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역시 미스터리. (물론 봄, 가을, 겨울에도 역시 미스터리다. 하하)
직장을 옮기는 등의 개인적으로 소소한 변화가 있었고, 다소 한가해 진 틈을 타서 서재에도 도장을 찍는다. 1~2년 이웃나라 일본의 미스터리에 몰두하였다가 작년 부터는 다시 영미권 혹은 유럽의 소설들에 손길을 더 자주 보내고 있다. 작품 선정에 뚜렷한 색깔이 없어 좀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그래도 귀한 리스트를 남기고 있는 메두사 콜렉션, 초반 성적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 좀 걱정되는 장경현의 MOM 등 새로운 레이블들이 기대가 된다.
<벨벳의 악마>
최근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딕슨 카의 미 번역 작품과 절판 작품들을 새롭게 펴내고 있다. 딕슨 카의 개인적인 팬으로서 매우 즐거운 일이지만, 그다지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벨벳의 악마>는 딕슨 카의 역사 미스터리 소설이다. 본격 미스터리 작가의 다재다능한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즐겁다. 청교도 혁명 직후의 17세기 영국에 대한 묘사가 아주 박력있게 펼쳐진다. 주인공의 지나친 정치적 편향성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 편의 모험 활극 소설로는 훌륭한 재미를 준다.
<녹색은 위험>
1940년 대 씌어진 고전 퍼즐 미스터리.
당연히 설정이나 트릭 등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시리즈 두 번째 작인 만큼 커크릴 경감의 개성도 그다지 뚜렷이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장기는 여전하다. <제제벨의 죽음>에서도 익히 보여주었던 작가의 현란한 미스디렉션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생각지도 못했던 국내 발간이라서 더 즐겁게 읽었다.
<밤의 기억들>
독특한 색깔을 가진 작가를 새롭게 접하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토머스 H. 쿡은 계간 미스터리에 게재되었던 단편 <아버지>를 통해 처음 접해보았었다. (기회가 되면 이 단편은 꼭 일독을 권한다. 놀라운 작품. 중반부에 진상을 파악해 버렸다는 나의 개인적인 자랑도 덤으로.) 그리고 <심문>에 이어 당 작품인 <밤의 기억들>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무게감을 보여주었다.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팬덤 중 한명인 C군이 침을 튀겨 가며 칭송하는 작가.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해 본다.
<목소리>
말이 필요없는 아날두르 인다리다손의 에를렌두르 형사 시리즈.
<무덤의 침묵>, <저주받은 피>에 이어 세 번째 번역작이다. 일찌감치 사 두었다가 아껴서 읽었다. 에를렌두르에게도 봄은 올 것인가? 그리고 국내의 독자들이 이 후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결말이 궁금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에를렌두르를 모르신다면 서둘러 만나보시라. (작품 발표 순서는 <저주받은 피> - <무덤의 침묵> - <목소리>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추석마다 돌아오는 사나이 성룡에 이어, 여름마다 돌아오는 사나이가 된 긴다이치 코스케. 요코미조 세이시의 스토리 텔링 능력도 여전하고, 기괴하고 비인간적인 특유의 분위기도 여전하다. 시리즈의 팬이라면 저절로 손이 갈 것이고, 결코 큰 실망을 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시리즈의 선호도를 꼽아 보는 것도 재미가 되지 않을까. 페이지 터너 측면에서는 상위권으로 평가한다.
<제3의 시효>
밥벌이의 지난함과 도서 정가제 강화, 밀린 책 먼저 읽기 등의 이유로 책 구입이 부쩍 줄었다. 이 책도 그 여파에 밀려 이제서야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국내에 소개되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여타 작품들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고, 내 생각도 다르지 않다.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장 적절한 등장인물들과 알맞은 시놉시스에 녹여 놓은 훌륭한 산출물.
<흰 옷을 입은 여인>
1년여 전에 출간되어 소수의 독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던 윌키 콜린스의 고전을 뒤늦게서야 읽었다. 현대 소설의 속도감과 화려함에 익숙해 져 있다가 다소 느릿하지만 품격 있는 이러한 소설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1860년 작이니 발표한 지 150년이 지났다. 지금 한창 쏟아지고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 중 150년 후에도 독자들에게 선택받고 읽힐 만한 명작들이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본다면 고전 명작이 갖고 있는 힘을 실감할 수 있다.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 아니겠는가.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의 나오키상 수상작.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 제 2작.
전편에 비해 챈들러의 그늘을 많이 벗어 던진 모습을 보여준다. 하라 료가 챈들러와 같지 않듯이 사와자키도 말로와 같지 않다. 말로에 비해 사와자키는 경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물론 호락호락한 모습은 절대 아니지만. 지나치게 서구적인 묘사도 좀 줄어든 느낌.
하드보일드 탐정은 참 쉽지 않은 인생을 산다는 점과 그들의 하루는 길고 파란만장하다는 점에선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