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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쓴 <초록 앵무새(원제 ‘Der grüne Kakadu’, 1899)>는 프랑스 혁명 때 '초록 앵무새'란 술집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그 곳에는 진짜와 진짜인 척 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꾸며낸 현실 사이를 오가며 벌이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귀부인이 창녀인 척 웃음 짓고, 순진한 귀족 나으리는 절도범인 양 허풍을 떨어대는 반면, 진짜 살인을 저지른 청년의 말은 허세로 여겨지는 곳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카카듀'는 바로 그 '초록 앵무새'의 앵무새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일본식 끽다점, 유럽식 까페와 살롱, 우리식 다방, 다원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식 까페는 주로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베이커리 까페 형태였다고 하고, 미국 방식은 주로 술의 사이드로 커피가 나오는 형태이고,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곳은 음식점에서 디저트로 커피가 나오는 형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독일식이 먼저 들어오고, 음식과 함께 커피를 파는 끽다점 형태가 그 다음 유행이었다고.
경성 관훈동에 조선인이 만든 끽다점인 '카카듀'가 들어섰다. 조선 최초의 한국계 미국 국적자인 현앨리스와 사촌 이경손이 함께 만든 까페였으며,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문학과 영화를 이야기하고 낭만을 노래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꾸며낸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법. 불안하고 아프던 시대에 평안해 보이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는 미국인인 현앨리스를 건드리는 대신 이경손을 불러다 매타작을 했다. 알지 못하는 일로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체한 일로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버린 그는 불안해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냈다.
이 책은 어둡고 춥고 가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울하고 처참하지만은 않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경성에도 딴스홀을 허하라고 할만큼 즐기는 이들도 있었고, 그 이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도 있었다. 이경손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대대로 의원 일을 하는 집안을 뒤로 한 채 신학에 발을 담갔다가 극작가와 영화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젊은 시절 이경손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적당히 실패할 것만 같았다. 그가 만든 '장한몽'은 대흥행 했으나 '숙영낭자전'은 실패했다. 스스로를 '촙수이 문사'라고 칭하며 씁쓸해 했으나 조선 최초의 영화 소설을 신문에 연재했고, 근대 문예작품(이광수의 <개척자>)을 최초로 영화화 했으며, 나운규를 발탁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양자강>을 만들었다. 그는 흥하든 망하든 꾸준히 여러 영화들을 만들었고, 능력에 비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비운의 작가(이영일)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경손의 눈으로 본 현앨리스는 처음에는 그저 미옥이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추앙하던 현손의 모습이 되어가는 듯 했다. 결코 자신이 가지 못할 길을 걷는 그녀를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다시 그리워했다. 그리고 상하이의 그 날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한 명은 태국으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남한에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북한으로 갔다.
현앨리스는 일제가 패망한 뒤 주한 미24군 정보참모부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CCIG-K)에 군무원으로 배속됐다. 계급은 소위.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 당시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된 경우가 많아서인지, 박헌영과 친해서인지 결국 현앨리스는 주한미군에서 해고된 후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도 입지를 잃고 북한으로 '귀국'했으나 끝내 미제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그렇다. 사실 이 책은 현앨리스의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이경손이 태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변신한 이야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현앨리스에게 지면으로나마 다른 삶을 주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보헤미안'을 꿈꾸던 이경손보다 더 자유롭지만 끝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이방인이었던 그녀에게 말이다. 어쩌면 현앨리스가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건, 일제에 묶여 비참한 조선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부장제나 신분, 성별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던 삶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부는 아니지만 하나의 이유가 될지도. 그리하여 모든 것에서 벗어나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이경손의 마음이 그녀의 마지막을 열어놓았을지도.
<숙영낭자전>은 백선군이 선녀인 숙영에게 반해 아직 인연이 아닌 때에 인연을 맺은 이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으나, 어찌어찌 숙영 낭자가 다시 돌아오게 된 이야기이다. 물론 시기와 질투를 하는 여종도 있고, 며느리를 믿지 못해 죽음으로 몰았던 시아버지도 있고, 숙영 낭자가 죽었다고 아들의 혼처를 물색한 남편을 말리지 않은 시어머니도 있다. 결국은 모두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 한시에 죽었습니다가 되었지만, 숙영 낭자의 기구한 삶은 결말만 빼면 불안한 시대에 태어나 찬란한 불꽃처럼 살았던 현앨리스와 닮아 있었다. 사랑과 예술과 이데올로기를 논하던 그녀가 정말로 원하던 것은 무엇일까.
경성의 끽다점 <카카듀>에서 현앨리스가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을 상상해 본다.