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산 기억도 없고, 왜 샀는지도 알 수 없어서. 누가 추천했나? 광고가 맛깔났나? 도대체 왜 샀지? 굉장히 궁금해하다 읽으면 알겠지 싶어 첫 장을 펼쳤다. 제법 재미있었고 ‘스탠’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서 바쁜 와중에도 재촉해서 읽었는데,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책을 산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아직 미디어가 모두를 장악하기 이전에는 유랑극단이 인기였다. 옛날 우리도 장날 풍물패나 가면극 같은 것들이 인기였듯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카니발 유랑극단 ‘열가지 쇼’의 단원들은 한 명 한 명 특이하면서도 같았다. 그 중에서도 ‘스탠’은 영리하면서 냉소적이고 야망이 가득한 젊은이다. 그는 ‘지나’에게 접근하여 남편인 ‘피트’의 암호 수첩을 손에 넣고 둘을 이용하여 독심술을 배운다. 난 이 장면에서 미드 ‘멘탈리스트’가 떠올랐다. 주인공인 ‘제인’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을 잘 파악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데 때론 얄밉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당연히 난 ‘스탠’ 역시 ‘제인’과 비슷할거라 여겼는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스탠’은 똑똑하지만 양심은 없었다. 아마 ‘피트’의 죽음과 유년 시절 부모가 준 충격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뭔가 목표에만 매몰된 소시오패스인가 싶기도 하고. 그는 ‘몰리’를 데리고 극단을 나와 독심술을 넘어 ‘심령술사’가 되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원하는 것을 가져도 곧 다른 것을 원하게 되는 그는 심리학자 릴리스를 만나게 된다. 아마 스탠이 릴리스를 만나러 가는 건 릴리스가 의도한 것이었을테다. 릴리스는 그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여 쉽게 손아귀에 넣었다. 인간이 성공이라는 꼭대기에 오르기는 어려워도 올라가는 길에 떨이지는 건 쉬운 것 같다. 철저한 사전 조사로 그 사람의 약점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가진 것도 많으면서 조심성 있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라면 속이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하나 하나 천천히 환상과 속임수를 동원해서 그물 안에 넣었다고 확신한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 이것 역시 릴리스가 의도한 걸까? 몰리와 그린들의 그런 모습은 마치 어머니와 험프리스의 모습이 떠오를테니까.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일까. 사실은 다 뻥이고 -파리의 연인처럼- 스탠은 애초에 유랑극단에서 닭 목을 물어뜯던 가짜 기인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릴리스와 지나가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
정월대보름 다음 날인 1월 16일은 귀신날이다. 이 날은 바깥출입을 삼가고 일도 하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이 날 바깥에 나가면 귀신이 붙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날에는 널뛰기, 윷놀이를 하거나 논두렁에 불을 놓거나 하여 귀신을 쫓았다. 또는 정월대보름에 술도 많이 먹고 놀았기에 하루 더 쉬려고 만든 날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날에는 귀신들이 돌아다니니까 무서운 이야기들이 잔뜩 있겠거니 하며 이 책을 펼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실 귀신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수많은 죄를 저지르는 건 ‘사람’이었다. 동생을 때리던 남자를 죽이려던 오빠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나쁜 놈을 응징한 다원의 이야기나, 아무렇지 않게 과부를 겁탈해서 아내로 삼고 자식마저 죽이려던 남자와 방관 내지는 동조하던 마을 사람들을 밟도록 ‘마고’에게 부탁하고 친구 먹은 금산의 이야기나, 군에서 성폭력으로 고통 받다 끝내 생을 마감한 김 소위와 수많은 희생자들을 위하려던 백 실장과 세상의 부조리와 가해자들의 뻔뻔함을 보고 슬퍼하던 유진의 이야기나, 그저 집안과 아들의 출세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딸을 희생시키고 속여서라도 부와 권력을 움켜지려던 이들을 좌절시킨 동백의 이야기나, 한 세상을 희생시켜 모두가 안전하려는 이기적인 거품들과 정길의 이야기나, ‘동첩’같은 말도 안 되는 자리에 자신이나 동생이 끌려가지 않더록 자신을 희생한 ‘언니’와 그 희생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으려던 할머니와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몹쓸 짓을 하려던 좌참찬의 둘째 아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 베어버린 서율의 이야기나,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더라도 살아나가려고 하는 혜준의 이야기가 모두 그러하다. <창백한 눈송이들>에서 백 실장이 하는 말에 반박하기가 참 힘들었다.“귀신 같은 건 없어.” “귀신이 있었으면, 그런 짓을 한 놈들은 벌써 나가 뒈졌겠지.”(p.114)어두운 길에서 귀신을 마주하는 게 무서울까, 사람을 마주하는 게 무서울까.
부드러운 커피향에 기분 좋게 한모금 마시면 처음엔 고소한 맛이 느껴지고 곧 가벼운 꽃향기 같은 신맛이 느껴진다. 레드와인의 산미라길래 묵직한 느낌일거라 생각했는데 단맛이 산미를 눌렀는지 경쾌해서 좋았다. 가벼워서 봄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벚꽃 맞으면서 나무 아래에서 마시고 싶다. 단맛과 신맛이 잘 어우러지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