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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쟁 세트 - 전5권 ㅣ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떠오른 아주 오랜 두 가지 기억이 있다.
그 중 더 오랜 기억 하나는, 유현종의 소설 <임진왜란>이다. 이 책을 읽은게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라서 책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몽사 소년문고라는 전집에 들어 있었던 책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었지만 제법 진지하게 전쟁을 서술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기억은 고등학생 시절의 일로, 현대문학 교과서에 일부가 실려 있었던 김성한의 <바비도>다. 1980년대 그 시절의 교과서 작가 중에 김성한은 비교적 젊은(?) 작가였다. 소설의 내용도 외국을 배경으로 한 종교 재판을 다루고 있어서 참 특이하고 인상 깊었다. 의연하게 삶의 길을 포기하는 바비도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제법 숭고하게 다가왔다. 돌이켜 보면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80년대의 엄혹한 시대상황과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세월은 25년 가까이 흐르고, 상대적이라지만 젊다고 여겨지던 김성한이 고인이 된 연후에야 그의 역사소설 <7년전쟁>을 읽게 되었다. 그제서야 중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에 컬러 삽화와 함께 실렸던 소설 <임진왜란>의 기억이 떠 오른다. 송영방 화백의 그 익숙한 붓터치와 함께.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연재 소설을 읽을 만한 깜냥이 못 되었던 나는 이렇게 나마 뒤늦게 <7년전쟁>을 접하게 되었다.
작가의 약력이 이채롭다. 순수문학을 업으로 하다가 언론계에 투신하여 <사상계>와 <동아일보>에 재직했다. 그리고 정년퇴임으로 보이긴 하지만 80년 신군부의 집권과 언론 통폐합 시절에 맞물려 언론인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 후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써내려 간다.
<7년전쟁>은 이런 작가의 약력에 어울리는 긴장감을 갖고 있다. 신문 기사처럼 간결하고, 감정에 치우친 불필요한 가감이 없다.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과 국제 정세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을 유지한다. 이렇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역사 소설이 우리 문학사에 있었던가? 과문한 탓인지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 소설은 종군 기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르포르타주라 할만큼 생생하다. 엄청난 사료 조사와 입체적인 분석이 돋보인다. 작가의 상상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독자를 선동하고 앞서나가 흥분할 법한 장면에서 조차 담담한 눈으로 사실을 조목조목 묘사한다. 소설 후반부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멸, 이순신의 재신임, 기적과 같은 명량에서의 승리. 소설가라면 욕심을 부릴만한 처절한 소재이고, 극적인 장면이다. 실화가 아니었다면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고 치부할 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냉정을 잃지않은 서술은 오히려 더 생생하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소설은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서둘러 결말에 이른다. 연재 상황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인지 권말에 수록된 작가 노트는 풍성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본작의 후일담이나 에필로그에 해당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을 다 읽은 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중요 부분이라 하겠다.
귀에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온 역사적 사건이지만, 사실 그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도 그 중의 하나다. 1592년에 발발하여 7년 간 전개 되었던 전쟁, 통신사들의 엇갈린 증언, 선조의 야반도주, 이순신의 활약과 거북선,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각각의 단편적인 사실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7년 동안 전쟁이 거시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종료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 내부의 사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으며 오롯이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나라와 위정자들은 온전히 되풀이 되는 역사속에 과거를 답습하고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임진왜란과 6.25는 놀랄만큼 유사한 사건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위정자와 지배층들이 보여주는 부패하고 무능한 행태, 수도를 사수한다고 민중을 속여 놓고 뒤도 안돌아본 채 도망치는 겁쟁이 조정과 정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오판과 잘못된 정책, 외국의 원조 없이는 나라가 결단나고 말 수 밖에 없는 허약한 국방력, 도망칠 때는 언제고 안전한 곳에서 결사 전쟁을 외치는 왕과 대통령, 적군과 원조군 모두에게 학살당하고 약탈 당하는 민중, 그리고 휴전 협상에서 제3자로 소외되는 전쟁 당사국.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통점들은 마치 평행이론을 보는 듯 하다. 1500년 대에 일어난 사건에서 한 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20세기 국가. 참으로 부끄럽고 불쌍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할 것인가.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 작가는 서언에서 준엄하게 일갈한다.
의도적인지 모르겟지만 우리는 그동안 민족사를 다룰 때 '전쟁'이라는 용어를 회피해 왔다.
'임진왜란'이 그렇고, '병자호란'이 그렇다. '6.25 사변'이 그렇고, '몽고의 침략'이 그렇다.
국가간의 전쟁을 단순히 나쁜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리', '변괴', '사달'정도로 치부해 오지 않았나. '7년 전쟁', '조청전쟁', '한국전쟁', '항몽전쟁' 등이 더 적합한 용어가 아닐까?
어설픈 명칭을 부여하여 전쟁의 선량한 피해자인척,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고 외면해오지 않았는가 돌이켜 봐야 한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인데 많은 의병들과 관군들이 일치 단결하고, 이순신 장군이 용감하게 적군을 무찔러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라고 피상적으로 배워 왔다. 하지만 소설에서 보듯 임진왜란은 그렇게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명, 일본, 조선왕조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대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자세한 사정이 비록 우리에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진보적 재야 역사학자인 이이화는 10여년 전 저서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15년 이상 앞서 작가는 <7년전쟁>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제목만으로도 작가의 역사적 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소설은 훌륭하게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탓인지 신문 연재 당시 고수하지 못했던 제목을 제대로 살려 <7년전쟁>으로 새롭게 출간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접하고, 역사에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의 감동과 재미는 물론 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