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도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올리는 2010년 4/4분기 단평. 아, 이제서야 숙제를 마치는 기분. 새해에는 이런 부담스러운 숙제를 스스로에게 지우지 않으리.
<방화벽>
2006년 <하얀 암사자>부터 시작하여 매년 한 편씩 읽어온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5년만에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번역된 시리즈를 모두 읽은 셈이다. 이쯤되니 발란더가 사는 도시 말뫼도 제법 친근하게 느껴진다.
만켈의 발란더 시리즈는 미스터리 소설의 출판이 가물에 콩나듯 하던 시절에 이례적으로 총 5편이 우리 글로 번역되었다. 마지막 번역작인 <방화벽>이 2004년에 출판되었으니 더이상 추가로 소개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방화벽>에서 발란더의 딸인 린다는 경찰이 되려고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만켈은 2004년 린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경찰의 꿈을 이룬 린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어쨌든 발란더가의 경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방화벽>은 인터넷과 해킹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관련 전공자인 내게는 확실히 이런 소재가 오히려 리얼리티를 좀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해커들이나 프로그램 전문가들이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언제나 불만이다. (내가 전지전능한 프로그램 개발자가 아니라서 이들을 질투하는 것인지도.)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그냥 먼치킨 캐릭터라고 인정해 버리자. 하하하.
<어둠의 불>
샌섬의 꼽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 제 2 작.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하나인 헨리 8세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가히 역사 미스터리 소설의 교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다. <어둠의 불>의 감동과 재미를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전작인 <수도원의 죽음>을 먼저 읽어야 하는 만만치않은 진입장벽이 있긴 하지만, 두툼한 분량의 소설 두 권을 읽고 나면 만족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긴긴 겨울밤에 기꺼이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때로는 사건의 진행이 너무 느린거 아냐? 수사를 이렇게 더디게 진행해도 되는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디테일은 당대의 생생함을 실감나게 전달해 준다.
전작인 <수도원의 죽음>보다 <어둠의 불>이 훨씬 더 재밌는 이유라면 이 작품에서 등장한 잭 바라크라는 인물의 매력일 것이다. 바라크와 샤들레이크의 변모해 가는 관계만으로도 웬만한 버디물보다 더 재미있다.
'권력은 무상하고, 민중은 영원하다. 그리고 역사는 도도하게 흐른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결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얼굴에 흩날리는 비>
어둠의 여왕 기리노 나쓰오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직 어둠의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소설은 일반적인 하드보일드의 충실한 전형을 따르고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풍부하다. 이후 기리노 나쓰오는 점점 더 미스터리와는 멀어지는 길을 걷게 되는데, 초기에는 그도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가를 꿈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필명을 얻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리라는 생각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현재 본인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현재의 모습을 미리 알아버린 채 과거의 모습을 보는것은 약간 맥빠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최소한 미로 시리즈의 제 1작을 먼저 보기위해 남겨두었던 <다크>를 조만간 읽어야 겠다. 그전에 중간 작품이 먼저 나와준다면 더 좋겠지만. 미로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향 후 그의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 예상되지만 말이다.
<로마 서브 로사4 - 베누스의 주사위>
작가도 글을 써갈때 마다 성장하는지, 시리즈 4권쯤에 이르니 작가의 원숙함이 절정을 이룬다. 묘사의 박진감과 능수능란한 장면 전환 등이 소설의 가독성을 한층 끌어올리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재판과 사건을 배경으로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재구성해내는 작가에게 찬탄의 박수를 보낸다.
로마 서브 로사, 밀레니엄, 샤들레이크 시리즈까지, 2010년은 유달리 빼어난 시리즈 작품들을 만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재밌는데 왜 책이 많이 안 팔리는지. 후속작에 대한 소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아는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붙잡고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후의 작품들도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리라장 사건>
본격 미스터리는 순수하게 본격 미스터리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옆에서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가는데 이렇게 태연한 사람들은 뭐고, 이렇게 태평한 경찰들은 무어란 말인가? 라는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무려 1958년 작품 아닌가.
위에서 열거한 본격 미스터리적인 황당함을 제하고, 52년이라는 시대적인 보정값을 추가해서 읽는다면 후한 점수를 줄 만 하다. 본격 미스터리의 가장 주요한 요소인 메인 트릭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동기나 개연성 등까지 따져본다면 아쉬운 점이 많다. 동시대라도, 본격 미스터리더라도 충분히 더 설득력 있고 리얼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그런 작품들이 바로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는 것이다. 본격미스터리라는 장르는 자칫하면 300페이지짜리 추리 퀴즈로 전락할 수 있다.
* 내가 위의 책들을 읽는 동안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독자이었던 물만두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2004년, 내가 알라딘 서재에 처음 리뷰와 페이퍼들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추리소설 독자라고 반가워 하시며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 주신 이가 물만두님이다. 으레 신간이 나올때 마다 관련 페이퍼에서, 책을 다 읽고나서 뒤져보는 리뷰들에서, 익숙하게 늘 만날 수 있었던 이름을 이제 새로 나온 책들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부재를 가슴아프게 실감한다. 결코 많지 않은 추리소설 독자들은 최고의 동료를 잃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