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날 흔히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는 저 유명한 천재 에드가 앨런 포우의 '발명품'이다. 1841년 포우는 <모르그 가의 살인>이라는 단편을 발표하였다. 이 짤막한 단편 소설에는 추리 소설이 갖고 있어야 할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 후에 나온 추리 소설들은 모두 <모르그 가의 살인>을 변주한 작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견이 없을 수 없는 지나치게 거친 주장이긴 하지만 예전부터 여러번 밝혀왔던 개인적인 견해다. 오거스트 뒤팽이 있었기에 셜록 홈즈와 그 후예들이 있는 것 아니겠나. 포우의 전범典範 없이 코넌 도일이 홈즈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탄생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뒤팽이 탄생하고, 홈즈가 뒤를 이어 추리 소설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1929년, 또 하나의 위대한 발명품이 등장한다. 바로 사무엘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이다. 포우가 없는 도일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해밋 없는 챈들러나 맥도널드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드보일드'라는 도저한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은 미스터리 문학사에 있어서 <모르그 가의 살인>에 필적할 만큼 큰 족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수없이 양산된 느와르 소설, 펄프 픽션들과 바다 건너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해밋의 숨결은 곳곳에 숨어 있다.

 

이제 홈즈나 포와로는 뒤팽보다 더 유명하고, 필립 말로나 해리 보슈를 스페이드나 컨티넨털 옵보다 더 자주 접하게 되었지만 '원류의 정통함'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원류를 탄생시킨 작가들은 그만한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족발집도, 떡볶이 집도 너나 없이 원조를 따지는 세상이 아닌가. 해밋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하드보일드'의 원조다.

 

과작이기도 했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너무도 적어 늘 아쉬웠던 대실 해밋이 퍼블릭 도메인으로 풀리더니 결국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진정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팔 벌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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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2-01-17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드보일드의 원조와 함께 올드핸드님도 짜잔! ㅎㅎ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넣었습니다. :)

재는재로 2012-01-1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타의 매라는 작품은 물만두님의 리뷰에서도 봤는데 해밋작품이었군요

oldhand 2012-01-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 님 :: 뜸하긴 해도 제가 서재마을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 중요하죠. ㅎㅎ
재는재로 님 :: <몰타의 매>와 <붉은 수확>은 몇 차례 국내에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뛰어난 작품들이기도 하구요. <데인가의 저주>는 1950년 대에 출간된 적이 있다는 풍문을 들은적이 있고 나머지 두 작품은 완전히 국내 초역인 셈입니다.

포우와 해밋은 원조이기도 하지만 후대의 빛나는 작품들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수준의 작품을 써냈다는 것도 주목받을 만 합니다. 많은 후배 작가들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장르적 세련도와 완성도가 올라가기 마련인데, 이 두 사람은 거의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덜컥 놀라운 걸작들을 써냈죠. 천재들입니다.
 
할루인 수사의 고백 캐드펠 시리즈 1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0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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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시리즈의 첫 권 성녀의 유골을 처음으로 읽은 것이 시리즈가 국내 완간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쉬엄쉬엄 생각날 때 마다 몇 권씩 사두고 묵혔다 읽고를 반복, 싸목싸목 쌓여 햇수로 5년여가 넘어서 어느덧 15권 <할루인 수사의 고백>에 이르렀다. 완독의 고지가 이제 멀지 않은 셈이다.  

캐드펠 시리즈가 국내에 소개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기에 작가 앨리스 피터스는 비교적 현대 미스터리 작가라고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고故 피터스 여사는 무려 1913년 생으로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는 앨러리 퀸, 딕슨 카 등과 불과 10년 차이도 나지 않는 연배다. 작가 데뷔 연도는 1936년. 

작가 정보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해도 1959년이기에 20년 가까이 활발히 활동하다가 그의 나이 60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여든 살을 넘어서까지 완성시킨 시리즈가 바로 캐드펠 시리즈인 것이다. 작가의 고향인 잉글랜드 시로프셔를 공간적 배경으로, 작품이 씌여질 때로부터 800여년 전인 12세기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열 다섯 권의 캐드펠 시리즈를 읽어온 경험으로 미루어 피터스 여사는 대단히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라고 짐작함에 부족함이 없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젊은이들은 왜 그리 많은지. 내전의 시기에 더해 살인이 난무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천착이다. 크리스티의 소설도 로맨스 소설의 변형이라는 이야기들도 많긴 하지만 로맨스 소설적인 강도로는 캐드펠 시리즈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본 작가의 인상 또한 어찌나 선한 얼굴인가! 사랑과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낙관이 캐드펠 시리즈 곳곳에 흘러 넘친다.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해왔고 어떤 결혼 생활을 해왔기에 6,70 대의 나이에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제인 오스틴을 읽을 시간이면 뒤마를 한번 더 읽겠다. 브론테 자매보다야 당연히 디킨즈지!'라는 마초적 독서관觀을 갖고 있는 나는 이런 로맨스 지상주의가 다소, 어쩌면 많이, 오글거린다. 처지와 상황이 다른 선남 선녀가 첫눈에 반하고,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별다른 갈등 없이 외부적인 고난만을 겪어낸 후 순조롭게 맺어지는 이야기들은 재밌게는 읽힐지라도 가슴에 맺히는 이야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남은 수십년을 과연 처음처럼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굳이 보태게 된다. 

지금까지 봤던 15개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시리즈 11권 <반지의 비밀>인데,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 반해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기다림과 깊은 신의를 주제로 한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할루인 수사의 고백> 역시 꽤나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소설의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 빤히 보이는 설정과 예측되는 결말로 인해 그저 그런 시리즈 소설 중 한 권임이 유력했으나, 무한한 로맨티스트로만 알고있었던 작가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영원성, 영속성이 아닌 사랑의 찰나적 속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예측된 결말에 이르렀지만, 그동안 알아왔던 작가의 다른 면모를 접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거기에 더해 에들레이스 노부인의 그 압도적인 캐릭터는 선악과 호오를 떠나 시리즈 역대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셀린과 헬리센드 두 젊은 연인들의 애타는 간절함과 해피엔딩보다 지난했던 18년 세월을 오롯이 가슴에 담아두고, 기꺼이 기쁘게 돌아서는 할루인 수사의 뒷모습이 더 찬란해 보이는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지금 그 옛날의 첫사랑으로 돌아가라 하더라도 그녀는 등을 돌릴 터였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도 한철인 법이다. 이제 그들의 계절은 봄의 폭풍우와 여름날의 열기를 넘어 초가을날 낙엽 떨어지기 전의 황금빛 평온으로 접어들었다. 

"제 뒤에 남겨진 것들이 모두 잘 있는데요 뭐. 아주 행복하게. 제가 어디에 묶여 있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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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4~5년 일본 미스터리의 붐에 힘입어 미스터리 도서 시장 자체의 파이가 조금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추리 소설, 미스터리 소설은 매니아 장르, 비주류 장르에 지나지 않는다. 애호가들의 입장에선 아직도 미번역된 전설적인 고전이나, 국내에 미처 소개되지 못한 동시대 많은 유수한 작가들의 작품을 리스트로만 접하며 군침을 삼킬수 밖에 없다.

미스터리 장르 애호가들끼리 사적인 만남을 갖다 보면 늘쌍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나중에 로또 맞으면 출판사 하나 차려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들을 출판하는'것이다. 물론 꿈은 꿈일 뿐, 우리에겐 로또를 맞을 일도 없고 그리하여 당연히 출판사를 차릴 일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물론 로또에 당첨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평소 친분을 쌓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국내 최고의 고수이자 애호가인 분께서 출판사를 설립하고 미스터리 소설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1인 출판사 같은 소규모 출판형태가 드물지 않은 시대이고, 미스터리 장르를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나 임프린트도 적지 않지만 이처럼 본격적인 애호가이자 독자이던 분이 직접 해당 장르의 출판을 감행하는 것은 적어도 미스터리 장르에선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출판사의 이름마저도 의미심장한 '피니스 아프리카에'(장미의 이름 중 나오는 장서관의 밀실 이름이다. 아프리카의 끝을 의미).

야심찬 첫 출간작은 현대 영미권 전통 클래식 후더닛 미스터리 작가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루이즈 페니의 기념비적인 데뷔작 <스틸 라이프>이다.

구구절절한 작품 소개와 작가 소개는 서지정보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고, 책 소개에 갈음하여 영미 미스터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인 전영찬 님의 글을 참고로 링크한다.

http://www.howmystery.com/zeroboard/zboard.php?id=c1&page=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959 

 

아울러 미스터리 독자들의 오랜 꿈을 이룬 도서출판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힘찬 출발을 열심히 응원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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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1년도 2월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설은 지나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정리해서 올리는 2010년 결산이다. 물론 미스터리 부분으로 한정한 것이다.

나는 그다지 다독가도, 속독가도 아니다.
연간 읽어내는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 대부분이지만, 그마저도 50여권 수준이고 최근 몇년은 신간에 눈독을 들여 읽지도 않았다. 2010년은 그동안 사놓고 묵혀두었던 책들을 제법 소진했고, 로마서브로사, 밀레니엄, 샤들레이크 시리즈 같은 대단히 뛰어난 시리즈 장편들을 새롭게 만났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작년에는 부문별 후보작까지 꼽아가며 열심히 결산을 했지만, 올해는 간략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세 권의 책이 워낙에 압도적이었으며, 별다른 경합이나 고민없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올해의 베스트 : 존 딕슨 카 <유다의 창>
 

내가 존 딕슨 카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쯤이었으니, 햇수로도 어언 30년 가까이 되었다. <연속 살인 사건>을 계림 출판사에서 나온 아동판으로 읽었었는데 셜록 홈즈를 제외한 다른 작가의 장편 미스터리를 읽은 것이 거의 처음이었을 것이다. 재기발랄한 코믹함과 음산한 배경, 깔끔한 마무리 등 딕슨 카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의 인기가 풍성하고,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유수의 고전 작품들이 번역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30년 전에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딕슨 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유다의 창>이 작품 발표 후 무려 72년만에 국내에 소개 되었고, 초등학생 꼬마는 이제 불혹이 되어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었다.
기대치가 크면 실망의 확률도 높은 법인데 <유다의 창>은 기대를 뛰어넘는 재미와 흥분을 안겨준다. 닳고 닳은 독자이지만, <유다의 창>을 읽으면서 나는 짜릿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기립박수를 보낼만한 작품이다.

 

베스트에 못지 않았던 두 편의 소설.

스티븐 세일러 <로마 서브 로사 3 - 카틸리나의 수수께끼>
 

격동의 공화정 말기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서브로사 시리즈는 각 권 하나하나가 깨알같이 훌륭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중 최고를 꼽자면 시리즈 3편 <카틸리나의 수수께끼>를 꼽는다.
역사적 사건의 장대한 스케일, 사회적 메시지, 실감나는 당대의 풍습과 집정관 선거에 대한 묘사, 묵직한 감동까지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과격한 급진파로서 보수파인 키케로와 대립했던 카틸리나는 역사적으로는 패자로 남았지만, 스티븐 세일러가 소설로 재구성한 카틸리나 역모사건의 전말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르디아누스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카틸리나의 인간적 매력과 면모에 이끌린다. 고르디아누스와 메토가 결국 최후의 산 증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책을 덮은 후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빼어난 번역 및 교열도 이 시리즈의 미덕 중 하나다.


C.J. 샌섬 <어둠의 불>
 

전작 <수도원의 죽음>이 진중하기는 하지만 빼어난 재미를 주지 못한 까닭에 어쩌면 읽지 않았거나 한참 뒤로 밀려버릴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신없는 가독성, 잔혹한 묘사와 현란한 반전 등에 치중하지 않아도 진지함과 치밀함으로 얼마든지 독자를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살인죄로 압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빠진 소녀와 비잔틴 제국의 비밀 병기였던 정체 불명의 검은 액체를 둘러 싼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전작에 비해 훨씬 박진감도 넘치고, 두번째 작품이니 만큼 캐릭터들도 생생하다.
<수도원의 죽음>에서 등장했던 조수 마크 포어에 비해 100배는 매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잭 바라크의 등장은 향 후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무르익게 한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 작품이 마지막 출간이 될 것 같은 우울한 예감도 피할 수 없다.

작품의 소재로 쓰인 신비의 액체 '그리스의 불'은 해리 터틀도브의 <비잔티움의 첩자>에서 언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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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도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올리는 2010년 4/4분기 단평. 아, 이제서야 숙제를 마치는 기분. 새해에는 이런 부담스러운 숙제를 스스로에게 지우지 않으리.


  <방화벽> 
2006년 <하얀 암사자>부터 시작하여 매년 한 편씩 읽어온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5년만에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번역된 시리즈를 모두 읽은 셈이다. 이쯤되니 발란더가 사는 도시 말뫼도 제법 친근하게 느껴진다.
만켈의 발란더 시리즈는 미스터리 소설의 출판이 가물에 콩나듯 하던 시절에 이례적으로 총 5편이 우리 글로 번역되었다. 마지막 번역작인 <방화벽>이 2004년에 출판되었으니 더이상 추가로 소개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방화벽>에서 발란더의 딸인 린다는 경찰이 되려고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만켈은 2004년 린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경찰의 꿈을 이룬 린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어쨌든 발란더가의 경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방화벽>은 인터넷과 해킹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관련 전공자인 내게는 확실히 이런 소재가 오히려 리얼리티를 좀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해커들이나 프로그램 전문가들이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언제나 불만이다. (내가 전지전능한 프로그램 개발자가 아니라서 이들을 질투하는 것인지도.)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그냥 먼치킨 캐릭터라고 인정해 버리자. 하하하.


 <어둠의 불>
샌섬의 꼽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 제 2 작.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하나인 헨리 8세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가히 역사 미스터리 소설의 교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다. <어둠의 불>의 감동과 재미를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전작인 <수도원의 죽음>을 먼저 읽어야 하는 만만치않은 진입장벽이 있긴 하지만, 두툼한 분량의 소설 두 권을 읽고 나면 만족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긴긴 겨울밤에 기꺼이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때로는 사건의 진행이 너무 느린거 아냐? 수사를 이렇게 더디게 진행해도 되는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디테일은 당대의 생생함을 실감나게 전달해 준다.

전작인 <수도원의 죽음>보다 <어둠의 불>이 훨씬 더 재밌는 이유라면 이 작품에서 등장한 잭 바라크라는 인물의 매력일 것이다. 바라크와 샤들레이크의 변모해 가는 관계만으로도 웬만한 버디물보다 더 재미있다.

'권력은 무상하고, 민중은 영원하다. 그리고 역사는 도도하게 흐른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결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얼굴에 흩날리는 비>
어둠의 여왕 기리노 나쓰오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직 어둠의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소설은 일반적인 하드보일드의 충실한 전형을 따르고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풍부하다. 이후 기리노 나쓰오는 점점 더 미스터리와는 멀어지는 길을 걷게 되는데, 초기에는 그도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가를 꿈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필명을 얻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리라는 생각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현재 본인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현재의 모습을 미리 알아버린 채 과거의 모습을 보는것은 약간 맥빠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최소한 미로 시리즈의 제 1작을 먼저 보기위해 남겨두었던 <다크>를 조만간 읽어야 겠다. 그전에 중간 작품이 먼저 나와준다면 더 좋겠지만. 미로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향 후 그의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 예상되지만 말이다.


 <로마 서브 로사4 - 베누스의 주사위>
작가도 글을 써갈때 마다 성장하는지, 시리즈 4권쯤에 이르니 작가의 원숙함이 절정을 이룬다. 묘사의 박진감과 능수능란한 장면 전환 등이 소설의 가독성을 한층 끌어올리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재판과 사건을 배경으로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재구성해내는 작가에게 찬탄의 박수를 보낸다.

로마 서브 로사, 밀레니엄, 샤들레이크 시리즈까지, 2010년은 유달리 빼어난 시리즈 작품들을 만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재밌는데 왜 책이 많이 안 팔리는지. 후속작에 대한 소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아는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붙잡고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후의 작품들도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리라장 사건>
본격 미스터리는 순수하게 본격 미스터리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옆에서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가는데 이렇게 태연한 사람들은 뭐고, 이렇게 태평한 경찰들은 무어란 말인가? 라는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무려 1958년 작품 아닌가.
위에서 열거한 본격 미스터리적인 황당함을 제하고, 52년이라는 시대적인 보정값을 추가해서 읽는다면 후한 점수를 줄 만 하다. 본격 미스터리의 가장 주요한 요소인 메인 트릭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동기나 개연성 등까지 따져본다면 아쉬운 점이 많다. 동시대라도, 본격 미스터리더라도 충분히 더 설득력 있고 리얼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그런 작품들이 바로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는 것이다. 본격미스터리라는 장르는 자칫하면 300페이지짜리 추리 퀴즈로 전락할 수 있다.

 


* 내가 위의 책들을 읽는 동안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독자이었던 물만두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2004년, 내가 알라딘 서재에 처음 리뷰와 페이퍼들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추리소설 독자라고 반가워 하시며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 주신 이가 물만두님이다. 으레 신간이 나올때 마다 관련 페이퍼에서, 책을 다 읽고나서 뒤져보는 리뷰들에서, 익숙하게 늘 만날 수 있었던 이름을 이제 새로 나온 책들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부재를 가슴아프게 실감한다. 결코 많지 않은 추리소설 독자들은 최고의 동료를 잃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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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1-27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닝 만켈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계속 못 읽고 있어요. 절판되거나 품절되면 안 될텐데 'ㅅ' 이번에 네이버 장하준의 서재 추천 도서에 특이하게(?) 헤닝 만켈의 책이 있어서 저도 다시 또 보관함에 담아 두었다죠.

샤들레이크 <수도원의 죽음>을 얼마전에 읽었어요. 최근에 <울프홀>을 읽었던지라 더 재미나게 읽었긴 한데, 재미있고, 잘 쓴 이야기라는 건 아는데, 제겐 플러스 알파 되는 매력은 없더라구요. 두 번째 권 읽게 될지는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어둠의 별>도 분량 보나마나 장난 아니겠지요? ^^;

전 <다크>를 워낙 옛날에 읽었지만, 이번에 미로 시리즈 1편도 읽으면서 굉장히 흥미진진했어요. 뭐랄까, 스타워즈 이전편 다시 돌아가 보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뭔가 강력한 반전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걸 다 읽고야 겨우 기억해내서 흥미와 충격이 배가 되었다죠.

<로마 서브 로사>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는 저도 얼핏 접했습니다. 팔코 시리즈만도 안 팔린 걸까요? 표지도 좀 잘 내고, 선전도 좀 빵빵하게 하지, 마케팅에서도 실패한듯 합니다. 전 1권만 읽고, 뒷 권은 계속 사두기만 했지만, 정말 매력적인 책인데 말입니다.

<리라장 사건>은 전 완전 별로였어요. 말씀하신 단점들 외에 작가가 추녀와 살찐 여자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듯. 오래전 소설 보며 '이건 남녀 차별이야!' '인종 차별이야!' 이런 불평 안 하고, 그런 불평 하는거 좀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 책은 작가의 혐오가 문장문장마다 느껴져서 이야기도 별로였는데, 불쾌하기까지 했어요.

그 시대 보정값이라는 것이 .. 뭐랄까, 시간이 지나 생명력을 잃는 그런 매력이라면, 옛날 소설을 찾아 '읽었다' 라는 만족감 밖에 없는듯 합니다. 저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만족감. 전 미스터리 작가에 대한 지식은 많이 없습니다만, 동시대 작가 중 요코미조 세이시나 마츠모토 세이치의 경우는 지금 읽어도 재미나고 매력적이죠.

물론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

oldhand 2011-01-27 11:59   좋아요 0 | URL
발란더 시리즈는 일반 경찰 소설들하고는 스타일이 좀 다른 면이 많은 것 같아요. 다 그런건 아니지만 좀 국제적인 범죄들도 많이 나오고, 동료들이 고정 출연을 하기는 하지만 협력 수사 같은것도 마틴 벡 경감이나 87분서 같은 정통 경찰물들하고는 좀 다르지요. 나온지 좀 시간이 흘러서 절판의 위험이 있긴 하네요. 최근에 헤닝 만켈의 다른 소설이 하나 새로 나왔던데요. 미스터리는 아닌것 같고.

<수도원의 죽음>은 사실 저도 그냥 그랬습니다. 너무 평이하고, 너무 사설이 많기도 하고, 진행도 너무 느리고 등등. <어둠의 불>은 훨씬 재밌었어요. 근데 이게 더 재미있기 위해서는 <수도원의 죽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거죠. 이미 읽으셨다니 <어둠의 불>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리라장 사건>에 대해 말씀하신 불쾌한 점은 저도 읽는 중에 느꼈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좋은 점들 위주로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읽는 중에는 계속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는데 밤에 감시만 잘 해도 금방 범인을 잡았을 것을. 경찰들 너무하네. 등등의 욕을 계속 했었는데, 메인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의 인상이 강렬해서 그것만 뇌리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래서 리뷰는 읽은 후에 바로 바로 써야 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