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L과 PD
1980년 대 우리나라의 진보 운동에는 두 개의 커다란 갈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NL과 PD다.
NL은 민족해방의 약자, PD는 민중민주주의의 약자다. NL은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분단'에 있다고 생각했고, PD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타 다른 국제사회와 동일하게 '계급'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PD야 말로 정통 맑시스트이고, NL은 우파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민족주의란 것이 서구에서는 우파의 전유물이고, 지나친 민족주의의 고양은 파시즘을 유발시킨 전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운동권의 주류는 NL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경험을 겪으며, 미국의 실체를 인지하게 되었고, 결국 분단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대협, 한총련 등은 80년대 반독재 투쟁을 주도했지만, 이후 친북세력으로 매도되었고 민주화가 진행되고 사회가 보다 세련되어지면서, 철지난 구닥다리 수구 진보 취급을 받는다. (나아가서는 극우 매체들이 만들어낸 '종북세력'이라는 레테르까지 추가되었다.) 사회주의 몰락 이래 새롭게 등장하는 진보 청년들은 NL의 주장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NL은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 운동 세력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NL이 운동권의 주류일 때도 PD 입장에서는 NL이 엄청 촌스러웠을 것이다. PD는 NL에 대해 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NL은 PD에 대해 '살롱 진보'라는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현실 정치권 인사들 중 DJ라는 논쟁적인 정치인에 대해서 두 진영은 다소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된다.
6월 항쟁이라는 전국민적 투쟁을 통해 얻어낸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김씨의 분열은 NL과 PD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결국 NL은 '비판적 지지'라는 내용으로 DJ를 지지하게 되고, PD는 YS에게 현실적으로 유리한 '후보 단일화론'을 외치다가 결국 이루어지지 않자 백기완을 앞세운 독자 후보를 내세우게 된다. 그 후로도 PD는 민중의 당, 민중당 등 독자 정당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진영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3당 합당을 통해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은 YS에게 투신하고 만다. 오늘날 한나라당의 중진이 된 김문수, 이재오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반면 NL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DJ와 가까운 인연을 토대로 DJ와 정치적 활동을 같이 하게 된다. 김근태가 그렇고 386 정치인들이 그렇다. (노무현의 직계들은 좀 다른 경우인데, 노무현은 원래 YS를 통해 정계에 입문, 3당 합당 이후 소수 독자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후일 DJ 진영에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후일 NL과 PD가 다시 손잡고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다. 의견 충돌 끝에 PD 계열은 진보신당으로 갈라졌다가 최근 다시 통합진보당으로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
짧게 훑어본 우리나라 양대 진보세력의 약사다.
2. 이념, 주의, 정서
이론적으로는 이제 나도 구닥다리 NL보다는 PD 계열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한것은 아니지만 대학시절 난 NL 이었다. 지금도 NL의 정서가 난 더 익숙하고 친근하다. '김정일 개객끼'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 현실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D의 냉철함보다는 NL의 정서가 내 심정에 맞기 때문일까.
21세기의 새로운 젊은 진보들에게 NL은 구태세력으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보다 문익환 목사를 훨씬 더 존경하는 나는 NL을 구닥다리라고 욕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훨씬 세련되고 논리적인 PD의 변절을 더 많이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유행어를 빌자면 이게 다 김대중 때문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김대중이라는 논쟁적인 정치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진보 세력들도 결국 'DJ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첨예한 문제 때문에 수많은 이합집산을 되풀이 해야 했고, 많은 변절도 결국 그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DJ를 싫어하고 비판했던 많은 진보인사들이 군사독재의 원류정당에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정서는 결국 이념과 사상을 압도한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오던 사람들이 정서에 굴복하는 현장을 무수히 목도하였다. 어언 40대에 접어드니 내가 갖고 있는 이념과 주의가 그렇게 확고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변절내지는 훼절이라고 공격받을 만한 회심을 한 것은 아니고 나이를 먹고 보수화 된것 같지도 않지만, 이념이나 주의의 지속성과 영향력이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한 탓이겠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절대 다수의 대중을 이끌어 내는 힘도 이념이나 주의가 아닌 정서다.
아쉽게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강력한 추동력을 갖고 있는 정서는 '反'이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정서보다 누군가를 열렬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정서가 더 강한 힘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일까.
2012년 대한민국 다수의 정서는 '반MB, 반한나라당'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 우리 사회에 '반호남, 반DJ'정서가 만만치 않다. 적어도 천만표는 요지부동이다. '반MB, 반한나라당'정서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요지부동의 천만표를 내편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천만표보다 많은 수의 아군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3. 한나라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자는 '민주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미세하다. 민주당이 진보세력을 결코 살려주지 않는다. 사표 방지 심리든, 반한나라당 정서든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결국 진보의 싹을 밟는 행위이다.' 라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 비해 민주당에 훨씬 호의적이긴 하다. 민주당은 반독재 민주화 세력의 후예다. 정치적으로 엄혹한 칼바람이 불던 시절에도 변절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다. 오히려 진보를 부르짖다가 한나라당의 품에 안기는 사람들보다는 가치있는 집단이다. 호남 수구 세력이나 정치적 철새들의 둥지로 폄훼하기도 하지만 중심이 그들에게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떠나서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세력들에게 훨씬 우선되어야 할 문제가 민주당을 평가하기가 아니라 한나라당을 평가하는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 국민전선(FN)이라는 극우정당이 있다. 장 마리 르펜이라는 극우 정치인이 오랜세월 이 정당을 이끌고 있다. 르펜은 이슬람, 범죄, 이민자 문제 등에서 강경론을 주도하고 불법 이민자 추방,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등을 주장하는 극우 인종 차별주의자이다. 90년 대에는 15% 내외의 지지율을 얻으며 제 3, 4 정당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이변이 발생한다. 좌파 통합 후보였던 리오넬 조스팽 당시 총리를 물리치고 장 마리 르펜이 2위를 차지한 것이다.(프랑스는 대통령 선거에 결선 투표 제도를 시행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넘지 못하면 1, 2위 후보가 결선 투표를 실시하게 되어 있다.)
장 마리 르펜이 우파 후보인 자크 시라크와 함께 결선 투표에 진출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파부터 극좌파까지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국민 전선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반 르펜' 연대를 결성한다. 극우 파시즘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85%의 국민들이 일치 단결을 한 것이다. 이 연대에 좌우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파 후보인 시라크는 압도적인 지지로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다. 시라크는 중도 우파보다도 더 오른쪽에 치우친 우파 정치인이지만 어떤 진보 세력도 '우파 후보인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다고 소외받는 민중의 삶과 진보 정치에 도움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반민주 세력, 파시즘 세력은 어떤 악惡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치워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되물을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해답에 따라 2012년 진보를 자처하는 유권자의 행동이 갈리게 될 것이다.
(p.s)
정권 교체기 10년 동안 일부 진보 주의자들이 '차라리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이 진보정당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 후 현실을 보면 완전히 틀린 예측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명박 정권 4년 동안 진보 정당은 그 기초부터, 뿌리부터 흔들렸다. 아직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토양이 그만큼 척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이 가장 크게 약진했던 17대 총선은 탄핵 정국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선거보다도 극우세력이 위축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극우 세력의 척결 없이 진보정치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