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만에 서재를 업데이트 한다.
그닥 바쁜 것도 아니었으나, 이런 저런 개인적인 사정들도 있었고 게으른 성품도 한 몫하여 이리 되었다. 그 사이에 서재는 2.0 시대를 개막하고, 여러가지 변화도 있었는데 오래전 글이 첫머리에 뜨는 나의 서재가 마음속엔 좀 짐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워낙에 긴 세월동안 가물에 콩나듯 글을 올렸던 서재이니 만큼 고즈넉한 맛도 있고, 부담도 없이, 얽매임 없이,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마이 페이스를 즐기련다.
서재는 뜸했어도 책읽는 속도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서, 리뷰도 짤막한 단평도 없이 넘어가 버린 책들이 제법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소급하여 언급할 만한 부지런함도 없으니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신간들에 대해서만 짧게 주절거려 볼까 한다.
워낙에 미스터리 장르 편식독자인 편이지만, 올해는 두 권이나 세 권당 비미스터리 도서들을 읽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여름은 역시 미스터리의 계절이고 특히나 올 여름엔 엄청나게도 화제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적어도 7,8월은 '폐관수련'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추리소설들만 읽고 있다. 그래봤자 한달에 7-8권 정도 읽는 속도니, 사들이는 책들은 속절없이 쌓여갈 뿐이다.

작년 여름엔 <그로테스크>와 <아임 소리 마마>를 읽었었다. (작년에 읽었던 최고의 소설이 <그로테스크>였다. 미스터리 장르라고 규정짓기엔 좀 애매하지만)
그리고 올 여름엔 이 두권과 함께 미루어 두었던 <부드러운 볼>까지 연달아 세 편의 기리노 나츠오를 읽었으니, 2년 연속 참 다크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기리노 나츠오의 소설을 연달아 읽는 것은 사실 좀 힘겹다. 아무래도 <다크>는 좀 미루었다 봐야 할것 같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들 중에 가장 유니크하고 빼어난 작가라고 생각한다. '꿈이나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픽션에서까지 그런 걸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일갈하는 작가의 말이 그의 작품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시리즈 최신작.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잔혹한 엽기 연쇄 살인사건과 이를 추적하는 변신한 미타라이 기요시.(데뷔작인 점성술 살인사건과는 영 딴판이다) 괴기스럽고 음습하며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일련의 사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만으로도 읽어 볼 만한 작품. 중심이 되는 연쇄 살인보다 소설속 등장인물의 수기에서 묘사하는 모세의 '출애굽'신화와 야훼에 대한 색다른 시각이 내겐 더 흥미로웠다.

미야베 미유키의 장기는 <이유>나 <모방범>에서 익히 보여주었던 여러개의 시점이 큰 줄기의 사건과 그 관련자들을 쫓아가며 묘사하는 서술 방식이다. <나는 지갑이다>는 그러한 그의 스타일을 작가 시절 초기의 의욕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와 함께 드러내고 있다. 향 후 발표되는 대표작들의 모습이 많이 녹아 있기도 한 의미있는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기나긴 살인>이라는 원제를 버리고 채택한 제목과 생뚱맞은 표지그림. 소설의 주제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표지와 제목만 봐서는 마치 풍자 코미디 소설 같지 않은가.

미스터리 작가들을 가지고 연상 놀이를 한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답변은 '페이지 터너'이다. 책을 읽고 나면 다소 허무해지기도 하고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의 소설은 언제나 '순식간에' 읽힌다. <붉은 손가락> 역시 초스피드로 읽어 버렸는데, 책장을 붙들고 있는 동안은 완벽하게 나를 매혹시키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비슷한 소재를 놓고 <용의자 X의 헌신>이 '천재편'이라면 <붉은 손가락>은 '평범한 인물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읽어낸 속도에 비할 순 없겠지만 작가도 이 소설을 '순식간에' 쓰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독자를 정신없이 책에 붙들어 맬수 있었던 것은 짜증나서 쥐어 박고 싶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결국 어떻게 응징 받고 참회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몹시 편애하는 작가인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 외전격인 작품.
교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이자 교고쿠도 시리즈의 첫 편인 <우부메의 여름>이 끊임없는 장광설과 몹시 음울하고도 기괴한 분위기, 호러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나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들과 비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리즈 3작인 <광골의 꿈>에서 부터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하더니, 등장인물중 최강의 코믹 캐릭터인 에노키즈를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에선 극강의 개그 소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비로소 왜 교고쿠 나츠히코를 라이트 노벨의 시조라고 일컫는 지 이해가 되었다. 그를 포우에 비견했던 나의 '단견'은 취소다. -_-;;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에 대한 나의 애정이 식은건 전혀 아니지만. (그의 개그 코드는 나의 적성에 아주 잘 맞는다)

현재 읽는 중.
결말을 보지 않아 섣불리 예단 할 순 없지만, 요코미조 세이시가 왜 '레전드'인지 충분히 깨닫게 해준다. 탄탄한 줄거리와 독특한 배경과 소재. 그의 작품들은 현대물에선 보기 힘든 고전의 힘과 향취를 느끼게 하는 품격이 있다. 역시 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팬이다.
줄기차게 일본 미스터리들만 읽고 있는 셈인데, 사이 사이에 읽은 묵혀두었던 책들이 몇편 있었다. 그 중에선 <끗발>이라는 끔찍한 제목과 함께 내용에 전혀 동떨어진 엉뚱한 선전 문구로 장식된 딕 프랜시스의 작품(원제 : long shot)이 역시 보증수표인 작가의 명성을 확인해주었다. 그의 작품군중에서 전체적으론 범작에 속한다 하겠지만 말이다. <그레이브 디거>까지는 열심히 일본 미스터리들을 읽을 예정이고, 그 이후엔 다시 영미권 미스터리에 집중할 것 같다. 8월 중순엔 반가운 랜달 개릿의 다아시 경 시리즈도 완결편이 출간된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