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이야기 -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 들끓던 곳
김상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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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밖에서 신음하면서 들어오는데 피가 흘러 옷을 적셨고, 얼굴빛이 창백했습니다. 자객에게 귀에서 볼까지 베여 살이 떨어질 만큼 쪼개져 있었습니다. 때는 1884년 12월 4일 늦은 저녁시간입니다. 목이 달아날 정도로 칼에 베인 사람은 그 당시 실세인 민영익이었습니다. 그날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일이자, 김옥균, 홍영식이 주도한 급진개화파의 거사일이기도 했습니다.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의 칼날에 민영익이 칼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산책을 나갔던 알렌은 10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습니다. 이 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미국 공사관 서기관 찰스 스커드 였습니다. 알렌이 민영익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알렌에겐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청나라에서 병원을 차렸지만 실패하고 조선에 건너 온 참이었습니다. 부채도 있었습니다. 조선 왕실이나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민영익이라는 거물이 자기 앞에서 죽고 만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하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숨을 살리기만 한다면, 인생 역전도 가능했습니다. 어쨌든 그의 헌신적인 진료 덕분에 민영익은 목숨을 건집니다. 만약에 민영익을 살려내지 못했다면,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시기도 일단 뒤로 물러갔겠지요.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왕실과 정부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정까지 받게 되면서 특히 고종은 알렌에게 미국의 의료사정을 묻고 서울에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제중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제중원(濟衆院),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은 최초의 서양식국립병원으로만 기억되기 십상이나 탄생하고 변화되는 과정 속에 조선 말기의 여러 면모들이 개입되는 계기가 됩니다. 즉, 변화의 중심에 서는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1885년 4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을 연 서양식 국립병원의 첫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습니다. 이는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제생원(濟生院)이나 1882년에 폐지된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조선 시대 전통 의료 기관의 이름을 계승한 것입니다. 4월 14일 의정부는 국왕(고종)에게 “혜민서와 활인서가 모두 혁파되어 조정에서 백성에게 시혜(施惠)하는 뜻이 소홀해져 별도로 병원하나를 만들어 광혜원이라 칭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 후인 4월 26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고종에게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명하자고 했습니다. 고종은 즉시 이를 재가(裁可)하여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이 되었습니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바꾸게 된 이유 몇 가지가 나오나 이름 이야기는 이쯤 할까 합니다. 어쨌든 제중원의 설립자는 고종과 조선 정부였습니다.

 

 

새로운 의학에 대한 바람은 모든 신문물이 그러듯이 바다를 끼고 시작되었습니다. 부산, 원산, 인천. 이 세 곳의 공통점은 일본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습니다. 187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던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이 개항되고, 이어서 원산, 인천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세 항구에는 일본인들이 속속 상륙해 저팬타운을 조성 했습니다. 1884년 9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알렌은 일기장에 “부산은 완전히 왜색(倭色)도시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6일 뒤 인천에 도착해서도 “일본인이 우세하고, 가장 좋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개항장은 한마디로 조선 속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화가 치밉니다. 어쩌다 그 지경까지 갔는지요. 이 세 항구에는 일본 병원이 들어서있었습니다. 일본인 영사관 직원을 포함한 거류민들의 치료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지요. 이 병원들은 일반 개업의가 경영하는 병원이 아닌, 일본 정부가 군의관들을 파견해 세운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한반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서양식 병원이었습니다. 제중원의 오픈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닫혀있던 문고리를 푸는 고종과 조선 정부가 내세운 정치 철학은 ‘동도서기(東道西器)’였습니다. 고종은 1882년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저들의 종교는 요사스럽고 악하나 저들의 기술은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 등을 왜 피하겠는가.

그 종교는 배척하되 그 기술을 본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강약의 형세에 이미 현격한 차가 벌어졌는데,

만일 저들의 기술을 본받지 않는다면

저들의 모욕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고종실록』, 1882. 8.5

 

당시 고종과 조선정부는 미국을 짝사랑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다른 주변국가에 비해서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입장 이었습니다. 미국 역시 조선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요. 영토 확장에 올인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최종 목표는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땅도 크고 인구도 많은 청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청나라로 가는 항로상 중간 기착지로 가장 좋은 곳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이나 러시아가 일본을 차지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비교적 일찍부터 일본에 공을 들였지요. 영국 등 유럽 열강이 아시아에서 즐겨 사용했던 작전인 ‘함포 외교’를 통해 1850년대에 일본을 개항 시켰습니다.

그런 반면 미국이 한반도에 갖고 있던 관심은 일본에 비해선 미미했습니다. 단지,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 상선이 일본과 청나라의 교역로에서 조난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조선 정부에 미국 선원들에 대한 인도적인 조치와 미국 선박에 대한 재산 보호를 보장 받고 싶었지요. 1882년 5월 22일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엔 청나라의 물밑 작업이 주효를 봤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청나라는 특히 187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활발한 대외 팽창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움직임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여 일취월장하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청나라 생각에 미국은 자국과 조선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나라이면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한반도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청나라 땅에까지 욕심을 안 부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오판이긴 했습니다. 미국과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네요.

 

제중원의 설립을 비롯한 각종 근대화정책에 고종과 조선정부가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부분들은 사실 실패작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한때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면서 나라가 부흥하는 듯 했으나 어느새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한 일본을 상대하기는 어려웠지요. 결국 그는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크게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 무심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 땅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과거를 알면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안목도 생길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애정을 갖고 한국의 근, 현대사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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