만약 미망인의 비애가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비록 비애의 감정이 지나치게 표현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하며, 그리고 비록 그 감정을 완전히 시인(是認)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심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가장(假裝)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그것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스토아학파의 냉담함
263

스토아학파의 냉담(stoical apathy)함은 결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없으며, 이런 종류의 냉담함을 지지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궤변(Sophism)은 잘난 체하는 인간들의 가슴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그들의 철석같은 심장을 이 철학이 본래부터 가자고 있던 뻔뻔하고 무례한 정도를 열 배나 키워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랑과 우정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게 읊고 묘사한 시인과 소설가들, 즉 라신(Racine)과 볼테르(Voltaire), 그리고 리차드슨(Richardson)과 모리보(Maurivaux)와 리코보니(Riccoboni) 등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인 제노(Zeno)와 크리시푸스(Chrysippus), 또는 에픽테투스(Epictetus) 등에 비하여 훨씬 좋은 교사들이다.


최대로 태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265

부자에서 빈자로 전락하는 일은 통상 있는 일로서 당사자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재난이다. 그러므로 방관자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지한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사회상태에서 이러한 불행은 수난자 자신에게 어떤 잘못된 행위, 또한 어떤 매우 중대한 잘못된 행위가 없다면 거의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거의 언제나 많은 동정을 받아서 최저의 빈곤상태로 떨어지도록 방치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의 친구들의 도움에 의해서, 흔히 그의 경솔함에 대하여 불평을 말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채권자들 자신의 관용에 의해서, 거의 언제나 초라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할 정도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불행 속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우리는 아마 어느 정도 그들의 심약함을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새로운 처지에 대하여 매우 확고한 모습과 태도를 견지하면서 최대로 태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악화된 처지로부터 어떤 수치심도 느끼지 않고 사회에 있어서의 자신의 지위를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행위 위에 건립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최대의 시인을 받고 우리의 최대 최고의 애정에 찬 감탄을 획득할 것이다.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의 훌륭한 태도에 수여하는 보상 272

조물주가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의 훌륭한 태도에 수여하는 보상은 이처럼 그 태도의 훌륭함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조물주가 고통과 불행의 쓰라림에 대해 수여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은, 그의 태도의 훌륭한 정도가 같을 때에는, 그 고통과 불행의 정도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우리의 자연적 감수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억제의 정도에 비례해서 그로부터 얻는 즐거움과 자부심도 그만큼 커진다. 더구나 이 극복의 즐거움과 자부심이 이처럼 크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향유하는 사람은 전혀 불행할 수 없다. 고통과 불행은 완전한 자기만족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272∼273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가장 현명하고 단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불행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 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시각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그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의력을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각, 즉 자신의 견해와 공정한 방관자의 견해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명예감각, 그 자신의 존엄에 대한 고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방관자의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자연적인, 교육받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들은 계속 그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킬 수 없고, 스스로 자기 행위의 공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양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시각이 그의 마음속에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존재하고, 각각은 그에게 서로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명예심과 자존심이 그에게 지시하는 시각에 따를 때, 사실 조물주는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완전한 자기시인(自己是認)과 동시에 정직하고 공정한 모든 방관자들의 갈채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물주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조물주가 수여하는 보상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그가 당한 고통을 완전히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물주의 보상과 그의 고통의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조물주의 보상이 그가 받는 고통을 완전히 보상해 준다면, 자신의 이기적인 고려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효용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우발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동기를 전혀 갖지 않을 것이다(완전히 보상받는다면 사고를 피하는 것과 피하지 않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물주는 양자에 대한 부모다운 배려에서 그가 가능한 한 모든 우발적 사고들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 중에서도,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최대의 가장 고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274

그러나 인성(人性)의 구조적 특성상,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는 곧 크게 어렵지 않게 일상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남은 전 생애 동안 매우 큰 불편을 계속 겪어야만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족을 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공정한 방관자가 그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보게 된다. 즉, 그는 이 불편함을, 그런 중에서도 혼자서 혹은 여럿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든 통상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곧 자신을 자기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방관자로 된다. 약한 사람들은 처음에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울거나 탄식하거나 그것에 대해 비관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어떤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자신이 장기간 처해 있는 환경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켜 간다 274-275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자신이 장기간 처해 있는 환경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데, 이러한 사실이 아마도 우리를 스토아학파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극히 정확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즉, 한 가지 장기간 처해 있는 상황과 또 다른 상황과의 사이에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 또는 만약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가운데 일부가 무슨 열렬하고 절실한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선택(選擇)과 편애(偏愛)의 대상이 되고 일부는 단순히 거절(拒絶)의 대상이 된다는 것. 즉 단지 한 쪽에 치워져 있거나 회피의 대상이기는 해도 열렬하고 절실한 혐오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마음의 평정과 향유(享有) 가운데 있다. 평정 없이는 향유할 수 없고, 완전한 평정이 있는 곳에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모든 영속적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고 통상적인 평정의 상태로 돌아온다. 순경(順境)의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마음은 이와 같은 평정상태로 돌아오고, 역경(逆境)의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마음은 이와 같은 평정상태로 돌아온다. 유행을 좋아하고 성격이 경박한 로잔(Lauzun) 백작조차도 바스티유(Bastile) 감옥 안의 그 고독 가운데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여 거미 사육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고가 더욱 풍부한 사람의 경우에는 아마도 더욱 빠르게 그 평정의 상태를 회복할 것이고, 그 자신의 사고 속에서 훨씬 나은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중(愼重)이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지도(指導)하지 않고, 정의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모든 위험한 게임들 가운데서 가장 불평등한 게임을 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으로서, 그가 장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
277

한가한 망상(妄想) 속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 가장 의기양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초라한 지위에서 우리가 언제든지 손안에 넣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쾌락들과 거의 언제나 같은 것이다. 허영(虛榮)과 우월(優越)이라는 경박한 쾌락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우리는 개인의 자유만이 존재하는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마음의 평정(平靜), 즉 모든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향유(享有)의 천성이자 기초가 되고 있는 마음의 평정과, 허영 및 우월이란 쾌락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가 지향하는 휘황찬란한 위치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초라한 지위에서 용이하게 즐길 수 있는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쾌락들을 마찬가지로 쉽게 향유할 수 있을는지도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의 묘비에 새겨진 글

역사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고, 당신 자신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 보고, 당신이 책에서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개인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극히 불행했던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어떠했었는지를 주의를 기울여 고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 중 절대다수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이 자신의 한창 좋은 때가 언제인지, 조용히 앉아서 만족하고 쉬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즉, 만족하고 멈추어야 할 때를 몰랐던 데 있는 것이다). 온갖 약을 복용함으로써 건강한 자신의 신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어느 한 사람의 묘비(墓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의 몸은 건강했다. 나는 더욱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라고. (277쪽∼278쪽)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 278∼279

다음의 관찰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믿는다. 즉, 다소라도 구제(救濟)의 여지가 있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구제의 여지가 없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경우, 총명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와 연약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 사이에 어떤 눈에 띄는 차이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의 경우 또는 불행이 최초에 엄습한 때이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시간(時間)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慰安者)가 점차 저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최초에 자존심과 사내다운 기개의 교도(敎導)에 의해 도달하였던 그런 수준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의 경우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자식의 죽음, 친구나 친척의 죽음 등처럼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여성은 그런 경우 흔히 거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이런 가장 연약한 여성까지도 가장 강인한 남성과 같이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복 불가능한 재난 가운데서도, 총명한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는 결국 회복될 것이 틀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즐기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스스로 그 아래 들어가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교사들
282

그는 본래 가장 완전한 자기억제력을 획득하기에 적합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획득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연습과 실천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것 없이는 어떠한 습관도 상당한 정도로 형성될 수 없다. 곤란, 위험, 상해, 불행 등은 우리가 그 밑에서 이러한 미덕의 실천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아무도 스스로 그 아래 들어가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교사들인 것이다.


고독할 때 우리는
284

고독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기 쉽다. 즉, 우리는 우리가 했을지도 모를 선행(善行)과 우리가 받았을지도 모를 상해(傷害)를 과대평가하기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운에 의해 지나치게 의기양양해 하고, 우리 자신의 불운에 의해 지나치게 실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의 대화는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우리의 기분을 더욱 좋게 한다. 우리 가슴 속의 인간, 즉 우리의 감정과 행위의 추상적인 상상 속의 방관자는 가끔 현실의 방관자의 출현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그 의무를 상기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기억제란 학습과목을 가장 완전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방관자, 즉 우리가 최소의 동감과 관용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 공정한 방관자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284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고독의 어둠 속에서 탄식하지 말고, 당신의 친한 친구들의 관대한 동감에 맞추어 당신의 슬픔을 조정하지 말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세상과 사회의 일광(日光) 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는 낯선 사람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적들과 사귀는 것조차 회피하지 말고,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의 재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적게 받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지를 느끼도록 하고, 당신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악의(惡意)에 굴욕감을 안겨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기뻐하라.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 324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은 단지 그 대상이 위대한 것인지 아닌지에 있어 차이가 날 뿐이다. 구두쇠는 반 푼의 동전을 획득하기 위해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이 한 왕국을 정복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맹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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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로스와 키네아스
    from Value Investing 2013-07-16 13:40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 이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