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수첩 판결로 인해 시끄럽다.
사실은 '제도권 언론과 정치권만' 시끄러워 보인다.

각 신문사 기사 제목들을 죽 훑어 보다 보니 제일 많이 눈에 띄는 단어가 '갈등'이다.

'갈라지는 한국사회, 광우병 정국 2R'
'"납득 못해" vs "환영" 엇갈린 반응 ... 갈등 증폭' 등등.

건전한 민주주의 시민 사회라면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입장'이란 것이 있고 '주장'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나라안의 모든 국민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오직 한 목소리만 존재 한다면 그것이 민주사회인가. '그들'이 만날 욕하는 북한과 다를바 없지 않겠나.

마치 판결 하나로 온나라가 갈등에 휩싸이고, 사회가 양분되기라도 하는 것 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결국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은 그냥 묵묵히 추종하라'라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음험하기 짝이 없다.

갈등이 있어야 토론도 있고, 합의가 있는 것이다. 묵묵히, 조용히, 아무 탈 없이 흘러가는 사회는 결국 속으로 곪아 썩어들어가기 마련이다.

싸워도 된다. 놔두자 좀. 어차피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 없다. 정치적 사안에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사적으로 만나면 다 잘 어울리질 않나. 사실 우리나라는 개개인, 단체들, 조직들의 사적인 친밀도가 너무 높아서 문제다. 민족주의의 발현이 항상 공동체의 통일과 일사분란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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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2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해의 베스트 : 마이클 코넬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돌아온 '회장님' 마이클 코넬리의 법정 스릴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가 나름대로 치열한 경합을 통해 선정되었다. 동작가의 작품 중 <시인>이 독자들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것 같지만, 내게는 세상과 타협한 장사꾼 변호사 '미키 할러'의 매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쨌든 마무리가 얼추 예상이 되는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법정에서의 결말은 주인공이 이 얽힌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독자의 예측을 불허한다.
연초에 읽었던 탓에 기억이 희미해져, 연말과 새해 벽두에 걸쳐 읽었던 <스몰 플레인스의 성녀>가 더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중반에 국내에 소개되었다가 쓴맛을 보고 10년이 훌쩍 넘은 후 다시 돌아와 장르 소설 독자들에게 "마이클 코넬리"라는 이름을 각인케 한 선봉작으로서의 의미도 있고, <시인>, <실종>등 작가의 다른 수작들 역시 무척 좋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베스트로 선정하였다. '미키 할러'가 등장하는 후속작도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잔뜩 기대해 본다.


서스펜스 스릴러 부문 : 스콧 스미스 <심플 플랜> 
 

가장 손에 땀을 쥐고 정신없이 읽은 책이라면 단연 이것이다. 이미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흔하고 평범한 소재와 전개,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주인공을 독자에 감정이입 시키는 것에 완전히 성공한 것 같다. 이런 내용의 소설들이 흔히 그렇듯 사건은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절망적인 사건들을 연달아 힘겹게 맞이해야 한다. 소설은 인간의 도덕심이 얼마나 위태롭고 무력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의 심각성 만큼이나 소설을 읽어나가는 가속도도 비례하여 결말을 만나기 전까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진정한 페이지 터너.
<소녀의 무덤>이 못지 않게 좋았지만, 너무 돌연한 결말부분의 액션이 조금 아쉬워서 <심플 플랜>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전 미스터리 부문 : 존 딕슨 카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황금기의 추리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나른함과 느슨함.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느낌. 오컬트 요소가 빠져있는 딕슨 카의 소설도 이런 느낌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사건 관계자 세 명의 진술로 사건을 간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더욱 독자의 방관자적 관점이 강화되는 소설이다. 이불 뒤집어 쓰고 귤 까먹으며 겨울밤을 함께 보내기에 이 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더구나 그 연극이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면 말이다.


하드보일드 부문 : 조지 펠레카노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거침없고 와일드하다. 흑인 탐정 데릭 스트레인지의 소심한 듯 신중한 성격도 좋지만 소설의 재미를 크게 높여주는 것은 전직 백인 경찰 테리 퀸의 캐릭터다. 선과 악이 묘하게 공존한다고 해야할까? 내 짧은 필설로는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경험해달라고 할 밖에.
그리스 이민자의 후손인 작가가 흑백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의 묘사, 거침없는 욕설. 결코 챈들러 처럼 우아하거나 맥도널드 처럼 사색적이지 않다. 이 소설의 좌표는 로렌스 블록과 미키 스필레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쌈마이적인 버디 무비의 내용을 따르고 있지만, 싸구려스럽지는 않다. 캐릭터의 힘이다. 뒤늦게서야 스트레인지 탐정을 만난것이 아쉬울 뿐이다.


일본 미스터리 부문 : 요코미조 세이시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장르소설 독자들에게 시리즈는 중독이다. 그 작가의 그 탐정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함, 익숙한 구성, 낯익은 문체. 너무 자주 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감질나지도 않는 기간 1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사나이 긴다이치 고스케(최근 <밤산책>의 출간으로 매년 여름 시리즈 출간의 불문율이 깨지긴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반갑고, 재밌으니 좋다. 긴다이치 시리즈는 현대 일본의 신 본격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전만의 향기가 살아 있다. 눈에 띄는 명문名文은 아니지만 힘있고 고풍스러운 문장도 긴다이치 시리즈만의 확실한 매력이다.


단편집 부문 : 요코야마 히데오 <제 3의 시효>
 

경찰소설의 달인 요코야마 히데오. 경시청 강력 1, 2, 3반의 개성넘치고 판이한 스타일의 반장들과 그들이 해결하는 사건들을 다룬 연작 단편집이다. 감동 강박증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도 받는 작가지만, 이 단편집에서는 크게 오버하지 않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수록되어 있는 각각의 단편들도 어느 하나 쳐지는 것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준다.


비非 미스터리 부문

제임스 P. 호건 <별의 계승자>
 

체제 경쟁이기도 했던 우주 개발은 사회주의권의 몰락, 천문학적인 투자에 대한 실효성 문제 등으로 강대국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2010년임에도 아직 인류는 화성에 발자국을 찍지도 못하였으며, 달에 기지 하나 세우지 못한 상태이다.
이 책은 1970년 대 씌여진 2020년 대 배경의 하드 SF 소설이다.
우주 개발이 정점에 달해 있던 시기인 터라 2020년 지구의 우주 과학은 목성에 유인 우주선이 다닐 정도까지 발달 해 있다. 달에서 발견된 5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사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토론과 추론을 거듭하는데, 결국 인류 근원의 미스터리에 도달하게 된다.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와 미스터리 소설을 방불케 하는 전개, 화끈한 가설 등 SF 소설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렇게 재밌고 수상 경력도 화려한 소설이 발표한지 30년이 넘어서야 국내 출간이 이루어질 만큼 열악한 우리나라의 SF 시장이 아쉬울 따름.


이사카 코타로 <골든 슬럼버>
 

뒤섞인 시간대 서술, 능수능란한 복선 처리, 암울한 상황에도 쾌활함을 잃지 않는 등장인물들, 산뜻한 마무리. 이사카 코타로의 전매특허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이다. 나와 동갑인 이 작가(예전에는 이 말이 젊은 작가라는 말에 다름아니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참 '재기발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것 같다. 혹자는 너무 가볍고 통통 튀기만 한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작가와 코드가 잘 맞는다. 최근에 나온 <글래스호퍼>를 제외한 국내 출간작 전부를 다 읽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기존의 작품들에 비하면 블록버스터라 할 만큼 장대한(?) 스케일과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들 중 최상위 레벨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 비교적 최근작인 <마왕>, <골든 슬럼버>, <모던타임즈> 등의 작품들에서 작가가 말하고 있는 주제, 혹은 세상에 대한 시각들에 대해서는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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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7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절대 점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일은 항상 어렵다.
미스터리 동호회 등에서 연말마다 자주 치러지는 "올해의 미스터리" 같은 집계에 투표를 해 본 적은 있으나 개인적으로 <연말 결산> 같은 것을 거의 하지 않았던 이유도 별다른 목적 의식이나 지향점 없이 손 가는대로 읽었던 책들을 다시 재단하고 게중 좋았던 것을 선정하는 작업이 내겐 너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근 2~3년 간 리뷰나 단평도 거의 남기지 않았기에, 나의 독서 기록은 읽었던 연도와 월만을 달랑 기재해 놓은 엑셀 문서 하나가 전부다. 연초에 읽었던 책들의 목록을 보니 아니, 이게 과연 올해 읽었던 책들인가 싶을 만큼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들도 있다. 기껏해야 소설로만 보면 70여 권 남짓을 읽었을 뿐인데도 그렇다. 이렇게라도 한번 씩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빈약한 기억력에 대한 보조메모리 기능은 해 줄 것 같다. 나의 주 탐독 대상인 미스터리 소설 및 장르 소설 분야에 한정하였고, 출판 연도에 상관없이 내가 올해 읽은 책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2009년 미스터리 결산

총평
여전히 일본 미스터리 출판의 행렬은 이어졌다. 하지만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요 몇년간 대부분 소개되었기 때문인지, 눈에 띄는 명품들의 빈도수는 조금 줄어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거의 발본색원 수준으로 소개되는 것 같고, 미야베 미유키는 히가시노 게이고 만큼의 다작 작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출판이 상대적으로 뜸해졌다. 그 이외에도 신본격 시대 초기의 작품들이 시공사와 한스미디어를 통해 조금씩 나오고 있어, 외면당했던 시기의 작품들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풀어 주고 있다.

오히려 영미, 유럽권의 미스터리 스릴러들이 폭넓게 소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도 많이 눈에 띄는 한 해였다.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고전들이 다수 출판되었다. 딕슨 카를 위시하여 울리치, 브랜드, 버클리 콕스, 반 다인의 작품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마냥 깜짝 출간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평가는 냉혹하기 짝이 없어 작품의 질과 마케팅, 판매량의 상관 계수에 대한 애호가들의 토론거리만 늘어난 셈이다.

지난 한 해 일본보다 영미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마이클 코넬리, 존 딕슨 카, 앨리스 피터스, 제프리 디버 등이 두 권 이상의 작품들로 내게 큰 즐거움을 안긴 작가들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로렌스 블록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으며, 또다시 정처없는 오랜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작가들임을 재확인 시켜 주었다.


선정 부문과 후보들
올해의 베스트와 5개 세부 부문, 비非 미스터리 부문으로 나누어 선정하였다.

서스펜스 스릴러    

 

  

 

  

가노 료이치 <제물의 야회>
제프리 디버 <소녀의 무덤>
마이클 코넬리 <시인>
스콧 스미스 <심플 플랜>


고전 미스터리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녹색은 위험>
안소니 버클리 콕스 <두 번째 총성>
존 딕슨 카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코넬 울리치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드보일드  

 

 

 

 

 

로렌스 블록 <무덤으로 향하다>
하라 료 <내가 죽인 소녀>
조지 펠레카노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일본 미스터리   

 

 

 

 

온다 리쿠 <유지니아>
요코미조 세이시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야마구치 마사야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단편집  

 

 

 

 

한동진 <경성 탐정록>
요코야마 히데오 <제3의 시효>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존 딕슨 카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교고쿠 나츠히코 <항설백물어> 


비非 미스터리, 올해의 베스트는 따로 후보작을 기술하지 않음.

 

영예(?)의 최종 선정작과 선정의 변은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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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 독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 지난 2001년이었다.
가끔 땡기면 사서 읽곤 하던 추리 소설에 본격적으로 탐닉하게 된 것도 신문에 소개된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찾아 들어가 정보와 감상들을 얻어 듣기 시작한 이후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암흑기였다. 서점에 깔려 있던 책들을 마지막으로 시그마 북스가 절판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며, 해문의 Q 미스터리도 절판 상태였고, 현재의 세계 추리 걸작선으로 재 발간되기 전이었다. 일신, 문공사 등의 미스터리 시리즈도 2000년 대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서점에서 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끔 단행본으로 나오는 현대 스릴러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미스터리라고는 해문의 빨간 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던 시절.
오로지 헌책방을 전전하거나, 고수들이 올린 절판된 동서나 자유의 리스트와 리뷰들을 보면서 입맛만 다시던 시절.

이 후 셜록 홈즈 완역판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브라운 신부, 괴도 뤼팽, DMB 등 시리즈 기획물들이 줄줄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일본 미스터리 열풍에 힘입어 실시간으로 이웃 나라의 신작들을 접할 수 있게 된 요즈음에 이르렀다.

주저리 주저리 옛날 신세 한탄을 해 댄 이유는,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전무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 중 한 명이 다름아닌 존 딕슨 카였기 때문이다.

DMB로 재 발간된 <모자 수집광 사건>, <화형 법정> 등과 초역 되었던 <세 개의 관> 이 후, 미스터리 부흥의 시대에 한 걸음 비껴서 있는 듯이 보였던 딕슨 카의 소설들이 2009 년을 맞이하여 속속 새롭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왕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해적판으로만 나왔었던 데뷔작 <밤에 걷다>, 딕슨 카의 대표작 리스트에 이름을 빼놓지 않고 올리던 <구부러진 경첩>과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카가 후반기에 주력했던 분야인 역사 미스터리들 중 최초의 번역인 <벨벳의 악마> 까지. 향 후 출간이 확정된 몇 몇 작품들을 더하면, 딕슨 카에 대한 미스터리 독자들의 오랜 갈증은 거의 해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그동안 접했던 카의 미스터리 소설에 비하여 대단히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사에 관련된 세 사람이 펠 박사에게 사건에 대해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털어 놓는 하룻 밤 동안의 이야기다. 수사관 캐러더스, 경찰 부국장 허버트 암스트롱, 카의 팬들에게는 익숙한 해들리 총경까지. 처음 접한 사건은 대단히 불가해한 점들이 여럿 눈에 띄지만, 각각의 진술이 진행됨에 따라 대부분의 의문들은 풀려 나간다. 해들리 총경의 진술에서는 범인까지 확실해 보이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여러가지 단서들을 바탕으로 탐정의 추리과정을 막판까지 꾹 묻어 두었다가 일시에 터뜨리며 모든 의문점들을 해소하는 일반적인 퍼즐 미스터리나 딕슨 카의 여타의 작품들과는 느낌이 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구조가 딕슨 카의 장점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막판의 깜짝쇼를 포기하고, 서술 과정의 흥미를 유지하고 있기에 단 한건의 살인 사건과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트릭임에도 장편 소설의 결말까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한다. 중간 중간에 선보이는 딕슨 카 특유의 유머 코드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비교하자니, 다소 초라하고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고 즐겨 읽던 추리소설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 들어 있다.

1936년 발표된 거장의 대표작이 70년이 넘어서야 이 땅에 소개되었다. 하루에도 화제작들이 여러권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라서, 읽을만한 책도 없던 7-8년 전 소수의 매니아들이 모여서 리스트만 거론하며 안타까워 하던 그 시절이 아니라서, 카의 미번역작은 커녕 절판된 책들이라도 어느 헌책방에 있더라는 소문만으로 달려가던 그런 열성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겪었던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서 숱하게 들었던 "예전엔 어려웠지. 지금은 정말 좋아졌다~"류의 훈계나 회고담은 아닐지라도, 새롭게 미스터리의 세계에 빠져든 신진 독자들과, 오매불망하던 전설의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도 이제는 그냥 무덤덤해진 오랜 독자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고 싶다.

"이 책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전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p.s. 딕슨 카의 소설이 단순히 추억 상품으로 취급 받는 것은 억울하다. 재미나 품격 면에서 손색이 없는 고전이 단지 구닥다리라고 해서 외면 받는 것이 안타까울 뿐. 

p.s.2. 펠 박사의 사후 처리는 예전부터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일로 번스의 방식이 맘에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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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9-11-0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의 귀환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

oldhand 2009-11-02 20:25   좋아요 0 | URL
아래 페이퍼 댓글로 파란여우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저 어디 다른 곳에 간 적은 없습니다. 귀환이라기 보다는 그냥 잊어 먹을만 하면 한번씩 집에 들르는 뜸한 탕아라고나 할까요. ^^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올해는 유달리 기대 밖의 고전 미스터리들이 심심치 않게 출간되어 한편으로는 놀라우면서도 몹시 즐거웠었는데, 단연 최고의 소식이 아닌가. 

 <녹색은 위험>, <두번 째 총성>도 대단히 놀랍고 반가운 뜻밖의 출간이었고, <구부러진 경첩>과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도 엄청나게 의미있는 출간이었지만, 전자의 두 작품은 대중적인 작가의 인기나 작품의 네임밸류(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적어도 과문한 내 기준에서의 거론되는 빈도나 명성 등)에서, 후자는 이미 여러 경로로 출간의 소식이 솔솔 불어 왔기에 의외성 면에서 이 작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판권을 사갔다는 소식만 들려왔을 뿐 최근까지 전혀 소식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말 놀랍고도 반가운 출간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즐거운 독서뿐. 아울러, 이 기회를 빌미로 울리치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추가로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바라 보기만 해도 즐거운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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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0-1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전에 나왔잖아요.. 라고 말하려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건 원서였군요. ^^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코넬 울리치의 신간을 볼 수 있을줄이야.

oldhand 2009-10-1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바라는 고전 명작 리스트에 항상 빼놓지 않고 상위권에 올랐던 전설의 작품이죠. 딕슨 카의 미번역작들이 줄줄이 출간 혹은 출간 예정인 상황에서, 이제 정말 인구에 회자되던 전설들은 다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나온게 된 것 같습니다. 살아 생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아직 살 날이 많으니 조금 더 기대해 봐도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