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것은 역시 당대의 작품은 당대에 보는 것이다.
그 시절 관객이나 독자의 입맛과 눈높이에 맞는 작품이 그 시절에 나왔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떡하나? 차선책으로 연대순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 있겠다. 물론 쉽지도 않고, 그럴 필요성까지 있나 하는 질문을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분명 '사전 지식' 혹은 '선행 커리큘럼'은 어느정도 존재한다. 특히 장르영화나 장르소설처럼 특화된 분야에선 더더욱 그렇다.

<언터처블>을 먼저 보고 <전함 포템킨>을 나중에 본다면, <십각관의 살인>을 먼저 읽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나중에 읽는다면, 감독이나 작가가 의도했던 고전에 대한 오마주와 그로 인한 재미를 온전히 느낄수 없는것이 당연하다.

다행히 나는 어릴적 셜록 홈즈로 미스터리 독자로서의 첫발을 떼었고, 애거서 크리스티, 앨러리 퀸, 딕슨 카 등의 순서를 차례로 밟아 나간 운 좋은 독자이다.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나의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관심은 온전히 '고전'에만 편중되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읽고 싶어도 읽을 만한 '고전 미스터리'는 많지 않았다. 뒤늦게 나마 동서미스터리 북스가 재발간되면서 고수들의 리뷰나 입소문으로만 들었던 고전들을 속속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절 내겐 '고전'의 빛이 어느정도 퇴색해가고 있었다. 초보 독자 시절에 읽었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나 <그리스 관의 비밀>등의 충격과 흥분이 강렬했던 반면, 동서의 재출간 시절에 읽었던 <세개의 관>이나 <꼬리 아홉 고양이>는 본격 미스터리 소설의 걸작들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작품만큼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소설들을 읽었던 시기가 정반대였다면 이들 작품들에 대한 나의 선호도나 만족도도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문신 살인사건>과 <옥문도>등 1940년대에 발표된 일본의 본격 미스터리 대표작들 역시 국내에 소개된 시기가 좀 많이 늦었다. 적어도 내게는 초보 독자 시절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순진한 독자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며 탄식하였다.

최근 미스터리, 스릴러 등 장르소설들이 예전과 비교하면 '물밀듯이'라 표현할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본 미스터리와 유명작가들은 이제 고정팬을 확보한 출판계의 일정한 흐름이 되었고 영미의 현대 작품들도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이런 출판 러시 속에 상대적으로 아직까지 국내에 출판되지 않고 있는 '고전'들은 점점 출판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설혹 어렵게 전설의 명작들이 출판된다고 해도 과연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책의 흥행여부는 상당부분 출판사의 마케팅과 홍보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출판여부 자체는 역시 시장에서의 흥행성이 판단 근거가 되지 않겠는가.

현대물의 범람 속에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나 니키 에츠코, 코넬 울리치 등 고전 위주의 출판을 꾸준히 해주고 있는 출판사도 있지만, 현란한 현대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들과 시장에서 힘겨운 승부를 하고 있는것 같다. (그나마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는 손자 '김전일'의 덕을 좀 보고 있다지만) 국내 장르소설의 열성 독자들은 출판사의 수지 타산까지 걱정해 주는 갸륵한 마음을 갖고 있다. 잘 팔려야 또 다른 작품들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딕슨 카의 <유다의 창>이나 울리치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갖고있다> 등 고전 미스터리 거장들의 대표작만이라도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더이상 순진한 독자가 아닌 내게 충격과 흥분을 줄 순 없을지라도, 그 시절 이 작품들이 차지했던 의미와 긴긴 세월 출판을 기다려 왔던 독자로서의 반가움을 되새김질하기엔 충분하지 않겠는가.

때론 고전만이 갖고 있는 향기가 그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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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유다의 창과 밤은... 은 영 안나오려나 봅니다 ㅜ.ㅜ

oldhand 2006-09-1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미스터리 팬들중에 독지가가 나서지 않는 이상..

상복의랑데뷰 2006-09-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터리 시장이 커지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마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는 커져도 일본 쪽만 줄창 소개될 것 같아 아쉽습니다. 결국은 로또당첨인가요 ㅠㅠ

oldhand 2006-09-1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도 최근 작가들 위주로만 시장이 커질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나마 시장이 커지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지도..
 

액션 영화, 전쟁 영화 등의 장르에 국한하고 미스터리 소설이나 스릴러, 서스펜스 소설에 국한해서 이야기 해 보자면 '고전'이라 칭할 만한 시대의 작품과 현대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속도감' 아닐까?

현대물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멸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영화들도 지루하기 짝이 없게 보일 수도 있다. 4~50년대 최고의 대중영화로 인기를 끌던 존 웨인이 등장하는 서부 영화들은 도데체 총싸움은 언제 할건지, 서설이 길기도 하다. '하이눈'의 게리 쿠퍼도, '셰인'의 알란 라드도 총을 들고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스파게티 웨스턴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보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등장부터 멋진 권총 솜씨를 뽐낸다. <석양의 무법자>는 첫 장면 부터 흥미진진하다.

가장 극적으로 내게 '현대'와 '고전'의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영화는 <코만도>였다. 중학생 시절, 바글거리는 극장에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아서 보았던 영화지만 보면서 자리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미처 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의 극장들은 개봉관이라 할지라도 고정 좌석제가 아니었다.) <코만도>의 액션이 시작하는 시점은 영화가 시작한지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그 액션은 끊기지 않았다. 1년 정도 앞선 시기에 개봉했던 <터미네이터>와 비교해 보아도 큰 차이가 난다. 작품성이나 스토리의 밀도감은 별 볼일 없는 영화였지만, 당대 액션 영화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숨쉴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목표의식이 영화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무조건 현대의 영화에 비해 재미없고 지루한 것만은 아니다. 고전은 고전 나름대로의 흥취와 멋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콰이강의 다리>, <벤허> 같은 영화는 <터미네이터>시리즈나 <인디애너 존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들이 주는 재미와는 또 다른 재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스피드와 스펙터클에 젖어있는 관람객이 고전 영화들 속에서 찾는 재미는 무엇일까.

소설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이런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갈수록 잔혹해지고 치밀해지고 복잡해지고 현란해지는 현대물에 비하면, 도일이나 크리스티, 퀸의 세계는 한가롭고 따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탐정도 순진하고, 범인도 순진하며, 당시의 독자들도 순진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걸작 <나일강의 죽음>같은 경우는 450여 페이지짜리 소설에서 첫번째 살인이 발생하는 시점은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이다. 참을성 없는 독자라면, 책을 덮어도 열번은 덮을 수 있는 분량이 본론에 앞서 펼쳐진다. 반 다인의 소설은 어떤가. 그 끝없이 펼쳐지는 파일로 번스의 잡설과 무수한 각주들을 참아 넘겨야 사건의 진상과 결말을 맛볼 수 있다.

그 뿐인가. 그 당시에는 센셰이션을 불러 일으킬 만큼 놀라운 트릭들도 현대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울게 없다. 온갖 기상천외한 범행 트릭과 갖가지 서술 트릭이 난무하는 일본의 신본격소설이나 다중반전이 밥 먹듯 일어나는 미국의 최신 스릴러 소설을 섭렵한 독자가 과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나 <Y의 비극>을 읽으면서 놀랄 수 있을까.

'고전'을 접하는 독자들은 뭔가 좀더 다른 '시각'과 '시선'이 필요한 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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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1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변한 시대를 감안하고 그 시대를 생각하며 읽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이드 2006-09-1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올드핸드님 글이다~
요즘 독자.인 저는 최근 뤼팽.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홈즈나 애드거 알랜 포우.는 왠지 컴플리트홈즈.정도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고, ( 가지고 있고;; 그러나 안 읽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재미있게 읽지만 찾아 읽지는 않고, 다행히(?) 현대스릴러물에 중독.된 것은 (혹은 그 잔인성과 엽기성과 과장등의 독자를 자극하기 위한 그 모든 장치들에 염증을 살짝 느끼고 있는 : 가장 최근에 읽은 추리소설 -> 눈은 진실을 본다) 아닌가봐요. 근래, 추리소설 추천해달라고 하는 비독자( 평소에 안 읽는) 가 몇명 주위에 있었는데요, 난감.하더군요. 뭘...뭘 추천하지? 그렇다고 거기다대고, 어떤 종류? 고전, 하드보일드, 일본사회파, 본격파, 호러, 법의학, 경찰/경감, 단편, 특이한 탐정, 홈즈앤왓슨물, 코지, 역사, 등등등 뭐? 라고 물을 수도 없고 말이죠. -_-;; (그나마 동생은 '반전 있는 추리소설, 일본 추리소설' 추천해달라고 해서 몇가지 주억거려주었지만서도) 난 추리소설은 아니 책.은 다 좋고, 그 중에서도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추리소설이 좋아요.

paviana 2006-09-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oldhand님
전 끝없이 펼쳐지는 파일로 번스의 잡설과 무수한 각주들이 좋아요. 느무 구닥다리인가 봐요.ㅎㅎ

oldhand 2006-09-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 그렇게 읽어야 더 참맛을 느낄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 너그러운게 아니니..
하이드님 :: 눈은 진실을 본다.. 전형적인 현대 스릴러였지요. 모든 주인공들이 다 미남, 미녀들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비미스터리 독자가 추리소설을 추천해 준다고 하면 아무래도 저는 고전쪽을 먼저 소개하게 되더군요. 제가 읽어온 순서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뤼팽 시리즈는 재미있나요? 저도 이번 여름에 뤼팽을 6권 정도 구입했는데, 언제 읽게 될진 모르겠습니다.

oldhand 2006-09-1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댓글 다는 사이에 파비아나님이.. ^^
서재 마실 다니면서 무수히 뵌 분이라서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자니 참 쑥스럽기도 합니다. ^^ 이렇게 먼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전 파일로 번스의 잡설은 물론이고 교고쿠도의 그 끊임없는 장광설마저도 좋아한답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9-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터미네이터나 인디아나 존스도 고전이 되어버렸죠;;;

파란여우 2006-09-1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oldhand님(파비님 따라 흉내 내기)ㅋ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콰이강의 다리>, <벤허>,<터미네이터>시리즈나
<인디애너 존스>, <반지의 제왕>, <나일강의 죽음> 다 좋아합니다.
특히, <셰인>의 달밤에 악당들을 무찌르러 강 건너 산 넘어 달려가는 배경,
캬아, 잊혀지지 않아요. 마지막 장면의 메아리 셰인~~~~은 어떻고요
뒷 배경이 세트간판이라 시시껄렁하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주인공이 잘생기고 정의롭고, 마지막엔 비장하게 떠나가는. 네 명작입니다.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 하면서 동네방네 사건은 다 알아채는 미스 머플
이 할머니도 중학교때 참 총애했었는데. 지금쯤은 돌아가셨겠죠?^^

oldhand 2006-09-14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 님 :: 내가 요새 영화를 거의 안보니, 생각나는게 그 정도야.. 크크.
파란여우 님 :: 그 시절 흑백 영화는 어찌 보면 지루한데, 또 어찌 보면 감칠맛 나게 재밌고 그래요. 그러니까 파란여우 님은 잘생기고 정의로우면서 비장한 남자 주인공을 흠모하셨던 거군요. 하하. 중학생 시절 미스 마플을 총애하셨다면 동서미스터리 문고로 보셨겠네요?

paviana 2006-09-1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페이퍼도 잘 안 쓰는 불량서재인이라서, 예의라도 발라야 되겠기에, 내공있으신 분의 서재에 처음 댓글달때는 항상 인사를 드리지요.ㅎㅎ
<계속>이니까 다음 편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oldhand 2006-09-1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이라고 말씀하시니 민망합니다. 알라딘의 수많은 고수님들 앞에서.. ^^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분위기도 다를것 같아서 뒷 이야기를 끊었는데.. 언제 뒷 이야기를 쓰게 될진 게으른 저로서는 장담하기가 주저스럽습니다.. 저도 불량서재인이잖아요. ㅎㅎ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읽던 책들은 주로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구미의 소설들이었다. 집에 있던 청소년용으로 출판된 세계 문학 전집이 탐독의 대상이었다. 2단 세로 쓰기에 한자까지 섞여 있는 책이었지만 청소년용 답게 삽화도 있고, 초장편 소설들도 한권 분량으로 축약한 다이제스트본이었다. 가끔 완역 단행본으로 사서 읽은 책들도 있지만, 나의 고전에 대한 얄팍한 교양은 대부분 이 다이제스트 문고에 한정되어 있다. 대학생이 되면 더 이상 고전은 가까이 하지 않는게 그 시절의 알량한 독서 풍토였으니.

고전으로 추앙받는 명작들도 결국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통속 대중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남녀간의 사랑이다.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사랑'일까. 그 시절 읽었던 두 권의 소설은 몇 년간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잡담을 할때마다 내가 끄집어 내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폭풍의 언덕>과 <두 도시 이야기>가 바로 그 소설이다.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고, 폭력적이고, 완고한 시각을 갖는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80년대'에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던 애송이의 머릿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학교는 여자 교사 한 명 없는 그야말로 숫컷들의 복마전이었다.) 마초이즘은 남성 교사들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유유하게 전수된다. 한참 혈기왕성한 남자아이들을 오십명이 넘게 방 한칸에 가두어 두었으니, 그 안에서 거론되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들의 내용이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자연스레 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남성 우월적 시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비교,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시각등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나는 <폭풍의 언덕>과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작가의 성별을 놓고 열변을 토하곤 했었다.

"여성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요소를 '질투'와 '복수'로 묘사하지.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남성 작가, 찰스 디킨즈를 보아라. 그의 사랑이야기는 목숨을 바치는 '희생'과 '헌신'이 아닌가.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시드니 카아턴의 사랑중에 무엇이 숭고한가? 여성 작가는 대승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남성 작가들을 문학적 성취도와 완성도에서 따라 올수 없는것 같다"

얼토당토 않는 편파적인 주장이었지만, 성장기의 소년에게 저 두 편의 소설이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나 보다.

별 쓸데 없는 이야기를 길게 남긴 이유는 바로 <용의자 X의 헌신>을 읽는 동안 내내 <두 도시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단히 '남성적'인 작가이다. 소설가 본인도 '여성 등장인물에 대한 섬세한 심리 묘사'가 가장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듯이 그는 대단히 담백한 남성적 시각을 가졌다. 결코 에둘러 가지 않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의 이런 성향과 자연스럽게 어우러 진다. 오직 하나의 줄기에 집중하여 간결하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은 게이고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본격 추리 소설에 임할 때도 그의 이런 자세는 변함이 없다. 은근 슬쩍 감추거나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단서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서는 너무 친절한 것이 아닌지. 그의 이런 우직한 남성적 사고방식이 '사랑 = 헌신'이라는 다소 순진하고 고색창연한 등식을 들고 나오게 된 배경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남성적 작가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다. (비슷한 등식이 같은 작가의 작품인 <백야행>에서도 이미 등장한 바 있다.)

미스터리의 구조적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핵심적인 구도는 역시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이다.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나누는 선문답은 이 소설의 백미였다. 게이고의 소설 답게 책장은 정신 없이 넘어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속도감은 롤러 코스터가 아니라 초고속 열차에 비견할 수 있다. 급박한 반전과 서스펜스에 정신없이 휘둘리기 보다는 그저 작가의 이야기에 편안히 실려 간다는(그렇지만 엄청난 속도로) 느낌을 준다.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 두 천재의 팽팽한 머리싸움과 트릭을 먼저 염두에 두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고자 트릭과 구성을 끌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트릭이나 탐정과 범죄자의 대결 구도 보다는 이시가미의 사랑과 헌신 쪽이 더 머리속에 남아 있다. 아쉽게도 소설의 중반부가 채 못되어 이시가미가 꾸민 트릭을 거의 완전하게 간파해 버렸다는 것과 어린 시절 읽었던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오랜 기억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 남자의 조건없는 사랑과 헌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넙죽 받아들이는 여자 주인공은 얄밉고 짜증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바뀐게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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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9-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적 작가인 남자가 그린 여자 주인공이잖아요. 흥.

하이드 2006-09-1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 복수, 희생, 헌신, 에밀리 브론테.가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생'과 '헌신'은 여자주인공들에게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구요. 이 책은, 워낙에 오탈자로 말이 많아 '두고보자' 하고 읽었던 책이에요. 그런거 다 까먹고 재미있게 읽었지요. 군대에 보내줬더니, 동생이 재밌다고 해서, 집에 안 읽고 쌓아둔 히가시노 게이고.를 조만간 클리어하지 싶습니다. 아마, 저는 한번 싫어하기로 맘 먹으면, 계속 싫은가봐요.반대로 좋아하기로 맘 먹으면 계속 좋아하지만서도.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도, 트릭도 너무 짧단 느낌. 이 작품에서 가장 미스테리한건 '여자' 이던가요? 오랜만에 고전.이 읽고 싶어지네요. 폭풍의 언덕. 혹은 두도시 이야기. 그래봤자 오늘 들고나온 책은 '피터드러커 자서전' 이지만;;

oldhand 2006-09-1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남성 작가가 그린 여주인공이라서 그런 모습이겠지요. 근데 또 그걸 보고 짜증난다고 하고 있으니 20년전 '숫컷'시절과 바뀐게 없다는 자조에요. 흐흐.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을것 같다..라는 생각도 좀 듭니다. 아, 암튼 성별의 차이가 주는 간극은 만만치 않아요. 극복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탈자는 거짓말 안 보태고 300군데는 되지 않을까 추정해 봅니다.
 
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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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이 책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이렇다.

"정말 재밌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는 나는 가급적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고 리뷰를 쓰려고 노력한다. '반전이 있다', '결말부분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정도의 언급만으로도 독자로서는 상당히 김이 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잡설을 구구절절 늘어놓게 되는데, 내용을 제외하고 책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을 말이 그리 많을 리가 없다. 그래서 결국 책을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작품 외에 내가 딱히 알고 있는 정보나 이야깃 거리도 없으니 더더욱 리뷰를 쓸만한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소설에 대한 문학적인 평가나 서술 구조, 내러티브에 대한 심도깊은 감상을 읊을만한 교양이 내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쭙잖은 리뷰를 쓴다. 순전히 이 소설의 '재미'때문이다.

주제 의식이나 소재로만 보았을 때 이 소설은 일종의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담 문학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한국 문학은 '빈곤 리얼리즘'에 빠져있다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단순히 웃어 넘길만큼 엉뚱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각하면 심각하고 무거우면 무겁다고도 할 수 있는 비슷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그려내는 상상력과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작가의 낙관적인 자세가 돋보인다.

일본의 소설들이 최근 국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담없음'과 '가벼움', 그리고 그 속에서도 무뎌지지 않는 작품의 주제의식 때문이 아닐런지.

폭염이 전국을 뒤덮었던 지난 8월 초 여름 휴가기간에 읽었던 이 소설은 열대야에 지친 내게 웃음과 눈물, 단비같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해 주었다. 올 여름 내가 읽은 최고의 소설이라고 주저없이 이야기 하련다.

정말 재밌다. 그리고 감동과 웃음은 특별 부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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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말씀 공감 백배요^^

oldhand 2006-08-2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구동성으로 재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니, 제 리뷰는 중언부언일 뿐입니다. ^^

로드무비 2006-08-3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을 준다는 제안에 혹해 결국 주문했는데.
올드핸드님의 리뷰를 보니 흐뭇하옵니다.^^

2006-08-30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oldhand 2006-08-30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1+1의 위력이 대단하군요. ^^ 저도 사실 그거땜에 주문한거 였어요. ^^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랄께요.

oldhand 2006-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아니, 대체 그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이 주위에 계시다니요. 2대는 덕을 쌓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예전 학교앞 만화방에서 봤었는데, 언제 가서 한 번 훔쳐올까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
 

아직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참으로 뜻하지 않은 일에 부딫히는 경우가 있다.

지난 8월 15일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지난 주 금요일까지 하루 하루 조금씩 통증이 심해지더라. 설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소화가 안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금요일에 늦은 퇴근을 하고 콩주를 보러 수지 부모님댁에 내려간게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그날 밤, 계속 아파오는 배에 잠을 설치면서 나에게는 흔치 않은 "내일 날이 밝으면 병원부터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평소 병원을 멀리 하는 나는 병원에 외래로 진료를 받기 위해 간 것이 15년도 더 된 일인것 같다.

부모님 댁 근처의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내과 진료를 받았다.

의사가 누워있는 내 배 여기 저기를 눌러보면서 계속 하는 말.

"배에 힘 좀 빼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내 배가 풍만함에 비해 원래 좀 땅땅하다. -_-;;; 더 이상 뺄 힘이 없었다. 정말. 뻥 안까고.

정체불명의 통증인데 뭐 눌러보고 다 진단할 수 있겠는가. 초음파 검사를 받고 오랜다. 초음파 검사비 6만원이나 한다. 크아악.

초음파 실에 있는 진단의학과 의사 아저씨 한참 여기 저기 밀어보더니, 충격적인 한마디.

"맹장이네요. 수술해야겠네요."

그러면서 친절하게 부연설명.

"요게 창자고요. 곱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르니까 납작해지죠?"

"요게 맹장입니다. 끝이 막혀있죠? 그래서 맹장이라고 부릅니다. 얘는 눌러도 안 납작하고 그대로지요?"

"많이 부었네. 크기가 1cm 정도 됩니다. 지금. 보통 맹장염 환자들이 4~5mm 정도 크기일 때 병원에 오는데."

충격을 수습하고 다시 일반외과로 갔다. 수술을 위해.

일반외과 의사 아저씨도 웃겼다. 표정하나 안 변한채.

"통증 관리 주사에 들어가는 이 약은 #%@*&라고 하는데, 모르핀보다 20배 강한 성분입니다. 되게 비싸기도 하고. 나도 한번 시험삼아 주사 맞아 봤는데, 기분 진짜 좋습니다. 여자들이 다 옷을 벗고 다니더라고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바로 그날(토요일 오후 1시 10분)에 충수 제거 수술을 받았다.

전신 마취와 마취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은 참 괴로운 일이다. 물론 배에 구멍을 낸 채로 후줄근한 4인용 병실에 누워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배가 아파서 한 번 굶어야 겠다고 밥을 거른 금요일 저녁부터 처음으로 미음을 먹은 월요일 아침까지의 기나긴 금식도 말이다. 미음이나 죽 말고 밥을 처음 먹은건 무려 오늘 점심때였다. (살이 좀 빠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항생제와 혈관주사 땜에 더 부은것 같다. -_-;)

그러나, 내가 누군가. 수술 다음날 아침 바로 방귀뀌어주고, 이틀반 동안의 금식 이후 미음 먹자마자 응가 해주고. 부득부득 우겨서 오늘(화요일 오후 6시) 조금 이른 퇴원을 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놀아도 집에서 놀고, 아파도 집에서 아픈게 낫지 않겠나.

이래저래 사람은 아프지 말아야 한다. 더더군다나 "맹장염"처럼 촌스럽고 없어 보이는 병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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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8-2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맹장 탈나면 굉장히 아프다던데. 몸조리 잘 하세요. ^^

하루(春) 2006-08-2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좀 아프지 않으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재미있게 지내시면 더할나위 없는 휴가가 되겠군요.

oldhand 2006-08-23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야심한 시간에도 잠들 안 주무시나요? ^^ 저야 내일 놀지만.. ㅎㅎ
야클 님 / 지금은 그냥 좀 땡기는 정도입니다. 힘만 안주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아프지는 않아요. ^^
하루 님 / 금요일 쯤 출근할 생각이니 남은 이틀 간 몸조리 하면서 보람차게 잘 보내야지요. 하필 토요일날 수술을 한것이 쪼금 안타까울 뿐입니다. 참았다가 월요일날 할 걸 그랬나봐요. 하하.

한솔로 2006-08-23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의 느낌은 어떠셨는지...라고 물어보는 건 경우 없는 짓이겠지요? 예, 묻고 말았습니다-_-

물만두 2006-08-2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달 무리하지 말고 몸 조리 잘하세요. 수술하셨으니까요~

상복의랑데뷰 2006-08-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릉 쾌차하시길~^^

oldhand 2006-08-2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 님 / 그 의사 선생은 아마도 한방에 주사로 맞았을거구요.. 저는 이틀에 걸쳐서 피래미 눈꼽 만큼씩 들어갔기 때문에.. 아쉽게도 좋은 감상은 없습니다. 흐흐.
물만두 님 / 몇 달 갈정도로 큰 수술은 아니지요 뭐. 한 달만 지나도 뛰어다니기엔 지장없을것 같아요..
상복의 랑데뷰 님 / 몸 보신 한 번 해야 쓰까? ^^

파란여우 2006-08-2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시고 싶은 거 더 많죠? 후후(위론지, 약 올리는 건지..)
날 더운데 요양하신다 여기시고 상처 덧 나지 않게 유의하세요!

아영엄마 2006-08-2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감하신 덕분에 조기 발견 하신건가요? 수술 잘 끝나고 경과도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쾌유하시길 빌어요~~

oldhand 2006-08-24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 님 / 지금은 먹고 싶은거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문제일 뿐이죠. 헤헤. 누워서 책이나 읽고 있으려니, 맹장염도 걸릴만 한걸요? ^^
아영엄마 님 / 둔해서 좀 늦은것 같아요. 염증이 좀 많이 퍼졌다고 하더라구요. 뭐 그래도 젊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8-24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대방동 싸릿집으로 모시겠습니다. ㅎㅎ

로드무비 2006-08-3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이제야 봤네요, 이 페이퍼.
충수 떼내고 나면 1킬로그램쯤 줄어드나요?=3=3=3
맛나고 영양가 있는 것 많이 드세요.^^

oldhand 2006-08-3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 지나간 페이퍼까지 읽으시는 수고를.. ^^
떼낸거 제 옆지기한테만 보여줬다고 하더군요. 쪼매난 거라 뭐 근수는 많이 안 나갈거 같구요. 금식 하느라 이래저래 얼굴이 좀 헬쓱해 보여서 무척 보람있어 하는 중입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