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김에 연달아 올리는 3/4분기 단평.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켄지&제나로 시리즈 제2편, 4,5편이 먼저 출판되었었기에 마치 스타워즈 에피소드 1~3을 보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박력넘치는 하드보일드물이지만, 때로는 대단히 우울하고, 어두운 면도 많이 있는 시리즈다. 미국의 현대 하드보일드물을 읽다 보면, 세상에 이런 디스토피아가 있을까 싶다. 과연 이 곳이 인간이 사는 곳이고,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국가가 맞는가? 사회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조망하는 것은 썩 즐겁지만은 않지만,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가장 독특하고 나름 인기도 많은 캐릭터인 '부바'의 존재가 나에게는 때로 서걱거린다. 지나친 판타지 캐릭터 같아서이다. 리얼리즘을 앞세운 작품들일지라도 주연에게는 아주 현실감 넘치는 묘사를 하다가 통상 조연으로 나오는 캐릭터들에게 가끔 이런 무리한 과부하가 쏠리는 현상을 본다. 물론 부바의 존재가 소설적 재미와 통쾌함을 독자에게 안겨주지만 내게는 약간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블러드 워크 - 원죄의 심장>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들 중 탑 클래스에 들어갈만큼 재미있었던 소설. 코넬리는 워낙에 기대 수준도 높고, 작품의 평균 수준도 높아서 자칫하면 박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역시 작가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순식간에 빠져 들게 만드는 인상적인 초반 장면과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중반을 지나 현란하지는 않더라도 실망시키는 법 없는 마무리까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대 스릴러 소설이지만, 미스터리적 요소도 풍부하고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점이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것이 코넬리의 강점이다.
순전히 내 맘대로 결정하는 거지만, 제프리 디버와 함께 현존 미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범죄 소설을 쓰는 작가에 임명하는 바이다.


 <콜드 문>
언제나 좀 묵혀 두었다가 읽는 링컨 라임 시리즈. 후속작이 나온 후에나 그 전편을 읽게 되는데, 읽고 나면 아, 다음편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고나 할까. 그만큼 독서의 만족감을 주는 흥행 보증 수표라 할 만하겠다. <브로큰 윈도>가 얼른 읽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조금 묵혀 두었다가 후속작 소식이 들려올 때 쯤 사서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라임 - 색스 콤비 플레이에 이번에는 새로운 고수 '심문의 달인' 캐스린 댄스가 수사에 합세한다. 본작에서 링컨 라임만큼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캐스린 댄스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었으니(모클에서 시리즈 첫 작인 <잠자는 인형>이 출간되었다.) 이 또한 기대해 볼 만한 리스트가 될 것 같다.


 <로마서브로사3 - 카탈리나의 수수께끼>
후속편이 나올 수록 빛이 더욱 배가되는 스티븐 세일러의 로마서브로사 시리즈.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곁가지로 등장했던 전편에 반해, 이번에는 역사적 실화인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을 정면에서 다룬다. 공화정 말기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던 키케로와 대립했던 정적 카틸리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 조명하는데, 고르디아누스의 정치적 고뇌와 키케로와 카틸리나의 생생한 묘사 등이 압권이다.
약간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소설은 읽고 나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 또한 매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인간적으로 성숙해 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도 고르디아누스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 질 수 있는 감동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의 판매가 극히 부진해서, 과연 10권 전 작이 모두 나올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내 주위에라도 일독을 적극 권장해야 겠다.


   <철서의 우리>
무려 4년만에 돌아온 교고쿠도.
물론 그 사이에 외전격인 백기도연대가 두 권 출간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목마름을 해소할 순 없었다. 이렇게라도 그동안의 기다림을 상쇄해 줄 양인지 <모방범>, <암흑관의 살인>에 버금가는 엄청난 분량과 교코구도의 끝없는 강의가 펼쳐진다. 이쯤되면 이미 교고쿠도의 추종자들은 만족스러울 터.
그렇지만 사건 자체의 불가사의함이나 기괴함은 기존의 시리즈에 좀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시리즈 전편에서 활약했던 기바와 광골의 꿈에 새롭게 등장해 대활약을 펼쳤던 낚시터 주인 이사마가 출연하지 않은 점도 조금 아쉽다.


 <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코믹 범죄 소설 도트문더 시리즈의 첫작품.
케이퍼 소설이라 불리우는 장르이다.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 처럼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유쾌하고 가볍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케이퍼 무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거칠고 폭력적인 파커 시리즈와 달리 키득거리면서 술술 읽을 수 있다. 1970년 작품이니 발표된지 무려 40년이 된 소설이지만, 몇 가지 설정만 달리한다면 최근에 씌여진 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세련되고 매끄럽다. 역시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을만한 작가라 아니할 수 없다.
천재적인 절도 전문가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외판원 노릇을 하기도 하는 소시민적인 범죄자 도트문더와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그의 친구 켈프의 대화는 시종일관 배꼽을 잡게 만든다.


 <지옥에서 온 심판자>
워싱턴의 흑인 사립탐정 데릭 스트레인지 시리즈 제2작.
대단히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전작 못지 않게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현실감 넘치면서도 마초적인 하드보일드. 이제 파트 타임 파트너의 신분으로 변신한 테리 퀸과 스트레인지는 각각 다른 사건을 담당하는데, 두 사건 모두 미성년자에 얽힌 사건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빈민가 흑인 사회의 처참함과 살벌한 현실이 가감없이 그려지고, 거침없는 폭력과 욕설 등은 관련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꺼려질 것도 같다.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젊은 혈기로 맞서는 어두운 암흑가의 이야기라면, 스트레인지는 노년의 초입에 있는 나이인만큼 보다 더 주위를 돌아보는 연륜도 있고 그에 반해 세속적이기도 하다. 물론 젊은 혈기를 불태우는 파트너 테리 퀸도 있기에 이들 콤비가 더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하드보일드인 이 시리즈를 더 이상 국내에서는 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여왕벌>
지난 겨울에도 잠깐 등장했지만,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돌아온 긴다이치 코스케.
언제나 그렇듯이 긴다이치 주변의 사건 관계자들은 속속 죽어 나가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사실은 이런 사건이었습니다.' 털어놓는 탐정도 그대로다. 그렇지만, <여왕벌>은 이미 여러 리뷰에도 언급되었듯이 기존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면도 보여준다. 공간의 확장성이라든가, 봉건적 인습에 얽힌 사건이 아니라든가 하는 점들에서.
그렇더라도 여전히 책장은 술술 넘어가서 제법 두툼했던 책이 금방 읽히게 만드는 것은 이 시리즈의 미덕이다.
출판계의 흐름 때문인지, 일관성 있는 표지는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활자의 크기와 자간은 후속편으로 갈 수록 점점 헐렁해 지고 있는 것 같다.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헐렁한 책은 또 별로 안 좋아하는 나는 까탈스러운 독자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이례적일 만큼 올 여름 시장에서 성공한 소설.
우타노 쇼고가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로 국내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이 고정 독자층을 가진 것도 아닌데, 적어도 알라딘에서는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를 만큼 많이 팔린 책이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봤을 정도면 출판사로서는 본전은 뽑고도 남음이 없을 터이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힘인가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블랙펜 클럽 리스트가 모두 잘 팔린것은 절대 아니기에 여러가지 의문은 남는다. 그리고 테마 또한 본격 미스터리의 열렬한 독자들에게나 즐거운 내용 아닌가.
어쨌든 3편의 중편 소설은 각기 인상적이긴 한데, 역시 두 번째 소설인 <생존자, 1명>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 한편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역전의 여름>에 비견할 만한 빼어난 중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편집자 출신 미스터리 작가 미쓰다 신조의 ~처럼 ~한 것 시리즈.
후속편이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독특한 시리즈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에서도 이 시리즈 만큼 독특한 시리즈가 또 있을까 싶다.
과거의 사건을 소상히 기록한 초중반은 살짝 지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잘린 머리라는 소재에 대한 탐닉에 가까운 천착과 잘 짜여진 복선, 현란하기까지 한 마무리는 '본격 미스터리'라는 본분을 아주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화려하고 불가사의한 설정이지만 종반부에서 허탈해지는 소설들 보다는 전개는 조금 느슨하더라도 박력 넘치는 마무리의 소설들이 나는 더 좋다.
독자가 방심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작가의 능수능란함과 치밀함이 돋보이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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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0-10-0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손님 반가워요.ㅎㅎ
추천해 주신 책들은 잘 기억하고 있겠어요.
근데 왠만하시면 이달의 단평정도로 바꿔주세요. 자주 뵙고 싶으니까요.^^

oldhand 2010-10-07 14:01   좋아요 0 | URL
아, 파비님 오랜만이십니다. ^^
분기별 단평도 엄청 밀리는거 보셨으면서.. 이달의 단평이 가능할까요? -_-;

이매지 2010-10-0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이클 코넬리를 제프리 디버와 함께 현존 미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범죄소설을 쓰는 작가로 임명 ㅎㅎ
로마 서브 로사와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

oldhand 2010-10-07 16:05   좋아요 0 | URL
코넬리와 디버가 있어서 햄볶아요. ㅎㅎㅎ.
로마 서브 로사 읽고 재밌으면 홍보좀 많이 해주세요. 좋은 책이 좀 많이 팔려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알바는 아닙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